뮤직비디오 감독에서 시작한 브렛 래트너는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흥행 감독 중 한 명이었다. 1990년대 말부터 시작되는 그의 흥행 전선은 ‘머니 토크’(1997)와 3편까지 이어진 ‘러시아워’ 시리즈(1998~2007), ‘레드 드래곤’(2002)과 ‘엑스맨: 최후의 전쟁’(2006), 그리고 최근 ‘타워 하이스트’(2011) ‘허큘리스’(2014) 등으로 이어졌다.
그는 예술성을 추구하는 작가는 아니었으나, 장르에 충실한 상업영화 쪽에선 업계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프로듀서로도 큰 성공을 거두었는데 큰 인기를 끌었던 미드 ‘프리즌 브레이크’나 오스카 12개 부문 후보에 올랐던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2015) 등 수많은 작품을 제작했다.
브렛 래트너 감독은 10여 년 전부터 감독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여성들을 성추행했다.
하지만 현재 그는 궁지에 빠졌다. 돈독한 협력을 유지하던 워너 브러더스와의 관계는 끊겼고, 연출하기로 예정했던 프로젝트에서 하차해야 했다. 사실 자업자득이었다. ‘와인스틴 이펙트’의 와중에, 그가 10여 년 전부터 저질렀던 일들이 만천하게 공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포문을 연 사람은 멜라니 콜러. 에이전시 직원이었던 그녀는 2005년 어느 클럽에서 우연히 래트너를 만났다. 친근하게 다가와 자신이 ‘러시아워’의 감독임을 밝혔고, 두 사람은 클럽을 빠져 나왔다. 래트너는 자신의 집으로 콜러를 데려갔고 강제로 섹스를 했다.
“나는 혼란스러웠고 수치심을 느꼈고 부끄러웠다. 그때 겪은 일을 영원히 잊을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잊는다면, 모두들 그렇게 잊는다면, 그런 일은 계속될 것이다. 우린 앞으로 나서야 한다. 내가 발언하지 않고서 다른 여성들의 지지자가 될 순 없다. 브렛 래트너는 나를 강간했다. 나는 그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밝힌다. 난 이제 적어도 거울 속의 나를 직면할 수 있게 되었고, 내가 겁쟁이나 위선자가 아니라고 느낄 수 있게 되었다.”
2017년 10월 20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콜러가 래트너의 이름을 언급했고 ‘버라이어티’에서 기사화하며 큰 파장이 일었다. 그리고 11월 1일, 여섯 명의 여성이 동시에 래트너의 성 추행 전력을 털어놓았고 그 중엔 세 명의 스타가 있었다. ‘엑스맨: 최후의 전쟁’에서 키티 프라이드 역을 맡았던 그녀는 스태프와 배우가 모인 첫 미팅에서 황당한 일을 겪었다. 래트너는 어느 여성 스태프에게 말했다. “넌 엘렌 페이지와 섹스를 해봐야 해. 그래야 페이지는 자신이 레즈비언인 걸 깨닫게 될 거야.” 현재는 커밍아웃을 한 동성애자이지만, 당시 페이지는 자신의 성 정체성을 공적으론 감추고 있었다. 하지만 래트너는 사람들 앞에서 페이지의 정체성을 강제로 드러내는 ‘아웃팅’을 해버렸다. 래트너의 동성애혐오증이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었다.
나타샤 헨스트리지는 모델이던 19살 때 봉변을 당했다. 1994년이었고 그녀는 친구들과 함께, 당시 뮤직비디오 감독이던 래트너의 집에서 파티를 했다. 소파에서 잠깐 잠들었다 깬 헨스트리지는 집에 가려 했는데, 이때 래트너는 완력으로 그녀를 제압해 오럴 섹스를 요구했다. 이후 ‘스피시즈’(1995)로 스타덤에 오른 헨스트리지는 어떤 식으로든 래트너와 엮이지 않기 위해 거리를 두었다. ‘엑스맨: 아포칼립스’(2016)의 사일록으로 유명한 올리비아 문은 배우 지망생 시절 친구의 초대로 어느 영화 현장에 놀러 갔다. 바로 래트너가 연출한 ‘애프터 썬셋’(2004)이었다. 이때 래트너는 올리비아 문 앞에서 마스터베이션을 했고, 충격을 받은 그녀는 뛰쳐나갔다. 이 사실은 사람들 사이에서 알려져 루머로 돌았는데, 래트너는 어느 토크쇼에서 “올리비아 문과 세 번 정도 잤지만 그런 짓은 하지 않았다”는 거짓말을 했고, 사람들은 그녀의 폭로가 있기 전까지는 두 사람이 한때 연인이라고 믿고 있었다.
‘엑스맨:최후의 전쟁’ 촬영 당시 배우와 함께한 모습.
이외에도 증언은 흘러 넘쳤다. 여배우 제이미 레이 뉴먼은 신인 시절이던 2005년, 촬영을 위해 캐나다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래트너를 만났다. 20대의 신인은 업계의 거물을 만나 흥분했지만, 그 감정은 곧 환멸로 바뀌었다. 자신을 오럴 섹스 중독자라고 밝힌 래트너는 그녀에게 자신이 원하는 섹스를 자세히 묘사하고 당시 여친의 누드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섹스를 요구하며 화장실로 가자고 했다.
‘러시아워’(2001) 촬영 때는 엑스트라들에게 치근댔다. 당시 모델이었던 에리 사사키는 엑스트라 중 한 명이었는데, 래트너는 심하게 파인 배꼽티 의상을 입게 했고, 몰래 손가락으로 그녀의 복부를 어루만지며 화장실로 가 섹스하자고 요구했다. 그녀가 거절하자 래트너는 이렇게 대답했다. “유명해지고 싶지 않아?” 또 한 명의 엑스트라였던 조리나 킹에겐 대사를 한 줄 주겠다며 사무실로 오라고 하더니 가슴을 보여 달라고 했다. 킹은 거절했고, 래트너는 그녀를 해고했다. 어떤 엑스트라에겐 수시로 사타구니를 밀착시키며 음담패설을 늘어놓았다.
‘갑질’에 근거한 욕망 충족은 래트너에게 매우 일상적인 일이었다. 플레이보이와 마초 기질로 똘똘 뭉친 그는 자신의 과거가 드러나자, 변호사를 통해 모든 건들을 조목조목 반박했지만 피해자와 함께 증인도 속출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는 일. 현재 그는 할리우드에서 가장 악질적인 감독으로 낙인 찍혔고, 계약한 작품들에서도 손을 놔야 했다. 다음 주엔 래트너와 함께 쌍벽을 이루었던 제임스 토백 감독의 과거 악행을 들춰 보겠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