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KBO 리그에도 150여 명의 신인이 야심 찬 출사표를 던졌다. 특히 올해는 2008 베이징올림픽 금메달을 목격하고 야구를 시작한 ‘베이징 키즈’들이 본격적으로 첫 발을 내딛는 시즌이다. 야구계의 기대가 크다.
KBO와 각 구단도 그 어느 때보다 철저한 신인 선수 교육에 여념이 없다. 과거 선수들은 술을 먹고 사고에 휘말려도 ‘목격자’만 없으면 그만이었고, 일탈의 범주가 그리 넓지 않았다. 사진이나 댓글로 실수를 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도 존재하지 않는 시대를 살았다. 요즘 선수들은 다르다. 도처에 유혹이 도사리고 있고, 선수들의 일거수일투족이 SNS를 통해 삽시간에 퍼져 나간다. 과거의 실수가 인터넷에 고스란히 남아 10년 후에도 조롱거리로 사용된다. 프로 선수로서 명예와 영광을 한 순간에 잃지 않으려면 매사 돌다리도 두들겨 봐야 하는 시대다. 선수와 운명공동체인 각 구단들도 애지중지 뽑은 신인 선수들이 올바르게 뿌리내리도록 관리하려 애쓰고 있다.
KBO 신인 교육도 마찬가지다. 점점 더 진화하고 있다. 단순히 선수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이 전부가 아니다. KBO 총재와 직접 만날 수 있고, 프로 선수로서 어떤 인터뷰를 해야 하는지 시뮬레이션도 해본다. 은퇴한 레전드와 현역 스타 선수가 눈앞에서 노하우를 전수하고, 때로는 ‘본받지 말아야 할’ 인물의 깊은 후회를 당사자에게 직접 전해 듣기도 한다. 현직 검사에게 승부조작이나 도박뿐 아니라 성범죄에 관련한 교육도 받는다. 그만큼 프로야구 선수에게 필요한 덕목과 소양이 늘어났다는 의미도 된다.
지난 1월 10일 오전 대전컨벤션센터에서 2018 KBO 신인 오리엔테이션이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 신인 교육은 왜 하루로 줄었나
KBO 신인 소양 교육은 1993년부터 시작됐다. 프로야구 대선배들이 프로 및 신인 선수의 자세에 대해 조언하고, 부·차장급 언론인들이 강사로 나서 미디어 인터뷰 관련 교육을 했다. 또 승부조작이 야구계 큰 문제로 대두된 후에는 법조인이나 검사가 강연자로 나서 승부조작·도박·음주·폭력 등을 예방하기 위한 교육을 진행했다. 반 도핑과 스포츠토토, 재테크와 관련한 교육도 병행했다.
처음에는 1박 2일 일정으로 진행되는 단체 오리엔테이션 형식이었다. 첫 날 일정을 마친 뒤 저녁식사 자리를 통해 선수들끼리 친목을 다졌다. 다음 날 오전 일정을 마무리하고 각자 팀으로 이동하는 스케줄이었다. 그러나 2013년 신인 교육부터는 하루 안에 모든 일정을 소화한 뒤 귀가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2012년 교육장에서 벌어진 불미스러운 사고 탓이다. 그해 1월 9일과 10일 충남 예산의 한 리조트에서 열린 오리엔테이션 도중 두산 입단 예정이던 신인 외야수 A가 복도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사망했다.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혈기왕성한 젊은 선수들이 모인 탓에 오전 3시까지 술자리가 이어진 게 화근이었다. 사망한 A 선수는 숙소 건물 6층에서 동료들과 함께 있다 3층 자신의 방으로 내려가던 길에 계단 사이로 추락했다. 계단에 안전 막은 설치돼 있었지만, 운동선수의 몸이 넘어갈 수 있을 만큼 틈이 벌어진 상태였다. 새벽 시간인 데다 순식간에 벌어진 사고라 누구도 막지 못했다.
A 선수는 두산에 신인 2차 지명 3라운드에서 뽑힌 대졸 유망주 외야수였다. 야수들 가운데는 지명 순번이 가장 높았다. 이제 막 프로선수로서 발을 내딛으려는 참에 예기치 못한 비운과 맞닥뜨렸다. 유가족의 침통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깊었다. A 선수와 절친한 사이인 한 지방 구단 외야수는 사고 몇 년 뒤 “지금은 내가 아직 1군에서도 완전히 자리를 잡지 못해 말할 단계가 아니지만, 언젠가 골든글러브를 타게 되는 날이 온다면 수상 소감에서 꼭 그 친구 얘기를 하고 이름을 부르고 싶다”고 눈가를 붉히기도 했다.
KBO는 그 사고 이후 신인 교육 일정을 조정하기로 했다. KBO 한 관계자는 “아무래도 1박 2일 일정으로는 선수들을 통제하기 쉽지 않다고 판단해 일정을 바꿨다”며 “프로그램을 최소화하되 집중도를 높이고, 대신 행사가 끝난 뒤 선수들이 사고 없이 안전하게 귀가하는 데 우선순위를 뒀다”고 설명했다.
# 안티 롤 모델의 강의가 남긴 여운
이후 신인 교육은 ‘양보다 질’에 초점을 맞췄다. 강사 섭외와 프로그램 구성에 더 공을 들였다. 지난해에는 KBO 신인 교육 역사에서 가장 상징적인 장면도 펼쳐졌다. 최초로 ‘롤 모델’이 아닌 ‘안티 롤 모델’이 강사로 단상에 섰다. 한 순간의 실수로 KBO 리그에서 영원히 뛸 수 없게 된 전 LG 투수 박현준이다.
박현준은 2011년 경기 도중 고의로 볼넷을 내주는 방식으로 승부조작에 가담한 사실이 적발돼 KBO에서 영구 실격 제재를 받았다. 2011년 13승을 올리며 LG의 차세대 에이스로 우뚝 섰던 선수가 검은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 탓에 이듬해 가장 어두운 곳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는 이후 야구를 계속 할 방법을 찾았지만 끝내 실패했다. 지금은 휴대폰 판매사원으로 새 삶을 이어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영구 실격 이후 공개석상에 거의 나타나지 않았던 그다. 승부조작 적발 이후 박현준의 이름 석 자는 KBO 리그에 불미스러운 일이 있을 때마다 늘 따라 다니는 ‘흑역사’로 남았다. 그러나 그런 박현준이 프로야구 선수로 새 출발하는 10개 구단 신인 선수들 앞에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KBO가 그를 ‘신인 교육 강사’로 초청해서다.
지난해 신인 오리엔테이션에 강사로 나선 이승엽. 사진=Official KBO News
발상의 전환이었다. 한 야구 관계자는 당시 “아직 프로의 책임감과 무서움을 모르는 신인 선수들에게는 TV에서 늘 보던 비현실적 스타 선수들의 말보다 박현준처럼 직접 나락을 경험해본 인물이 해주는 말에서 더 경각심을 느낄 수 있다”고 해석했다. 부정 방지 교육은 매년 진행됐지만, 새로운 승부 조작 사건이 연이어 터지면서 실효성에 의문이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박현준 스스로도 이미 2009년 신인 교육에서 부정방지 교육을 받았던 인물이라서다. 또 다른 관계자도 “KBO 리그에 얼룩만 남기고 떠난 박현준에게도 자신이 충분히 반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심경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했다. KBO와 박현준 모두에게 ‘고해성사’와 같은 자리가 될 것이라는 의미다.
실제로 박현준도 바로 그런 이유로 쉽지 않은 용기를 냈다. 그는 강연에 참석해 “KBO 연락을 받고 ‘내가 과연 이 자리에 설 수 있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여기 오는 게 맞다는 결론을 내렸다”며 “내게는 KBO 소속 선수로서 남겼던 안 좋은 선례를 지워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수락 이유를 설명했다. 또 “내가 준비한 내용은 많지 않다. 그저 여러분이 날 보면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을 것”라며 “유니폼을 입고 있을 때가 가장 좋다. 최대한 유니폼을 오래 입어라. 여러분들이 꼭 열심히 했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경각심도 일깨웠다. “승부조작은 멀리 있지 않다. 정말 가까이에 있다. 여러분의 동료 선수들, 또는 어렸을 때 같이 운동한 친구들에게 승부조작을 부탁받을 수도 있다”며 “그럴 때 뿌리쳐야 한다. 뿌리치지 못하면 나처럼 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마음을 강하게 먹는 방법은 단 하나. “여러분의 부모님을 생각하라”고 했다. “대부분이 본인은 물론 부모님이 힘들게 뒷바라지 해주시는 가운데 운동했을 것으로 생각한다”며 “그런 부분을 생각하면 절대 할 수 없는 짓이다. 여러분은 나 같은 후회를 안 했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박현준은 당초 30분간 강의를 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감정이 복받쳤다. 10분 만에 강연을 마치고 서둘러 교육장을 떠났다. 묵직한 한 마디는 남기고 갔다. “이제 언론에 내 이름이 그만 나왔으면 좋겠다. 다시는 내 이름이 나오지 않게 해달라고 신인 선수들에게 부탁하겠다.” KBO 리그에 큰 사건·사고가 터질 때마다 어김없이 언급되는 사례가 박현준의 승부조작이다. 더 이상 불미스러운 일이 없어져야 박현준의 이름도 잊힐 수 있다. 박현준의 강연이 남긴 여운이었다. KBO 관계자는 “어려운 부탁이었는데, 어려운 발걸음을 해줬다”고 했다.
# 신인 선수들이 갖춰야 할 덕목들
아이러니하게도, 박현준과 같은 날 마이크를 잡은 또 다른 강사는 이승엽(전 삼성)이었다. 삼성에서 마지막 시즌을 보내고 있던 이승엽은 KBO 리그의 수많은 통산 기록을 보유한 채 역대 KBO 리그 최고 타자로 불리는 ‘살아있는 전설’이었다. 신인 선수들은 마냥 동경해오던 ‘국민 타자’의 등장에 유독 적극적으로 호응하고 참여했다. 눈을 초롱초롱 빛내고, 적극적으로 질문했다. 이승엽 역시 신이 났다. 프로의 세계, 40세까지 살아남은 노하우, 자신의 좌우명 등을 50분간 아낌없이 전했다. “절대 포기해선 안 된다. 1년 잘한다고 기뻐할 것도, 1년 못한다고 슬퍼하거나 기죽을 것도 없다”며 “언제 갑자기 실력이 살아나고 죽을지 모른다. 열심히 하다 보면 충분히 기회가 온다”고 강조했다. 또 “야구를 하면서 너무나 행복했다. 야구를 잘할 때 부와 인기, 명예, 부수적인 것이 모두 따라온다”며 “하고 싶은 것을 자제할 수 있는 힘을 가지면 모두가 스타플레이어가 될 수 있다”고 응원했다. 이승엽이라는 ‘명(明)’과 박현준이라는 ‘암(暗)’이 극명하게 교차한 하루였다.
올해 신인 오리엔테이션에 직접 참가한 정운찬 KBO 신임 총재. 연합뉴스
올해 신인 교육에는 정운찬 KBO 신임 총재가 직접 참석해 선수들에게 또 다른 당부를 했다. 정 총재는 취임 일주일 뒤인 1월 10일 신인 교육에 참가해 “프로선수가 된 것이 여러분 꿈의 종점이어서는 안 된다”며 “자만하거나 계획 없이 생활하면 반드시 슬럼프가 찾아오고 좌절하게 된다. 자신의 능력과 특성에 맞게 계획을 세우고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투수라면 선동열 국가대표 감독이나 박찬호 KBO 홍보대사, 타자라면 4할대 타율을 기록한 백인천 선생이나 최근 은퇴한 이승엽 선수 같은 대선수를 꿈꾸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정 총재 역시 가장 강조한 부분은 ‘바른 생활’이다. 두 차례나 “다시 한 번 강조한다. 바른 생활을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프로 선수로서 품위와 긍지를 가지려면 바른 생활을 해야 한다. 크고 작은 질서를 지키도록 노력해야 한다”며 “오랫동안 선수 생활을 하려면 절제된 생활, 꾸준한 자기 관리로 사회의 온갖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한다”고 거듭 힘주어 말했다.
‘선배와의 만남’ 강연자로 나선 정민철 MBC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은 강연 전 선수들에게 모두 자리에서 일어설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잠깐 일어나서 서로 축하하는 박수를 쳐 주고 어깨도 두드려 주라”고 했다. 프로 입단이라는 힘든 관문을 일단 통과한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겨도 된다는 의미다.
정 위원은 92학번인 투수 박찬호, 고(故) 조성민, 임선동을 언급하면서 “난 계약금을 적게 받고 입단했고 나머지 세 선수보다 월등했던 적이 없었다”며 “열등감도 있었지만, 이를 자양분으로 삼아 이를 악물고 정말 열심히 노력해 ‘적어도 이 친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싶다’는 열망으로 여기까지 왔다”고 했다. 또 드라마 ‘미생’의 한 장면을 직접 틀어 주면서 “여러분이 프로 생활을 하면서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가 많겠지만, 이 드라마 대사처럼 여러분을 위해 인생을 걸고 밤낮으로 기도하는 부모님을 생각하면 조금 더 힘이 날 것”이라고 말했다. 야구계 어른들과 선배들이 신인 선수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마음가짐은 이렇게 일맥상통한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
선수 가족 초청행사 의미 “잘 키워주셔서 감사” 지난해 12월 21일 열린 LG 김현수의 입단식엔 특별한 초대 손님이 함께했다. 김현수의 부모와 장인·장모다. LG는 입단식 장소인 서울 그랜드 인터콘티넨탈호텔 메이플홀 창가에 김현수의 네 부모를 위한 자리를 마련했다. FA 이적 입단식에 부모가 참석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장인·장모까지 함께하는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LG는 김현수를 ‘모셔’ 오면서 김현수뿐 아니라 그 가족의 마음도 함께 끌어당기기 위해 노력했다. 김현수의 입단이 확정된 뒤에는 김현수의 부모와 장인·장모에게 LG 가을야구의 상징인 ‘유광점퍼’를 한 벌씩 선물했다. 야구선수 한 명이 성장하기까지는 늘 가족의 헌신이 필요하다. LG는 그래서 이적 선수의 부모를 입단식에 초대했고, 같은 이유로 두산도 지난해부터 신인 선수 가족 초청 행사를 열고 있다. 신인들이 주로 생활하게 될 경기도 이천 베어스파크를 가족들에게 공개해 앞으로 아들이 어떤 환경에서 운동하게 될지 미리 보여주는 이벤트다. 지난해에는 신인 선수 13명 가족이 참석해 2군 코칭스태프와 인사를 나누고, 메인 그라운드와 실내 연습장, 숙소를 소개했다. 가족들이 구단과 코칭스태프에게 궁금한 점을 묻고 답하는 시간도 보냈다. 올해는 규모가 더 커졌다. 전풍 대표이사와 김태형 감독이 직접 행사에 참석했다. 신인 선수 11명은 물론 가족들과도 악수를 나누고 인사했다. 선수 가족들은 오전에 2군 전용 시설을 투어한 뒤 오후 1시부터 시작된 입단식에 모두 함께했다. 신인 선수 전원이 두산그룹 배지를 받았고, 선수 부모가 각자 아들에게 당부하는 메시지를 담은 영상도 상영했다. 부모들은 입을 모아 “여기까지 와줘서 고맙다. 꼭 다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입단식이 끝난 뒤에는 메이저리그 샌디에이고에서 정식 지도자로 임명된 홍성흔 코치가 특별 강연을 했다. 이 행사의 취지는 단 하나다. 두산 관계자는 “우리 구단이 지명한 선수를 이렇게까지 잘 키워주신 부모님께 감사를 표현하기 위한 자리다. 서로가 서로에게 보답하는 자리”라고 했다. 선수들이 프로 생활을 하다 힘이 들거나 길을 잃을 위기에 빠졌을 때,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며 버텨주길 바라는 마음도 담겨 있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