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7일 장준환 감독의 영화 ‘1987’을 봤다. 그 다음날인 8일, 이 영화는 개봉하고 처음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다. 대통령이 본 영화라는 사실이 만들어낸 화제가 결정적으로 작용했음이 분명해 보인다.
문재인 대통령뿐 아니라 앞선 대통령들도 재임 기간 종종 극장을 찾고, 영화를 봤다. 각각의 영화 선택에는 나름의 이유, 숨은 메시지가 있다. 일종의 ‘영화 정치’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가 배우 김윤석과 함께 ‘1987’을 보며 눈시울을 적시고 있다. 사진=청와대사진기자단
# 문재인 대통령…연이어 민주화운동 영화 선택
문재인 대통령은 ‘1987’을 관람한 뒤 상당히 긴 내용의 감상평을 내놨다. 영화를 본 7일 기준으로 본다면 아직 누적관객이 400만 명에 불과한데도 “1000만 관객을 넘기겠다는 확실한 예감이 든다”고 치켜세웠다. 그러면서 “재미와 감동, 메시지 어느 하나만 이뤄도 참으로 대단한 영화이지만 이들 3가지를 모두 겸비한 정말 대단한 작품”이라고도 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이후 지금까지 총 세 편의 영화를 봤다. 첫 번째 영화가 지난해 8월 개봉한 송강호 주연의 ‘택시운전사’다. 1980년 5월 우연히 광주로 간 평범한 택시운전사의 눈에 비친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영화는 문재인 대통령의 관람 등 효과로 뒷심을 발휘해 10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이번 ‘1987’ 역시 민주화운동 소재다. 1987년 일어난 고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에서 시작해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숨죽이지 않고 민주화를 위해 목소리를 내면서 마침내 이뤄내는 6월 항쟁의 과정을 담은 실화 소재다. ‘택시운전사’에 이어 다시 한 번 지금 ‘우리’를 있게 한 민주화운동 영화들에 시선을 둔 문재인 대통령의 선택에서 현 정권의 지향이 엿보인다는 해석이 따른다. 이른바 적폐청산 등 과거 잘못된 일들을 바로잡는 과정에서 민주화운동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져야 한다는 입장을 우회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분석도 가능하다.
대통령의 ‘영화정치’는 사실 굳이 부연 설명도 필요가 없다. 선택 자체가 곧 메시지로 통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10월 문재인 대통령은 부산국제영화제를 직접 찾았다. 앞선 정권에서 부산국제영화제 외압논란이 촉발되면서 정치적 탄압을 받았다는 사실이 밝혀진 상황에서 ‘독립성 확보’에 힘을 실어주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담긴 방문이다.
당시 대통령은 공효진·엄지원 주연의 영화 ‘미씽:사라진 여자’를 봤다. 영화는 조선족 베이비시터가 아이를 데리고 사라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우리 사회 여성이 겪는 문제와 갈등을 담아내 호평 받은 작품으로, 여성 문제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현안을 해결하겠다는 대통령의 의지가 담긴 선택으로 풀이됐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7일 서울 용산 CGV에서 열린 영화 ‘1987’ 시사회에 참석했다. 문 대통령은 영화 관람 후관객들과 대화를 나눴다. 왼쪽은 극 중 이한열 열사를 연기한 배우 강동원. 사진=청와대사진기자단
# 박근혜, 이명박 전직 대통령의 ‘취향’
역대 대통령들은 저마다 다른 입장에서 ‘영화정치’를 펼쳤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 이명박 전 대통령의 지향은 평소 이들의 정치 방향과도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주로 어려운 고비를 극복한 역사 기반의 영화들을 택했다. 이순신 장군의 극적인 활약을 담은 ‘명량’부터 ‘국제시장’과 ‘인천상륙작전’ 등이다. 이들 영화는 전부 흥행에 성공하긴 했어도 일부에서는 지나치게 애국주의를 강요한다는 비판적인 시선을 받은 바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특히 ‘국제시장’에 각별한 애정을 보였다. 한국전쟁 당시 흥남철수로 부산에 정착한 실향민이 굵직한 한국 현대사를 몸소 겪는 이야기다. 영화에는 1970년대를 관통하는 주인공 부부가 다투다가 갑자기 흘러나오는 애국가에 맞춰 국기를 향해 경례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를 두고 박 전 대통령은 “즐거우나 괴로우나 나라를 사랑해야 한다”고 말해, 애국심 호소 등 과도한 국가주의를 지나치게 옹호한다는 비판에도 직면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역경을 딛고 일어서는 이야기 같은 성공 신화에 유독 관심을 뒀다. 당선인 시절 아테네 올림픽 여자핸드볼 대표팀 실화를 다룬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을 관람했다.
재임 시절에는 다큐멘터리 ‘워낭소리’를 봤다. 산골에서 나이든 소와 함께 농사를 짓고 살아가는 노부부의 이야기로, 관객의 마음을 위로하며 300만 명을 동원한 흥행작이다. 이 전 대통령은 주인공 할아버지가 홀로 농사를 지어 9명의 자식을 공부시키고 키운 사실을 주로 언급했다. 굳은 의지와 노력을 높이 평가하며 “우리나라가 발전할 수 있던 원동력이 그런 게 아니었겠느냐”며 “교육을 통해 가난의 대물림을 끊으려 했던 것이 우리의 저력이 됐고 외국인도 이에 놀라고 있다”고 강조했다.
취임 1년도 되지 않아 극장에서 3편의 영화를 본 문재인 대통령만큼이나 고 노무현 전 대통령도 영화를 즐겼다. 최고 권력자를 풍자하는 영화까지도 가리지 않았다. 노 전 대통령은 왕을 비판하고 풍자하는 사극영화 ‘왕의 남자’를 비롯해 봉준호 감독의 ‘괴물’과 이창동 감독의 ‘밀양’ 등 다양한 소재와 장르를 섭렵했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화려한 휴가’도 극장에서 봤다.
지금은 익숙한 대통령의 ‘영화정치’가 본격 시작된 때는 문민정부가 들어선 고 김영삼 전 대통령 때부터다. 1993년 청와대 춘추관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을 위한 ‘서편제’ 상영회가 열린 게 그 출발이다.
이해리 스포츠동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