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은 오래전부터 선수들에게 주어진 ‘휴가’로 여겨졌다. 1월은 얘기가 다르다. 1월에 단체 팀 훈련이 아예 사라진 것은 올해가 불과 두 시즌째다. 지난해 처음으로 전 구단이 스프링캠프를 2월 1일에 시작했을 뿐, 이전까지는 대부분의 팀이 1월의 절반 이상을 스프링캠프에 할애했다.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선수협)가 오랜 기간 투쟁한 끝에 ‘스프링캠프 2월 시작’이라는 결과물을 얻어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모두를 만족시키는 규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비활동기간과 관련된 결의도 마찬가지다. 선수 간 ‘빈부 격차’로 인한 시행착오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 초창기에는 12월에도 지옥 훈련
사실 프로야구 출범 초창기에는 12월에도 쉬지 않고 합동 훈련을 했다. 김인식 전 국가대표 감독은 “실업야구 시절부터 프로야구 초창기인 1980년대에는 12월에도 체력 단련 위주로 겨울 팀 훈련을 진행했다”며 “내가 수석 코치로 몸담았던 해태가 1986~1989년 한국시리즈를 4연패 했는데도, 한겨울에 야구장 위에 쌓인 눈을 치우고 배팅 훈련을 했다”고 회상했다. 다른 팀들은 해태를 꺾기 위해 극기 훈련도 마다하지 않았다. 김 전 감독은 “정신력 강화 차원에서 오대산 얼음물에 입수하고, 강심장을 기르기 위해 화장터 앞문으로 들어갔다가 뒷문으로 나오는 이색 훈련도 시키곤 했다”고 귀띔했다.
모든 구단이 12월 단체 훈련을 하지 않게 된 것은 1990년대부터다. 비로소 선수들에게 진정한 ‘비활동기간’이 생겨났다. 그러나 선수들에게 알음알음 ‘반강제적’ 자율 훈련을 시키는 구단도 여전히 존재했다. 1999년 선수협이 발족하면서 비로소 비활동기간을 사수하기 위한 투쟁이 시작됐다.
사진제공=넥센 히어로즈
구단들의 논리는 한결같았다. “운동선수는 성적이 곧 몸값이고, 성적을 높이려면 훈련의 양과 질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면서 임의로 스프링캠프 출국 일을 앞당기곤 했다. 일부 감독들도 “단체 훈련을 하지 못하면 결국 선수가 손해를 본다” “훈련을 많이 해서 좋은 성적을 내고 연봉을 올리는 것이 스스로의 가치를 높이는 일”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처음에는 선수들도 군소리 없이 따랐다. 그러나 점점 선수들 몸값이 높아지고 구단에 의견을 표출할 수 있게 되면서 “스프링캠프 기간이 너무 길다”는 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 김성근 감독과 선수협의 대립
도화선에 불을 붙인 건 김성근 전 한화 감독이다. 김 감독은 강도 높은 지옥훈련으로 유명한 지도자다. 2007년 SK 감독으로 부임한 뒤 같은 방식으로 선수들을 지휘해 팀을 정상에 올려놓았다. SK는 2007년과 2008년 한국시리즈를 2연패했지만, 2009년 전지훈련을 가장 먼저 떠난 팀이었다. 일부 베테랑 선수들과 재활 선수들을 1월 2일 일찌감치 일본으로 보냈다. 본진도 나흘 뒤인 6일에 합류했다. 새해가 밝자마자 훈련을 떠난 선수들은 두 달이 지난 3월 5일에야 귀국했다.
‘디펜딩 챔피언’이 가장 훈련을 많이 하니, 다른 팀들도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해 삼성과 KIA가 단체 훈련을 시작한 날은 1월 5일이다. 한화는 8일, 넥센은 9일에 각각 첫 훈련을 소집했다. LG도 8일부터 훈련을 시작한 뒤 15일 해외 캠프를 떠났고, 두산은 11일에 출국했다.
김성근 전 한화 감독. 사진제공=한화 이글스
결국 숱한 대립과 시행착오 끝에 거의 모든 구단이 스프링캠프를 1월 15일에 떠나는 문화가 정착됐다. 비활동기간은 1월 말일까지지만, 팀 훈련은 예외적 상황에 한해 1월 15일부터 할 수 있다는 조항이 있어서다. 각 구단은 “한국은 날씨가 추워 제대로 된 훈련을 하기 어렵다”는 점을 이 ‘예외적 상황’으로 자체 적용했다.
# 12월과 1월을 사수하라
대립은 끊이지 않았다. 2013년 12월에는 수도권 구단 한 투수가 동료 선수들과 따뜻한 나라로 재활 훈련을 떠났다가 자신의 SNS에 사진 한 장을 올리면서 다시 문제가 불거졌다. 그 사진 속에 소속팀 코치 두 명의 모습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12월에 코치가 선수 훈련을 지원하면 비활동기간 팀 훈련 금지 규정 위반에 해당한다. 구단은 “11월 말에 찍은 사진을 뒤늦게 올린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그해 말 KBO 실행위원회에서 “12월 1일부터 1월 14일 사이에 구단 차원에서 선수의 훈련을 돕다가 적발되면 벌금 1억 원을 부과한다”고 합의해 벌칙 규정을 강화했다. 또 예외 규정을 악용하는 사례를 막기 위해 구단 트레이너를 동반한 해외 재활 캠프까지 모두 금지했다.
1년 뒤인 2014년 12월에도 다시 한 번 소란스러워졌다. 한화에 김성근 감독이 부임한 시기다. 김 감독은 평소 스타일대로 선수들의 훈련량을 대폭 늘려 팀 체질을 개선하려고 했다. 1군 선수가 대거 포함된 대규모 선수단을 이끌고 11월 일본 마무리캠프를 떠났고, 12월까지 캠프를 연장하려고 시도했다.
선수들이 반발했고, 선수협도 들고 일어났다. 김 감독과 박충식 당시 선수협 사무총장이 수차례 통화를 나눈 끝에 한화는 12월 훈련 강행을 포기했다. 11월을 꽉 채운 11월 30일 캠프를 마치고 귀국했다. 박 총장은 당시 “선수협이 신고 선수, 재활 선수, 최저연봉 선수들의 훈련까지 막고 있는 게 아니다. 재활훈련이 필요한 선수는 자율적으로 운동할 수 있도록 야구 규약에 명시도 돼 있다”며 “다만 한화가 아프지도 않은 선수, 1년간 풀타임을 뛰었던 선수들에게까지 강압적으로 운동을 시키는 부분을 막아야 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열린 선수협 총회에서는 비활동기간 단체훈련 적발 시 징계 수위를 크게 높이고, 재활 선수도 합동 훈련 금지 조건에 포함시켰다. 멀쩡한 선수들을 재활 선수로 분류해 훈련을 이어 나가려는 꼼수에 제동을 걸었다. 한발 더 나아가 2016년 말부터는 아예 스프링캠프를 2월에 시작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캠프 시작은 예외 없이 2월 1일로 하고, 12월에는 아예 야구장을 출입하지 못하게 했다. 1월에도 코치나 트레이너 개입 없이 철저한 ‘개인 훈련’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만약 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구단이 나오면, 각 구단 초상권 수입에서 벌금을 제하기로 했다.
사진제공 = 두산 베어스
일리 있는 방침이다. 선수들은 1년 내내 벅찬 일정을 소화한다. 밤낮이 바뀐 생활 패턴에다 한 시즌 절반에 달하는 원정경기 이동도 감수한다. 12월 한 달간 재충전은 필수다. 남편, 아버지, 아들, 애인으로서 개인적인 생활도 누릴 필요가 있다. 게다가 자율을 가장한 합동훈련은 그 누구보다 코치들도 원하지 않는다. 선수들은 ‘쉴 권리’를 하소연할 선수협이라도 있지만 코치는 목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구단이나 감독의 지시에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 저연봉 선수들의 부담과 고충이 문제
물론 부작용도 있다. 연봉을 많이 받는 선수들은 개인 훈련을 충실하게 할 방법이 얼마든지 있다. 해외 따뜻한 나라에서 삼삼오오 개인 캠프를 차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 반대인 선수들은 개인 트레이너를 고용하거나 훈련장을 사용하는 금액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안 그래도 고액 연봉자들에 비해 성적이 떨어지는데, 겨울에 훈련이 모자라면 그 격차가 더 커질 수 있다. 1년 전과 달리 이번 오프시즌에는 12월에도 야구장 시설을 개인적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됐지만, 여전히 최적의 환경은 아니다. 새 시즌이 걱정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KBO 리그 최저 연봉은 2700만 원이다. 1군에서 뛰는 선수는 최소 5000만 원까지 받을 수 있지만, 이 역시 큰돈은 아니다. 저 연봉 선수들 입장에선 월급도 나오지 않는 12월과 1월에 항공료, 숙박료, 현지 체류 비용 등을 투자해 해외 훈련을 떠나기 쉽지 않다. 특히 올해는 8월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기간 동안 시즌이 중단되는 탓에 개막일이 3월 24일로 당겨졌다. 캠프 기간이 역대 가장 짧고, 그만큼 시즌을 준비할 시간이 줄었다. 한 현직 감독은 “훈련 프로그램을 짜는 데 고민이 크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아직 주전으로 자리를 잡지 못한 선수들은 “차라리 스프링캠프를 빨리 떠나는 편이 낫다”고 털어 놓기 일쑤다. 구단들 역시 전력 양극화와 오버페이스를 걱정하고 있다.
김인식 전 국가대표 감독은 이에 대해 “구단들이 저 연봉 선수에 대한 지원과 관심을 늘릴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스프링캠프 기간이 보름가량 줄어 구단 입장에선 많은 경비를 절약할 수 있게 됐다. 대신 그 돈으로 저 연봉 선수의 훈련 지원을 늘렸으면 좋겠다”는 얘기다. 또 다른 야구 관계자 역시 “구단이든 선수협이든, 5000만 원 이하 연봉 선수에 한해 훈련비용을 일정 정도 지원하는 시스템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내놨다.
선수가 한 명이라도 더 효율적인 훈련을 할 수 있다면, 결국 구단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김 전 감독은 “훈련할 곳이 마땅치 않은 저연봉 선수들은 홀로 훈련하다가 다칠 수도 있다. 구단 트레이너가 구장에 나와 돕는다면 훈련의 효율도 높일 수 있지 않겠는가”라며 “팀도 선수들이 몸을 잘 만든다면 팀 전력이 강화되고, 한국 야구의 발전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역설했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
‘2월 캠프’ 개시로 달라진 풍경…‘연봉 밀당’ 예전보다 느긋 KBO 리그 10개 구단은 지난해 스프링캠프를 앞두고 걱정이 많았다. 2월 1일부터 캠프를 시작하는 첫해라서다. 2016년까지는 1월 15일부터 단체 훈련을 재개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2017년부터는 연봉 지급이 시작되는 2월 1일 전까지는 캠프를 치르지 못하게 됐다. KBO 규약에 명시되고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가 결의한 ‘비활동기간 준수’ 조항이 이런 변화를 불렀다. 메이저리그와 일본 프로야구는 오래전부터 2월에 스프링캠프를 개시했다. 특히 메이저리그의 경우 야수가 합류하는 훈련은 2월 중순을 넘어야 시작한다. 그러나 KBO 리그는 캠프 시작일이 1월 초에서 15일로 밀린 지도 몇 년 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2월에 시작하는 스프링캠프는 단순히 날짜가 늦춰진 것 이상의 변화를 체감하게 했다. 실제로 스프링캠프에 도착한 뒤 “예전보다 캠프 준비를 미흡하게 해왔다”는 평가를 받은 선수도 적지 않았다. 아무래도 개인 훈련은 단체 훈련보다 집중도가 떨어진다. 1월 개인 훈련에 익숙하지 않은 선수들에게도 적응 기간이 필요했다. 가장 많이 바뀐 건 연봉 협상 테이블의 풍경이다. 새해가 시작된 뒤에도 주축 선수들의 연봉 계약 소식을 전하지 않은 구단들이 많아졌다. 특히 간판선수들의 연봉 계약 소식이 유독 더디게 들린다. FA(프리에이전트) 계약에 집중하느라 아예 연봉 협상을 늦게 시작한 구단도 많다. 선수들 역시 벌써 ‘새해의 연봉협상’에 익숙해지고 있다. 느긋하게 구단과 만날 날을 기다린다. 예년 같았다면 스프링캠프 출발일이 임박하면서 구단과 선수들이 모두 서둘러 합의점을 찾느라 바쁠 시기다. 이제는 서두를 필요가 없다. 한 구단 관계자는 “아무래도 캠프 시작일이 늦춰지니 구단도 선수들도 재촉하지 않는 모양새다. 심적으로 많이 여유가 생겼다”고 귀띔했다. 그동안 ‘캠프 시작일’은 연봉 협상의 심리적 마지노선이었다. 야구 잘하는 선수들은 “이 정도 금액을 받아들여야 한다면 캠프를 가지 않겠다”고 구단을 압박했고, 입장이 반대인 선수들에게는 구단이 “도장을 찍을 때까지 스프링캠프에 데려가지 않겠다”는 카드를 내밀었다. 무엇보다 출국 전까지 연봉 계약서에 사인을 마쳐야 선수와 구단 모두 홀가분한 마음으로 새 시즌 준비를 할 수 있다. 캠프지에서까지 협상 테이블을 차려 줄다리기를 계속하다 보면 서로 자존심 싸움만 길어지고 감정의 골도 깊어진다. 그동안 양측이 부랴부랴 출발 전에 계약을 끝내려 했던 이유다. 하지만 캠프 출발일이 15일가량 미뤄지면서 연봉 협상에 주어진 시간도 그만큼 늘어났다. 구단과 선수가 원하는 금액 차가 큰 케이스라면 더 서두를 필요가 없다. 또 다른 구단 관계자는 “이제 굵직굵직한 선수들이 서서히 개인 일정을 끝내고 본격적인 캠프 준비에 돌입할 시기”라며 “1월이 되면서 야구장에 찾아오는 선수들이 늘었다. 연봉 계약도 빠른 속도로 마무리될 것 같다”고 했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