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 FA를 통해 한화 이글스 유니폼을 입었던 정근우. 한화에서의 정근우는 4년간 매년 100경기 이상 출장하며 494경기에 나섰고, 평균 0.312의 타율에 47홈런 244타점 81도루를 기록했다. 2016년에는 138경기 타율 3할1푼 18홈런 88타점 121득점을 올렸다. 지난 시즌에는 부상으로 공백이 있긴 했지만 105경기 출전 타율 3할3푼 11홈런 46타점 73득점을 기록했다. 정근우가 지난 시즌을 마치고 FA 시장에 나왔을 때는 누구보다 가장 먼저 계약을 맺을 것으로 예상됐다. 그러나 해를 넘겼고, 1월 중순도 지났지만 정근우의 계약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한화 고참 정근우는 FA시장에 나온 뒤 계약 소식이 들리지 않고 있다. 사진제공 = 한화 이글스
정근우의 계약이 늦춰지면서 야구계에선 한화와 정근우 사이의 미묘한 분위기를 놓고 이런저런 소문이 돌고 있다. 확인해 본 바에 의하면 소문은 소문일 뿐이었다. 구단은 여전히 선수를 원하는 상황이었고 30대 중반을 넘어선 선수에게 다년 계약을 안겨줄 수 없다는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선수에게 불리해지는 상황이지만 정근우는 여유를 잃지 않는다. 이미 한 차례 FA 계약을 경험한 터라 시간이 없다고 해서 마냥 서두르지 않겠다는 생각이다.
최준석도 어느 때보다 추운 겨울을 보내고 있다. 정성훈, 김주찬이 KIA와 계약했지만 최준석은 여전히 감감무소식이다. 무엇보다 원소속팀인 롯데는 채태인을 영입하면서 최준석과의 결별을 선언했다. 필요할 때 한 방을 날려줄 수 있는 기대감과 팀 승리 기여도는 높은 편이지만 전체적인 기량 하락세가 뚜렷하고 주루에서 약점을 갖고 있는 터라 선뜻 최준석에게 손을 내미는 팀이 나타나지 않는다. 1루수와 지명타자란 보직도 최준석에게 선택의 폭을 줄어들게 만든다. 각 팀마다 확고한 1루수, 지명타자들이 즐비하기 때문이다. 이승엽의 은퇴로 지명타자가 공석인 삼성은 외부 영입이 없다고 천명했다.
롯데로부터 전력 외 통보를 받은 이우민은 사이판에서 이대호와 함께 개인 훈련 중이다. 2001년 롯데 입단 후 15시즌 동안 자이언츠 유니폼만 입고 뛰었던 그로선 롯데가 코치직 제안을 했지만 선수 생활 연장을 위해 정중히 거절하고 FA 시장으로 나왔다. 통산 타율 2할3푼3리, 15홈런 432안타 168타점을 기록했다. 이우민은 돌아가는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겠다는 입장이다. 이우민의 에이전트는 “계약을 마무리 짓고 훈련을 하는 거라면 마음이라도 편할 텐데 계약이 진행되지 않은 상황에서 개인 훈련에 집중하는 건 어려운 일”이라고 설명했다. “그래도 이대호와 함께 열심히 몸을 만들고 있다. 그 노력과 수고가 헛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는 바람을 나타냈다.
반면에 이대형과 안영명은 소속팀과 협상 재개에 나서면서 양측의 입장을 좁히는 중이다. 지난 시즌 왼 무릎 전방 십자인대 파열로 독일에서 수술을 받고 재활에 돌입했던 이대형은 사이판 훈련을 마치고 귀국 후 구단과 미팅을 가졌다는 후문이다. 안영명도 한화와 합의점을 찾았다는 소식이 들리면서 희소식을 기대하게 만든다.
김주찬의 계약을 이끈 리코스포츠에이전시 이예랑 대표는 예상보다 계약 진행이 더디게 흘러갔지만 구단과 계약 내용에 이견이 크진 않았다고 설명했다.
KIA와 2+1년 27억 원에 계약한 김주찬(왼쪽). 사진제공 = KIA 타이거즈
“조계현 단장이 밝힌 대로 우리가 3년 계약을 원했던 건 사실이다. KIA는 현실적인 이유를 내세워 2+1년 계약을 요구했기 때문에 그 차이를 좁히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 외에는 구단에서 많은 배려를 해줬다. 김주찬 선수도 처음부터 KIA에 남고 싶어 했고, KIA에서 은퇴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구단과의 협상에 적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협상 중에도 구단 행사에는 모두 참석했을 정도다. 구단도 김주찬 선수가 지난해 주장으로서의 역할을 잘해줬다고 판단했고 선수의 역량을 높이 평가해 줬다. 그 점을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한다.”
이 대표는 30대 중반 이후의 베테랑 선수들이 구단과의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긴 어렵다고 말했다. 그러나 서로 필요한 관계이고 구단과 선수가 윈윈할 수 있는 지점을 찾다 보면 오히려 협상이 빨리 진행될 때가 있다는 경험담을 전했다.
롯데 문규현(35)을 비롯해 채태인(36), 이우민(36), 권오준(36)의 에이전트를 맡고 있는 죠이리스포츠 김종식 대표는 “30대 중반을 넘어선 선수들 계약을 맡아 다양한 경험과 배움을 얻었다”면서 롯데와 계약한 채태인의 사례를 들었다. 채태인은 사인 앤 트레이드 형식으로 롯데와 1+1년, 계약금 2억 원, 연봉 2억 원, 옵션 매년 2억 원 등 총액 10억 원에 FA 계약을 체결했다.
“(넥센)구단이 잡으려는 의사가 없다는 걸 확인하고 여러 팀을 알아봤다. 롯데에서 관심을 갖고 있다는 걸 확인한 후에는 다소 안심이 된 것도 사실이다. 무엇보다 채태인 선수의 팬이 나서 롯데 구단에 홍보하는 광고를 만들었던 것도 도움이 됐다. 선수가 큰 힘을 얻었기 때문이다.”
KT 구단과 FA 협상을 재개한 것으로 알려진 이대형. 사진 출처 = kt wiz 홈페이지
채태인 선수의 팬을 자처한 한 사람은 한 야구 커뮤니티에 채태인을 홍보하는 광고를 만들어 게재했다. “최준석 빠지면 1루 백업 대안 있냐”는 제목으로 롯데를 겨냥했던 그는 본문에서 “물론 있습니다! 자이언츠를 위한 최적의 솔루션! 채태인을 영입하세요!”라는 글귀를 작성했다. 또한 “언제 실망하신 적 있습니까?”라며 “이대호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KBO 통산 3할 타자”임을 깨알 자랑했다.
김종식 대표는 “그 광고 때문에 롯데와 계약한 건 아니지만 선수 입장에선 굉장히 고마운 내용일 수밖에 없었다”라는 얘기를 전했다.
김 대표는 FA를 앞둔 선수들이 소속팀에 잔류하는 것 대신 FA 시장으로 나오는 이유를 두 가지로 해석했다.
“첫 번째는 구단에서 자신을 잡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걸 확인했기 때문이다. 잔류했다가 방출당할 수도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FA 시장에 나오는 선수도 있다. 두 번째는 자신의 몸값을 직접 확인하려고 시장에 나오는 경우다. 그런 선수는 협상 진행 과정이 좀 더 여유로운 편이다.”
구단에서 먼저 전화를 걸어와 만나자고 하면 50% 이상의 성공 가능성이 있는 편이라고. 문규현의 계약을 가장 어려운 숙제라고 생각했던 김 대표는 문규현이 올 시즌 첫 FA 계약자가 된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구단이 그만큼 문규현을 필요로 한 것이다.
“이우민의 계약이 남아 있어 아직도 마음을 놓지 못하겠다. 선수가 좌절할까봐 걱정이 되는데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고 연락을 기다리고 있다. 나도 작지만 회사를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구단의 입장도 이해가 된다. 선수들은 자신이 나이 먹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인정하지 않는다. 그 생각이 협상을 어렵게 만드는 것도 있다. 뒤늦게 자신의 나이를 깨닫고 놀라는 선수가 있을 정도다.”
올 시즌 FA 시장은 의외의 변수가 속출했다. 단장, 감독이 바뀐 팀들도 많았고 리빌딩을 이유로 외부 영입을 포기한 팀도 있었다. 30대 중반의 FA 선수들이 설 곳을 잃은 가운데 유독 찬바람이 심하게 불었던 스토브리그였다. 과연 남은 FA 미계약자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
30대 중반 베테랑이 살아남는 법…“팀 잘 챙기는 고참, 구단서도 챙긴다” “기왕이면 이호준처럼 리더십이 뛰어나고 후배들 잘 챙기는 선수를 선호하는 편이다. 구단과 선수들의 가교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선수가 좀 더 높은 평가를 받는 게 사실이다.” FA 계약을 이끈 에이전트들의 이구동성이다. 30대 중반의 베테랑들에게 구단이 원하는 건 팀 전력에 보탬이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후배들을 잘 이끌고 후배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지를 살핀다는 것이다. A 구단의 B 단장도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리더십도 없고, 후배들에게 존경받지 못하는 선배라면 굳이 안고 갈 이유가 없지 않겠느냐”면서 “요즘에는 인성이 중요한 시대이기 때문에 후배들에게 인정받고 존중받는 선배인지의 여부도 매우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1980년생인 NC 다이노스 손시헌은 12월 18일 NC와 2년 총액 15억 원(계약금 5억 원, 연봉 5억 원)에 FA 계약을 맺었다. 손시헌은 기자에게 구단과의 협상 전략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NC 다이노스 손시헌(오른쪽)이 구단과 FA 계약을 맺은 뒤 유영준 단장과 악수하고 있다. 사진 출처 = NC 다이노스 홈페이지 “난 이번 FA 협상 때 조금은 다른 방법을 선택했다. 구단에서도 내 성적이 아닌 기대치를 내세웠기 때문에 성적에 대한 기대보다 역할 부문에 초점을 맞췄다. 올 시즌 주장을 맡게 되면서 선수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것과 제2의 유격수를 발굴하는 데 적극 돕겠다고 강조한 것이다. 난 계속 김경문 감독님 밑에서 야구하고 싶고, 다른 팀으로 갈 마음도 전혀 없고, NC에 올인하겠다는 내용도 덧붙였다. 때론 선배로, 때론 고참 선수로, 그리고 때론 선수들과 코칭스태프의 다리 역할을 하면서 NC가 명문팀으로 가는데 힘을 보태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NC를 위해 다 줄 준비가 돼 있다고 강조했는데 그걸 구단에서 잘 받아들인 것 같다.” 손시헌은 지난 시즌을 마치고 많은 동료 선수들이 그라운드를 떠나는 모습을 보며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했다고 말한다. “철이 덜 들었을 때는 내 자신만 생각했었다. 그러다 나이를 먹고 팀을 옮긴 후에는 내 자신이 아닌 팀을 먼저 챙기게 되더라. 선수로 뛴 날보다 선수로 뛸 날이 얼마 남지 않아서인지 지금은 자신보다 팀을 먼저 생각하는 후배들이 예뻐 보이기도 하다.” 비즈니스 논리가 적용되는 프로의 세계에서 손시헌은 구단과 동행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마인드가 NC 구단에 전달되었고 38세의 나이에도 2년 계약을 이끌어낼 수 있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의 홍성흔 코치도 “베테랑이 되면 개인 성적보다는 팀에 필요한 선수가 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고참 선수들이 설 자리는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래도 더그아웃에서 후배들을 챙기고 파이팅 해주고 에너지를 북돋워주는 선배와 시합 못 뛴다고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선배와 누가 더 믿음직해 보이겠나. 야구를 잘해서 몸값을 올리려 하기보다는 후배들을 위해, 팀을 위해 희생할 줄 아는 자세도 필요하다. 야구 선수로는 물론 야구 외적인 면에서도 평판이 좋은 선수는 구단에서 은퇴 후에도 인연을 맺으려 할 것이다. 평소 자기 관리는 물론 선수들한테, 또 구단에 인정받을 수 있는 모습을 보이는 게 중요하다.” [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