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혁당 재건위 사건 피해자와 가족들이 국가가 제기한 배상금 반환소송에서 패하면서 ‘빚고문’을 겪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지난 1975년 박정희 정권이 유신체제 유지를 위해 간첩을 조작, 8명의 무고한 사람들을 사형에 처하고 17명을 무기징역 등 장기투옥시킨 사건이다. 이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2000년 대통령 직속기구로 구성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인혁당 사건은 군사정권 시대 고문에 의해 과장·조작됐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에 사건에 연루된 피해자들은 서울중앙지법에 재심을 청구했고, 2008년 모두 무죄가 선고됐다.
재심서 무죄가 선고되면서 피해자와 가족들(16가족 77명)은 국정원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진행했다. 2009년 6월 1심에서는 국가가 이들에게 위자료 279억 원을 비롯해 유죄판결이 확정된 1975년 4월 9일 시점부터 연 5%의 지연이자를 지불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이로써 전창일, 이현세 씨 등 피해자와 가족들은 759억 원에 이르는 배상금을 받을 수 있게 됐다.
1심 판결 후 이들은 서울중앙지법에 배상금 가집행을 신청, 법원도 이를 받아들이면서 법무부는 배상금의 3분의 2 수준인 490억 원을 선지급했다. 인혁당 사건 피해자 모임인 4·9통일평화재단에 따르면 형량과 수형 기간, 피해나 질병 등에 따라 배상액이 다르지만 한 사람당 5~7억 원, 한 가족당 15~20억 원 정도 돌아갔다.
이후 2심 역시 1심과 같은 판결이 나왔다. 이에 일반 국민들은 이들 피해자들이 재심을 통해 무죄를 받고, 정부로부터 손해배상까지 받아 이제 잘 살게 됐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2011년 1월 27일 대법원이 피해자와 가족들의 가슴에 다시 한 번 못을 박았다. 대법원은 1·2심과 달리 “통상 위자료 배상채무의 지연이자는 불법행위 시점에서 발생하지만, 불법행위 이후 장기간이 흘러 통화가치 변동으로 과잉배상 문제가 생길 경우 사실심(손해배상청구소송 항소심) 변론 종결 시점부터 발생한다”고 판결했다.
대법원 판결에 따르면 지연이자가 손배 청구소송 2심 변론 종결 시점부터 발생, 배상금이 759억 원이 아니라 279억 원으로 산정됐다. 따라서 피해자와 가족들이 미리 받은 490억 원 중 279억 원을 뺀 나머지 211억 원을 반환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어 박근혜 정권이었던 2013년 7월 인혁당 사건 피해자와 가족 77명에게 ‘부당이득금 반환 청구소송’이 제기됐다. 소송 원고는 인혁당 사건을 조작했던 중앙정보부의 후신 ‘국가정보원’이었고, 소송은 법무부가 맡았다.
한순간에 피고로 전락한 피해자와 가족들은 탄원서도 내고 법정투쟁도 했지만 결구 모두 패소했다. 4·9통일평화재단의 안경호 국장은 “한두 분 정도만 대법원까지 가고, 대부분은 1심과 항소심에서 포기했다. 법조인들이 봤을 때, 이미 대법원 판결이 있고 채권·채무 관계가 너무나도 명확했기 때문에 실효성이 없다고 판단했다”며 “또한 당시가 박근혜 정권 초기라 법원의 판단이 바뀌지 않겠다는 판단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재판 과정에서 해결 방안은 있었다고 한다. 일부 재판부가 인혁당 피해자들의 딱한 사정에 강제조정이나 화해권고할 것을 결정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원고인 국정원의 반대로 화해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재판부가 금액을 책정하고 화해권고를 내며 ‘소송비용은 각자 부담하라’고 했는데, 국정원에서 “재판비용을 낼 수 없다”는 이유를 댄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인혁당 사건 피해자들은 배상금을 돌려줄 형편이 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배상금을 받아 그동안의 빚을 갚고, 집을 구매하고, 고령에 노후대비로 적금을 들었다. 또한 서로 돈을 출연해 재단을 만들고, 그 동안 신세를 입은 수십 개 시민단체 등에 기부도 했다. 수억 원에 이르는 배상액을 그대로 가진 사람은 거의 없었던 것이다.
그사이 변제해야 할 돈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시작했다. 연 20%라는 무시무시한 연체이자율에 매일 수십만 원의 이자가 붙었다. 특히 지난해부터는 배상금을 변제하지 못한 피해자와 가족들에게 부동산 등 재산에 대한 ‘강제경매 명령’이 내려지기 시작했다.
인혁당 사건 당시 15년형을 선고받은 고 전재권 씨의 장녀 전영순 씨 역시 현재 살고 있는 아파트가 채권자 국정원에 의해 경매에 부쳐졌다. 전 씨는 “지난해 7월 1차 경매는 다행히 유찰됐지만, 아직 2차가 진행 중”이라며 “언제 집이 팔려 길거리에 나 앉을지 모르는 불안한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전 씨는 “그뿐만 아니라 가지고 있는 통장 모두와 연금까지 압류됐다. 변제해야 풀리기 때문에 경제활동을 전혀 할 수 없다. 그런데도 시간은 흐르고 이자는 점점 불어나고 있다. 이제는 처음 받았던 배상금보다 변제해야 할 액수가 더 많다. 갚을 수도 없는 액수”라며 “40년 전에는 ‘간첩 가족’이라는 꼬리표로 가정을 박살 내더니, 이제는 ‘빚쟁이’로 만들어 괴롭히고 있다”고 토로했다.
전 씨의 첫째 남동생은 폐암 말기 판정 후 빚독촉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3억 8000만 원을 토해내고 세상을 떴다. 둘째·셋째 여동생의 경우 개인회생 신청 후 중년의 나이에 투잡을 뛰며 반환금을 갚아나가고 있다.
국가에 배상금을 다 변제한 피해자 가족들도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전 씨는 “그 사람들이 돈이 있어 반환한 게 아니다. 대출 받아 변제한 가족들도 있다. 그들은 부동산 강매는 피했지만, 원금과 대출이자 갚느라 계속 고통을 겪고 있다”고 전했다.
지난 2015년 인혁당 사건의 유가족 등과 함께 서대문형무소를 방문한 문재인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대표. 사진=연합뉴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고, 지난해 5월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됐다. 정권이 바뀌면서 문무일 검찰총장이 나서 검찰 역사상 처음으로 과거 시국사건 수사에 대해 사과하며 인혁당 사건을 직접 거론하기도 했다.
이에 인혁당 사건 피해자와 가족들은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해줄지 모른다는 생각에 기대감이 높아졌다. 피해자들은 청와대, 국회, 법원, 검찰 등에 탄원서와 진정서를 제출했다. 심지어 김정숙 여사에게까지 탄원서를 보내 안타까운 사정을 호소했다. 법무부·국정원 국정감사나 박상기 법무부장관·김명수 대법원장 인사청문회 등에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에서도 아직까지 뚜렷한 답변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딱한 사정 알고 있습니다. 해결 방안을 검토해보겠다”는 원론적 수준의 대답만 나온 상황이다. 피해자 측 관계자는 “정부 입장에서도 애매한 입장인 것 같았다. 정권 교체 이후 과거 청와대와 국정원이 얽힌 적폐청산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그런데 이 시점에 인혁당 사건 문제를 풀기 위해 청와대가 국정원에 지시를 내리면, 청와대가 국정원에 개입했다는 문제가 불거질 수 있다. 그런 우려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귀띔했다.
더 답답한 점은 해결책이 마땅히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안경호 국장은 국정원이 채권자로서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 가장 빠른 해결책이라고 밝혔다. ‘애초 사건을 만든 가해자가 결자해지해야 한다’는 의미다.
4·9통일평화재단에서는 최근에야 하나의 해결 실마리를 찾아냈다. 법무·검찰개혁위원회가 내놓은 권고안에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이다. 앞서 지난해 12월 법무·검찰개혁위원회는 ‘고문·조작 등 반인권적 범죄 피해자를 위한 국가배상 및 소멸시효 관련 권고안’을 발표했다.
이 권고안의 5항에서는 “반인권적 범죄의 피해자들 중 국가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으나, 국가의 소멸시효 주장과 대법원의 소멸시효 단축 판결 등으로 인해 배상받지 못한다는 판결이 확정되거나, 가지급 받았던 배상금을 반환해야만 하는 피해자들이 있다”며 “이들 피해자들이 국가배상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법률안을 국회에 제출해야 한다. 또한 이들 피해자들을 상대로 배상금 반환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권고하고 있다.
이에 4·9통일평화재단은 “정부가 권고를 즉각 수용해 인혁당 사건 피해자 및 가족에 대한 압류, 강제경매 등 반환금 환수조치를 즉각 취소하라”고 촉구했다.
안경호 국장은 “문재인 정부가 이번 권고안을 전향적으로 검토해서 받아들이면, 이를 명분으로 큰 법적문제 없이 자연스럽게 해결할 수 있다”며 “현재로선 이 방안이 최선이라 여기에 기대를 걸고 있다”고 호소했다.
앞서 전 씨는 “과거 인혁당 사건을 조작한 국정원이나, 손해배상금 반환을 판결한 법조인들은 여전히 처벌받지 않고 잘 먹고 잘 산다. 하지만 국가의 조작사건 피해자 2세들은 가난과 핍박 속에 배우지도 못하고 여전히 고통 받고 있다”며 “국가가 국민 개인을 괴롭히는 이런 비극을 우리 세대에서 끝내야 한다”고 울분을 토했다.
이처럼 과거 군부 독재 정권의 비극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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