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신문>이 만난 세터 출신 김사니 SBS해설위원은 여자배구 사상 최초의 영구 결번의 주인공이다. 남다른 승부욕과 철저한 자기 관리로 여자 배구 최초 1만 세트 출전 기록을 달성했고 18년 동안 여자배구의 버팀목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1999년 한국도로공사에 입단 후 2007년 FA 신분을 얻어 KGC인삼공사의 전신인 KT&G 아리엘즈로 팀을 옮겼고 2010년 흥국생명으로 이적했다. 2012-2013시즌에는 아제르바이잔의 로코모티브 바쿠로로 진출, 새로운 도전에 나섰고 2014년 IBK기업은행으로 둥지를 옮긴 후엔 챔피언결정전 우승 3회, 챔프전 MVP 1회를 기록했으며 2016-2017시즌을 마치고 은퇴를 선언했다. 이도희를 잇는 여자배구 최고의 세터로 손꼽히는 김사니를 만나본다.
여자배구 사상 최초 영구결번의 주인공인 김사니는 이도희를 잇는 최고의 세터로 꼽힌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배구를 처음 시작할 때부터 세터였나.
“아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배구를 처음 시작했는데 당시엔 키가 너무 작아서 공격보다는 수비 위주의 선수였다. 6학년이 되니까 감독님이 공격에 소질이 없다며 세터 포지션을 맡기셨다. 당시엔 세터가 정말 싫었다. 나도 공을 때려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세터를 해보니 너무 힘들었다. 어려움을 느낄수록 감독님에 대한 원망도 커지더라.”
―그러면 언제부터 세터란 포지션에 적응이 됐는지 궁금하다.
“어렸을 때는 세터가 팀을 이끌어야 하는 포지션인지 전혀 몰랐다. 상대를 속이고 블로킹을 빼야 하는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단순히 공을 잘 올려주는 포지션이라고 생각했는데 중3 때부터 세터의 역할을 정확히 인지했던 것 같다. 상대의 블로킹이 눈에 들어왔고, 어느 선수의 블로킹이 낮은지도 파악했다. 센터, 레프트, 라이트 선수들마다 타점 높이가 달라 선수들한테 공을 잘 올려주려 노력했다.”
―포지션 변화를 시도했었다고 들었는데.
“고1이 되면서 키가 커졌고 체격도 좋아졌다. 다른 선수들에 비해 성장이 뒤늦게 찾아온 것이다. 신장이 커지면서 포지션을 공격수로 바꾸려 했었다. 감독님도 권유하셨는데 아버지가 크게 반대하시더라. 공격을 하기엔 점프력이 부족해서 실업팀에 가면 선수 생활을 오래할 수 없다고 예상하신 것이다. 아버지가 농구를 하셨는데 그래서인지 딸의 미래를 내다보신 혜안이 있으셨다. 공격에 대한 욕심 때문에 공격형 세터로 자리를 잡아갔다.”
―배구는 세터 놀음이란 말이 있다. 그만큼 경기 운영 능력이 뛰어나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자신을 평가한다면?
“사실 난 세터를 좋아하지 않았다. 사랑하지도 않았다.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건 진심이다. 배구선수로 활약하면서 돈도 벌고 명예도 얻었지만 행복하지 않았다. 세터는 감독 다음으로 예민하고 스트레스 받는 포지션이다. 승부의 세계에 살다보니 승패에 따른 감정 기복이 심했다. 스물네 살이 됐을 때 휴대폰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다. 그 전에는 밤이 되면 반납해야 했다. 그렇게 얻은 휴대폰인데 패한 날은 아예 휴대폰을 켜지도 않았다. 나 때문에 경기에 진 것 같아 자책이 심했다. 이겼을 때 기쁘긴 했지만 행복하지 않았다. 또 다음 경기를 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김사니가 세터로 대성한 데는 딸의 미래를 내다본 아버지의 혜안도 한몫했다고 한다. 임준선 기자
“내가 서른일곱 살에 은퇴했는데 공격수로 뛰었다면 이토록 오랫동안 선수 생활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점프력도 좋지 않고 빠르지 않아서 일찍 은퇴했을지도 모른다. 세터를 했던 게 신의 한수였다.”
―아버지가 밀어붙인 게 도움이 된 셈이다.
“정말 그렇다. 작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칭찬도 많이 해주셨지만 이런저런 잔소리도 많이 하셨다. 20대 초반에는 아버지한테 투정 많이 부렸다. 투정 부릴 때마다 아버지가 하신 말씀이 있다. ‘넌 서울대 입학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걸 하고 있는 것’이라고. 배구선수로 꽃길만 걷지 않았지만 인정받는 선수로 자리매김했던 건 아버지의 응원과 격려 때문이었다.”
―선수 생활하는 동안 이숙자(KBSN스포츠 해설위원), 이효희(도로공사) 등과 줄곧 비교를 당했다.
“난 누구를 이기고 넘어서야 한다는 생각보다 내 자신을 이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도 많았지만 내 자신을 컨트롤해야 그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욕심이 많은 선수였다. 완벽주의자란 얘기도 들었다. 세터지만 수비도, 서브도 잘해야 했다. 나를 채우기에 바빠 다른 선수와 비교되는 부분은 관심 밖의 일이었다.”
―그렇다면 세터 김사니가 최고로 꼽는 세터가 누군지 알고 싶다.
“여자배구 최고의 세터로 이도희 감독님을 꼽지만 그분이 선수로 활약했던 모습을 직접 보지 못해서 언급하기 어렵다. 내가 봤던 선수들 중 최고의 세터는 (강)혜미 언니였다. 그 언니가 대표팀에서 메인으로 뛸 때 난 후보 선수였다. 나랑 스타일이 달랐지만 언니한테 배운 게 정말 많았다. 혜미 언니는 스핀이 들어간 어려운 공을 잘 토스했다. 그런 점을 면밀히 관찰하면서 배웠다.”
―자신의 배구인생을 어떻게 정리할 수 있겠나.
“FA 계약 기간인 3년마다 변화를 이룬 것 같다. 도로공사에서 첫 FA를 맞이했는데 구단이 나랑 계약하지 않겠다고 하더라. 구단과 미팅을 마치고 나오면서 각오를 다졌다. 다음 FA 때는 이런 대우받지 않도록 더 열심히 해야 되겠다고. 인삼공사 입단 후에는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고 내 길만 가려 했다. 화가 나도, 스트레스를 받아도 내색하지 않았다. 흥국생명으로 팀을 옮긴 후에도 선수들과 잘 지냈다. 내가 가진 장점 중 자랑할 수 있는 게 빠른 적응력이다. 여러 팀을 경험하면서 생긴 장점이다.”
김사니는 자신의 전성기로 선수생활 막판 최고의 공격수들 만났던 IBK기업은행 시절을 꼽았다. 임준선 기자
―아제르바이잔에서 배구 생활을 이어갔다. 소원했던 해외 진출이었는데 실제 생활은 어떠했나.
“부상으로 제대로 뛰지도 못했다. 감독님이 나를 주전 선수로 데려간 건데 연습에도 참여하지 못하고 재활만 하고 있으니 어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몸은 몸대로 힘들고 향수병도 생기고, 뭔가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이 생기더라. 어느 순간부터는 한국으로 돌아갈 날만 꼽았다. 그런 점에선 (김)연경이가 대단하다. 유럽 선수들의 피지컬은 엄청나다. 기본기도 잘돼 있는 터라 거기서 살아남기가 쉽지 않다. 그런 점에서 연경이는 진정한 ‘난 놈’이다(웃음).”
―텃세도 있었을 텐데.
“당연히 있었다. 동양인이라고 무시하면 난 한국말로 욕을 해줬다. 처음에 무시하던 애들도 실제 배구 실력을 확인하고선 더 이상 텃세를 부리지 않더라. 1+1년 계약을 맺고 간 건데 IBK기업은행에서 연락이 와 1년 만에 복귀 선언을 했다.”
―세터는 공격수들에게 공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공격수와의 호흡을 중요시한다고 들었다. 모두가 공을 기다릴 때 모두에게 공을 줄 수 없는 것도 현실이다. 종종 공격수들이 자신에게 공을 주지 않는다고 서운해 할 때도 있다고 하던데 사실인가.
“그런 선수들도 있다. 나 같은 경우엔 공을 많이 주지 못한 선수한테는 경기 후 꼭 문자를 했다. 미안하다고. 내가 이런 이유로 공을 토스하지 못했다고 설명해준다. 그런 대화 속에 공격수들의 오해가 풀리고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팀워크를 위해선 그런 배려도 중요하다.”
―세터 김사니의 전성기는 언제였다고 말할 수 있겠나.
“아무래도 IBK기업은행 있을 때가 챔프전 우승도 많이 하고 개인 MVP도 수상하는 등 좋은 일들이 많았던 것 같다. 원래 난 공격수 복이 없는 세터였다. 그러다 선수 생활 막판에 최고의 공격수들이 있는 기업은행과 인연을 맺었고 다양한 아이템을 사용할 수 있는 공격수들을 만났다.”
해설위원으로 제2의 인생을 일구는 김사니. 일 마치고 맛집 찾아다니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임준선 기자
“대표팀에서는 당연히 (김)연경이었다. 연경이는 준비가 철저한 선수다. 항상 노력하고 분석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연경이한테 ‘넌 노력 같은 거 안 해도 된다’고 우스갯소리를 한 적이 있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기대치에 부응하려고 쉼 없이 달린다. 무엇보다 외국에서 선수 생활을 하면서 애국심과 자존심은 최고다. 내가 유일하게 존경하는 선수이기도 하다. IBK기업은행에서 만난 김희진과 박정아(도로공사)도 실력이 뛰어난 공격수였다. 김희진은 어떤 토스를 올려줘도 잘 때린다. 속공수이면서 윙도 백어택에도 능하다. 피지컬이 좋아 많은 아이템을 사용할 수 있는 선수였다. 내가 이런저런 주문을 많이 한 편이다. 박정아는 감싸주고 싶은 후배였다. 박정아에게 많은 기회를 주지 못해 항상 미안했다. 김희진과 박정아 때문에 재미있게 배구할 수 있었다.”
―은퇴는 언제부터 준비한 건가.
“2년 전부터였다. 부상 등으로 체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걸 절감하고 마음속으로 은퇴시기를 꼽고 있었다. 지난 시즌 챔피언결정전까지 마치고 은퇴 결심을 굳혔는데 당시 종아리부터 허리와 허벅지 근육이 파열되는 등 만신창이의 몸 상태가 됐다. 이정철 감독님이 코치직을 제안하셨지만 다시 단체 생활을 할 엄두가 나지 않아 정중히 거절했다. 평생 운동복만 입고 살았는데 나이 더 들기 전에 예쁜 옷도 입고 화장도 하고 싶었다. 마침 방송국에서 해설위원직을 제안해주셔서 덥석 받아들였다.”
―해설위원은 잘 맞는 옷 같나.
“승부와 상관없이 배구장을 찾는 즐거움을 만끽하는 중이다. 선수 때는 경기 후 씻고 자기 바빴는데 지금은 해설 마치고 맛집 찾아다니며 먹는 재미를 맛본다.”
김사니는 아제르바이잔 생활을 정리하고 IBK기업은행 복귀 후 챔피언결정전 우승했을 때를 배구인생 최고의 순간으로 꼽았다. 당시 무릎 부상으로 걷는 것도 힘들었는데 진통제 서너 알씩 먹고 부상 투혼을 벌이며 MVP까지 받게 돼 수상 후 폭풍 눈물을 흘렸다고. 한물갔다는 배구계의 평가, 우승 이력이 없는 불운의 아이콘이 IBK에서 한꺼번에 행운을 맞이한 것이다. 그는 “세터 김사니로 거듭났던 시즌이었다. 세터 김사니가 제대로 인정받았던 시즌이기도 했다”면서 자신에게 은퇴식을 마련해주고 영구 결번까지 해준 IBK기업은행과 이정철 감독에게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
김사니가 꼽은 최고의 후배 “키에 탄력에 끼까지 갖춘 다영이” 레전드로 불리는 세터계의 전설, 김사니. 그는 현재 활약 중인 세터들 중 어떤 선수를 최고의 세터로 꼽을까. 김사니는 가장 먼저 현대건설 이다영을 지목했다. 김사니는 현역 세터 중 최고의 선수로 현대건설 이다영을 가장 먼저 지목했다. 연합뉴스 2014년 신인드래프트 1라운드 2순위로 현대건설의 유니폼을 입은 이다영. 쌍둥이 언니 이재영(흥국생명)과 함께 여자배구의 미래를 이끌 인재로 평가받는 그는 세터지만 블로킹 능력과 기습적인 공격도 가능하다. 이다영의 어머니는 1988년 서울올림픽 여자배구대표팀 세터를 맡았던 김경희 씨. “이다영 다음에는 흥국생명 조송화도 눈에 띄는 세터다. 송화는 속공 토스에 대한 능력이 뛰어나다.” 2011-2012시즌 1라운드 4순위로 흥국생명 유니폼을 입은 조송화는 김사니가 흥국생명에 있다가 팀을 떠난 이후 김사니의 자리를 물려받았다. 그의 롤모델이 김사니라고. 조송화는 2년 전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부담을 털어 놓은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사니 언니의 공백이 엄청 크게 느껴졌다. 내가 뭘 해도 사니 언니랑 비교될 수밖에 없었다. 지난해 외국인 선수로 인해 마음고생도 많았다. 모든 원인을 내게로 돌리는 바람에 크고 작은 상처가 있었다. 올해는 뭘 해도 마음이 편하다. 욕을 먹어도 조금 뻔뻔해지도록 노력했다. 나이 어린 세터이지만, 모든 선수들이 내 사인을 믿고 따라줄 때 짜릿한 희열도 느낀다. 무엇보다 감독님으로부터 신뢰받고 있다는 생각에 책임감이 더욱 커졌다.” 김사니는 또한 IBK기업은행의 이고은도 수비 능력이 뛰어나고 순발력이 좋다면서 관심 있게 지켜봐달라고 부탁했다. [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