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수원은 효원의 도시로 알려져 있다. 조선 정조대왕이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해 능을 세우고 지금의 수원을 둘러싸는 성을 쌓았기 때문.
효성이 지극했던 정조는 왕위에 오른 직후 할아버지 영조시대에 정치적 모함으로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를 장조로 추존하고 양주땅에 있던 묘를 수원에 능으로 승격해 모시면서 지금의 신도시 화성을 쌓았다.
본래는 지금 화성군에 속하는 장조의 능(융건릉)이 있는 자리가 화산이라 불린 옛 수원의 중심지다. 지금도 수원성이라는 유적지는 융건릉 근처에 남아있다. 그러나 정조는 1789년부터 8년에 걸쳐 수원성 동쪽에 새로운 성을 쌓음으로써 요즘 식으로 말하면 인공적인 ‘신도시’를 건설했다. 이때 쌓은 성이 바로 화성이며 2백년 동안 신도시 수원의 중심이 됐다.
본래는 해마다 융건릉의 성묘를 위해 행차하면서 이곳에 행궁을 지었고 이를 명목으로 성까지 쌓은 것이지만, 안으로는 당시 정권을 지배하고 있는 수구세력에 맞서 개혁을 이끌어가기 위한 젊은 군왕의 의지의 표현이었다.
화성은 젊은 실학자 다산 정약용 등이 주도해 건축하였으며 성문앞 해자나 암문과 같은 서양식 축성양식이 도입되었다. 실학파의 거두 다산 정약용은 이 성을 쌓는데 처음으로 과학적인 거중기(기중기)를 고안해 활용하였다.
성의 설계도와 건축기록, 공사중 들어간 인건비며 물자의 소용까지 일일이 기록하는 공사보고서까지 상세히 기록으로 남겼는데, 2백 년 전에 만들어진 이 보고서는 <화성성역의궤>란 제목으로 전해져 귀중한 역사 연구자료가 되고 있다.
이 같은 문화적 가치가 인정되어 화성은 유네스코의 문화유산으로 지정받기에 이르렀다.
요컨대 이 성은 탕평책을 통한 정치 개혁을 꿈꾸던 정조와 신진 개혁세력의 보루로서 지어진 것이었다. 정조는 실제로 왕위에서 은퇴한 뒤 이곳에 내려와 살겠다는 계획까지 세웠으나 뜻하지 않은 병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만다.
화성은 현대에 이르러 성곽은 허물어지고 서울의 4대문처럼 성문만 시내 중심에 남아있었으나 90년대 이후 수원의 중심지역이 새로 개발된 영통지구로 옮겨가면서 다시 옛성의 형태를 되찾았다. 팔달문 장안문 등 수원의 옛 중심지로 찾아가면 복원된 성곽을 따라 화성을 한바퀴 돌아볼 수 있다.
한편 수원대학교가 있는 화성군 태안면으로 가면 사도세자능인 융건릉과 이 능의 원찰로 지어진 용주사를 돌아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