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돌은 지난 10일 중국 윈난성 바오산에서 벌어진 제5회 동준약업배 세계바둑명인전 결승에서 중국의 롄샤오 9단을 상대로 흑 불계승을 거두며 정상에 올랐다. 이 대결에서도 이세돌은 초반 착각을 범하며 좌상귀가 잡히는 등 시종일관 고전을 면치 못했다. 하지만 낙승을 예상한 듯 방심한 렌샤오 9단의 거대한 중앙 백대마를 포획하며 믿기지 않는 대역전승을 거뒀다. 전날 일본의 일인자 이야마 유타 9단을 꺾었던 이세돌은 이로써 2연승으로 대회 첫 정상고지를 밟았다.
그리고 13일 제주로 돌아온 이세돌은 제주 해비치호텔&리조트에서 열린 2018 해비치 이세돌 vs 커제 대결에서 293수까지 가는 접전 끝에 흑1집반승을 거두고 불과 3일 동안 2개 대회 연속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우승상금만 1억 1200만 원(세계명인전 8200만 원, 해비치배 3000만 원)에 해비치배 우승자에게 주어지는 현대 코나 자동차까지 그야말로 짭짤한 한 주를 보냈다. 이 9단의 믿기지 않는 일주일을 따라가봤다.
이세돌 9단(오른쪽)과 커제 9단이 국후 복기를 하고 있다.
#이세돌의 기상천외한 승부수
중국 윈난에서 열린 제5회 세계바둑명인전은 한국과 중국, 일본의 명인전 우승자들이 한데 모여 ‘최강 명인’을 가리는 자리. 하지만 명인전이 중단된 한국은 정상급 기사들이 돌아가며 나가다가 올해는 이세돌 9단이 출전했다.
역토너먼트 방식으로 치러진 이 대회에서 이세돌은 일본 명인 이야마 유타 9단을 꺾고 결승에 올라 역시 이야마를 제압한 중국 롄샤오 9단과 패권을 다퉜다.
이세돌에게 롄샤오는 즐거운 기억이 많은 인물. 그도 그럴 것이 지난 2014년 첫 만남 이래 4전 전승을 거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모두가 롄샤오의 승리를 점치고 있을 무렵 중앙에서 사고가 발생했다. 비세에 몰린 이세돌의 연속된 ‘흔들기’와 롄샤오의 ‘낙관’ 그리고 ‘이세돌 콤플렉스’가 빚어낸 해프닝이었다.
1도
[1도] 초반 우변 전투에서 흑을 든 이 9단의 착각이 나왔다. 그 결과 패가 발생했는데 패의 대가로 좌상 흑▲ 넉점이 백의 수중에 떨어져서는 실리로 따라잡기 어려운 국면. 백은 이제 하변 8점만 살리면 항서를 받아낼 수 있는데 이 백은 도저히 잡힐 돌이 아니다. 그런데….
백1로 좌측 백 넉점을 잡기를 강요했을 때 흑2의 끼움이 기상천외한 수로 초읽기에 몰린 롄샤오의 심기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2도
[2도] 백1은 흑2를 기다려 백3·5로 몬 다음 7로 장문을 씌우겠다는 의도였다. 흑은 자충 때문에 12·14로 제자리걸음을 할 수밖에 없고 백은 17까지 멋지게 싸바르며 연결하는 것, 이것이 롄샤오가 그린 달콤한 그림이었다(16…△).
3도
[3도] 결론부터 말하면 이 백이 거짓말처럼 잡히면서 바둑은 이세돌의 승리로 끝나게 되는데 실전은 백이 8의 곳에 흑 한점을 따낸 것이 패착이 됐다. 사실 흑1이 양단수를 감수한 독수(毒手)처럼 보이지만 백2로 몰았으면 별 게 없었다. 흑은 3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고 거기서 백4·6이었으면 8까지 패가 되는데 이 패는 살자는 팻감이 너무 많아 흑이 안 된다. 실전은 이세돌의 처절한 흔들기에 질린 롄샤오가 스스로 무너지며 우승상금 5200만원을 이세돌에게 헌납한 셈이 됐다.
국후 공개해설장에서 자전해설 중인 이세돌 9단.
#2연속 믿기지 않는 대역전승
윈난에서 돌아온 이세돌은 12일 오전 곧장 제주도로 향했다. 제주도는 제주국제학교에 다니고 있는 딸과 아내가 있는 곳. 이세돌은 제주가 진정한 자신의 홈그라운드라고 말한다.
“하도 많이 져서(커제에게) 이젠 이길 때도 되지 않았나 싶어요. 다행히 커제와 만나기 직전 롄샤오가 석(?)을 살려줬으니 행운이 따라주길 기대합니다. 준비요? 할 수만 있으면 하고 싶은데 특별한 게 있을까요? 새해가 됐으니 새로운 마음으로 두면 좋은 결과가 있겠지요.” 대국 전날의 멘트였다.
커제도 하루 전인 12일 오후 제주공항에 도착했다. 이세돌은 일정을 바꿔 일찍 도착하는 바람에 주최측인 해비치에서 환영식을 준비하지 못했지만 커제는 공항에서 영접을 받았다.
“이 대결을 통해 한국과 중국의 관계가 나아지길 기대합니다”라는 게 커제의 멘트. 이를 전해들은 김성룡 9단은 “역시 커제는 멘트가 좋다. 우리 박정환도 인터뷰를 좀 신경 쓰면 좋겠는데 워낙 그런 쪽에 약하니 아쉽다. 다만 다음 주자인 신진서는 무척 말을 잘한다. 신진서의 멘트는 기대가 된다”고 말한다.
4도
13일 오후 2시 시작된 대결은 초반 이세돌이 주도했지만 우변에서 방향착오를 범하면서 커제에게 분위기가 넘어간다. [4도]가 이세돌이 실기하는 장면. 커제가 백1로 우변 삭감에 나섰을 때 이세돌은 3의 곳에 붙였는데 이것이 실수. 중국 바둑 사이트 QQ에서 실시간으로 해설한 중국의 인공지능 절예(絶藝)는 흑2부터 6까지를 그려 보이며 ‘이것이라면 흑이 계속해서 우세’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런 류의 대결은 한국과 중국의 일인자끼리 맞붙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도 주최측에서 현 국내랭킹 1위 박정환을 제쳐두고 이세돌을 지목한 것은 그의 상품성을 더 높이 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세돌과 커제 둘 모두 알파고와 직접 손을 섞어본 유이한 기사들이다. 그래서 이 대결을 두고 호사가들은 ‘알파고 직전제자들끼리의 대결’이라고도 불렀다.
5도
[5도] 우하 백집이 너무 커서 흑이 도저히 따라잡기 어려운 상황. 이때 등장한 백1에 이세돌의 눈이 번쩍 뜨인다. 받아달라는 것인데 만일 이 수로 A에 두어 흑 일단을 잡아뒀으면 흑은 잠시 후 돌을 거뒀어야 했을 것이다.
6도
[6도] 백1에 A로 받지 않고 흑2로 붙여가자 커제의 볼이 빨개지기 시작한다. 마지막 초읽기에 몰린 커제는 당황한 듯 백3~7로 연속해서 시간을 벌더니 결국 우변을 응수하지 못하고 9로 손을 돌린다. 이 흑은 잡을 수 없다는 뜻. 백15에 흑16이 선수가 되어 18까지 탈출이 가능해져서는 마침내 역전이다. 이세돌 9단이 2개 대회 연속 믿기지 않는 대역전승을 거두며 전성기 못지않은 기력을 보여주는 순간이다.
국후 이세돌과 커제는 나란히 공개해설장에 나타나 대국 소감을 말했다. 이세돌은 “기본적으로 바둑은 인간과 인간이 두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좀 더 바둑의 본질에 가까운 것 같다. 하지만 이미 인공지능은 우리 곁에 있다. 인공지능의 실력이 날로 강해지고 있는데, 커제 9단 같은 훌륭한 기사가 좀 더 기량을 닦아서 인공지능을 이겨주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또 패한 커제는 “이세돌 선배가 종반 정신없이 몰아치는 바람에 혼났다. 분명히 내가 좋다고 생각한 장면에서 이세돌 9단이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했다. 시간이 좀 더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은 있지만 어려운 장면에서도 승리를 가져가는 모습을 보고 더욱 존경하게 됐다”며 서로를 추켜세우는 훈훈한 장면을 연출했다.
둘의 대결을 후원하기 위해 기꺼이 지갑을 연 해비치호텔&리조트 측의 입가에 미소를 짓게 한 명승부였다.
유경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