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6월 고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의 소떼몰이 방북 환영식. 출처=현대아산 홈페이지
1998년 6월 16일 고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은 ‘통일소’ 500마리를 이끌고 판문점을 넘어 북으로 갔다. 정 전 회장은 어린 시절 고향땅 강원도 통천에서 아버지가 소 판 돈을 훔쳐 나와 현대 일가를 이뤘다. 그는 반세기가 넘어서야 고향땅에 빚을 갚은 셈이었다.
세계도 감탄했다. 프랑스 출신의 21세기 최고 지성으로 꼽히는 철학자 기 소르망은 이 놀라운 장면을 보고 “이건 20세기 최후의 전위예술이다”라는 평을 남기기도 했다. 당시 한국은 헌정 이래 최초의 수평적 정권 교체에 성공한 직후였고, 진보적 인사인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당선됐다지만 정 전 회장의 빅 이벤트는 국민들에게도 상당한 쇼킹이었다.
정 전 회장은 이후에도 수차례 방북했고, 고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담판 끝에 그해 금강산 관광 사업을 성사하기에 이른다. 남북 분단 반세기 만에 열린 길이었고, 제대로 된 의미로서 남북경제협력 사업의 시작이었다.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 일환으로 평가 받은 사업이기도 했지만, 정 전 회장의 배포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사업이기도 했다.
그렇게 1998년 11월 18일, 강원도 동해국제여객터미널에선 금강호, 봉래호 등 호화 유람선이 출발해 금강산에 다다랐다. 예부터 비경으로 통했지만, 남북 분단 이후 찾지 못했던 명산인 금강산 관광의 시작이었다. 경협사업을 전담하는 현대아산은 금강산 특구지정 및 이를 위한 SOC사업권자로 나섰고, 특구 내 호텔, 도로 등 인프라 시설을 직접 구축했다.
금강산 관광 당시 모습. 사진=연합뉴스
2003년 9월에는 금강산 육로 코스가 개통돼 이동시간과 거리를 한층 단축시켰다. 이듬해에는 숙박 인프라를 토대로 1박 2일 관광코스까지 개설돼 더 많은 관광객들을 끌어들일 수 있게 됐다. 금강산 관광은 시행 7년만인 2005년 6월 통산 관광객 100만 명을 돌파하며 의미 있는 금자탑을 쌓기도 했다.
그 이듬해인 2006년엔 금강산으로 가는 길목인 고성에 화진포아산휴게소가 영업을 시작했고, 같은 해 외금강호텔도 문을 열어 관광 인프라를 넓혀갔다. 2007년엔 금강산의 진수라 할 수 있는 내금강 코스까지 확대되면서 금강산 관광은 발전에 발전을 거듭했다. 2008년부터는 자가용을 이용해 금강산 관광을 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남북 간 경협의 상징과 같았던 금강산 관광사업은 2008년 7월 11일 뜻밖의 사태로 인해 중단됐다. 그날 금강산 관광에 나섰던 50대 한국인 여성 고 박왕자 씨가 오전 5시경 해안가 산책에 나섰다 북한 초병에 의해 피격된 것이다. 금강산 관광은 통산 관광객 200만 명 돌파를 불과 5만 명을 남겨두고 이 사건으로 인해 중단됐다.
그래픽=백소연 디자이너
이 중단사태가 오늘 날까지 장기화될 줄은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현대아산은 이 사태로 인해 1조 원이 넘는 피해 손실을 입을 수밖에 없었고, 이는 현대그룹 전체에 악영향을 끼쳤다. 강원도 속초, 고성 등 금강산 관광 길목에 조성된 상권 및 인프라 시설들 역시 큰 타격을 입었다.
금강산 관광 중단이 장기화되고, 재개 협상도 잇따라 결렬되자 북한은 급기야 2010년 4월 금강산 관광단지 내 시설들을 자산동결 및 몰수 조치했다. 이후 북한은 해외 관광객 유치를 추진했고, 2011년엔 4월엔 기존 특구 법령을 폐지하고 ‘금강산국제관광특별구’란 새로운 법령을 제정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명박 정부에 이어 박근혜 정부가 들어섰지만, 기존의 대북 강경 기조는 지속됐고 10년 동안 금강산 관광사업 재개는 요원한 상황이었다.
그렇게 중단된 금강산 관광사업 재개 문제가 중단 10년 만에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7월 ‘베를린 선언’을 통해 ‘남북대화’ 의지를 천명했고, 결국 지난 9일 남북고위급 회담이란 결과가 도출됐다.
북한은 오는 2월 평창올림픽에 선수단 파견을 결정했고, 그 파견 코스로 금강산 육로 코스가 유력시되고 있는 상황이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언더커버] 금강산 관광 중단 10년 2-금강산 인프라 현황은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