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각한 내부 분위기와는 달리 바깥의 사람들은 그리 부산 떨 일이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안일했던 국내 경영진들의 태도가 이 같은 결과를 낳았으니 반면교사로 삼자는 이야기도 나온다. 이런 사례를 중국 투자를 받은 모든 업체에 동일하게 적용시켜 사서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도 지적했다. 지난해 말부터 불거져 나온 ‘판타지오 사태’를 둘러싼 엔터테인먼트 업계 관계자들의 분석이다.
지난해 12월 28일 나병준 판타지오 대표이사가 경영상 적자를 이유로 전격 해임됐다. 사진은 판타지오 소속 연예인들로 판타지오 홈페이지 캡처.
지난해 12월 28일 열린 판타지오 이사회에서 중국계 대주주 JC그룹이 나병준 판타지오 대표이사를 경영상 적자를 이유로 해임했다. 나 전 대표는 판타지오의 창업주이기도 하다. 그가 전격 해임됨에 따라 판타지오는 나 전 대표와 중국 워이지에 대표이사의 공동 대표 체제에서 중국 측 단독 대표이사 체제로 변경됐다. 이는 엔터업계에서 중국계 대주주가 한국 창업주를 해임하고 경영 일선에 나선 첫 사례다.
JC그룹은 2013년 이후 꾸준히 내리막길을 걷고 있던 판타지오에게 내려온 동아줄 같은 기회였다. 2016년 12월, JC그룹의 한국 계열사인 골드파이낸스코리아는 판타지오의 지분 27.56%를 300억 원에 인수해 판타지오 최대 주주 자리를 거머쥐었다.
당시 골드파이낸스코리아는 “판타지오의 경영은 대체 불가능한 이 분야 최고 전문가인 나병준 대표에게 일임하고, 우리는 투자와 중국영업을 지원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리고 이듬해 7월, JC그룹은 제3자 배정 유상증자 방식으로 320억 원의 자본을 추가로 투입했다.
그동안 산적해 있던 적자로 회사 내 자금이 고갈된 상황이었던 판타지오의 운영자금 확보를 목적으로 한 유증이었다. 이로써 골드파이낸스코리아(JC그룹)가 가진 판타지오의 자본은 50.07%로 급증했다. 그리고 결국 판타지오의 경영권이 중국 측으로 넘어가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JC그룹의 투자가 이뤄진 후에도 판타지오 측의 적자가 지속됐다는 점이 이번 인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졌다.
2000년대 중후반부터 중국은 한국 엔터업계에 공격적으로 투자해 왔다. 단순한 투자에 따른 수익 창출을 넘어서 경영 전반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지분 확보에 주력했다. 작게는 소속 연예인들의 해외 진출 방향을 결정하는 일에서부터 크게는 국내외 경영 그 자체에 중국이 직접 관여할 수 있도록 세를 넓혀나가기 위함이었다. 이미 다수의 굵직굵직한 국내 엔터사들이 중국 측에 경영권을 넘기고 중국 엔터사의 자회사처럼 운영되고 있는 실정이다.
심엔터테인먼트는 중국 최대 엔터테인먼트기업 화이브라더스에 인수돼 사명을 ‘화이브라더스코리아’로 개명했다. 사진은 화이브라더스코리아 홈페이지 캡처.
지난해 배우 김윤석, 주원 등 국민들의 많은 사랑을 받은 배우들이 포진됐던 심엔터테인먼트가 중국 최대 엔터테인먼트 기업인 화이브라더스에 인수됐다. 심엔터테인먼트는 2015년 배우 매니지먼트 최초로 코스닥 시장에 직상장했던 회사다. 화이러헝유한공사(화이브라더스의 투자 사업 부문 자회사)는 심엔터테인먼트의 지분 29.61%를 약 120억 원에 확보해 최대주주로 올라섰다. 그 직후 심엔터테인먼트의 심정운 대표 외에 글로벌 컨설팅기업 ‘이퀄리브리엄 파트너스’의 지승범 대표가 새로 선임돼 공동 대표 자리에 올랐다. 심 대표는 전반적인 경영 대신 국내 엔터테인먼트와 드라마 제작, 화장품 유통 사업 등을 맡고 있다.
중견 이상의 엔터사들은 이처럼 중국의 입김으로 경영진이 교체되거나 기존 경영진의 세가 줄어드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이들은 ‘차이나 머니’의 유혹 속에도 지분을 넘기는 것에 다소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다. 지분을 넘기더라도 최대주주가 변경되지 않도록 국내 경영진들이 사비를 털어 주식을 매입, 최대 비율을 유지하는 식이다.
한 중소 엔터테인먼트사 관계자는 “3~4년 전 한참 중국이 국내 엔터테인먼트 사업에 공격적으로 투자할 때 우리 쪽에도 몇 번 언질이 들어왔었다. 거액을 투자하면서도 현 경영진의 경영권은 보장해 주겠다고도 했다”라며 “‘급전’이 필요한 중소회사에겐 달콤한 유혹이었지만 결국 거절했다. 지분을 야금야금 늘려가는 중국이 경영권에 손대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미 중견 이상의 엔터사들은 중국 자본이 들어오더라도 경영권 확보를 위해 최대 주주 자리를 방어해 왔다. JYP엔터의 박진영 이사(16.27% 보유), 키이스트의 최대 주주인 배우 배용준(25.24% 보유), FNC엔터의 한성호 대표(22.76% 보유) 등의 사례다.
키이스트의 2대 주주는 중국 대형 포털사이트인 소후닷컴의 자회사인 ‘폭스비디오(6.23% 보유)’다. 쑤닝유니버셜미디어도 336억 9000만 원 상당을 투자해 FNC의 2대 주주(11.37% 보유) 자리에 올랐다. 2016년에는 중국 대형 IT그룹 텐센트가 YG엔터테인먼트에 약 943억 원을 투자해 YG 지분의 4.5%를 확보했다. 텐센트는 현재 YG의 3대 주주다.
같은 해 중국 최대 전자상거래업체인 알리바바도 약 328억 1600만 원을 투입해 SM그룹의 지분 4%를 인수했다. 이처럼 중국이 거액의 투자로 지분을 늘려가고는 있지만 1대 주주를 차지한 국내 경영진의 방어는 만만치 않다. 투자, 합작 등으로 중국과의 사업 분야를 넓혀가면서도 경영권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또 다른 엔터업계 관계자는 “지분이 완전히 넘어가는 순간 국내 경영진의 입지는 완벽하게 좁아질 수밖에 없다. 이전에는 교체되는 기존 국내 경영진에게 국내 사업부를 맡기기도 했지만 현재는 중국이 한국 내에서의 사업까지 영향력을 확장하고 있는 상황이라 까딱 잘못하면 국내 경영진은 결국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중국 자본의 국내 엔터테인먼트 잠식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지만 별 다른 제재 방안이 없는 이상 엔터사 경영진들이 스스로 경영권 방어에 나서야 할 수밖에 없다. 이번 판타지오 사태는 눈앞에 보이는 투자금에 혹한 안일했던 경영 마인드가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지 여실히 보여준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한편, 판타지오는 나병준 전 대표 해임 직후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JC그룹과 전면전을 선포해 눈길을 끌었다. 비대위 측은 JC그룹에 “나병준 대표의 해임을 철회하고 중국계 대주주의 판타지오에 대한 비정상적인 경영 개입을 중단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다. JC그룹은 나 전 대표 해임 이후 판타지오 소속 직원들의 법인 카드를 해지하는 등 전방위 압박에 나서고 있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