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제 9단
커제는 지난 17일 중국의 바둑 온라인사이트 예후에서 펼쳐진 줴이와의 2점 대국에서 불과 77수 만에 항복 선언을 해 바둑팬들을 충격에 빠트렸다. 비록 공식대국이 아니라 아이디를 앞에 세운 익명의 인터넷 대국이었지만, 세계 정상급 기사가 2점으로도 졌다는 사실은 더 큰 충격을 안기기에 충분했다.
프로기사들에게 2점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칫수다. 1980년대 초 일본에서 활약하고 있는 조치훈 9단이 명인을 따고 금의환향하자 일본의 일인자 조치훈 9단과 한국 일인자 조훈현 9단의 기념대국이 주선됐다. 그런데 당시만 해도 한국이 일본에 비해 많이 약했던 때라 주최측에서는 조훈현 9단에게 정선(덤이 없는 바둑)으로 둘 것을 제안했는데 그 말을 들은 조훈현 9단이 크게 노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정선도 아닌 2점이라니….
2점이면 대략 15집의 가치로 본다. 즉 접히는 흑이 15집을 앞선 상태에서 시작한다는 얘기다. 서봉수 9단은 일찍이 “한 집은 땅이요, 두 집은 하늘”이라고 말한 바 있는데 그렇다면 15집이 어느 정도의 가치를 지니는지 짐작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를 모를 리 없는 커제가 2점으로 인공지능에 도전한 것을 두고 체면에 구애받지 않은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 칭송하는 소리도 있었으니 이에 대한 평가는 역사에 맡길 수밖에. 일단 기보를 따라가보자.
1도
[1도] 백3~5는 하수를 상대로 하는 전형적인 접바둑의 초반진행. 커제도 4·6으로 고분고분 응하는데 이렇게 해두고 백7로 걸쳐간 것이 커제의 가슴에 불을 지른 게 아닌가 싶다. 보통은 백A로 하변을 지켜둘 자리. 그런데 백7로 손을 뺀 것은 명백한 도발이다. 갈라서 공격할 테면 해보라는.
2도
[2도] 줴이의 도발에 화가 났을까. 이후 커제의 행마가 거칠어져 상변에서 전투가 발발했다. 그런데 흑10까지 백은 갇힌 데 반해 흑은 왼쪽 포위망에 여유가 있어 백이 괴로워 보이는 장면. 그런데 여기서 반전이 일어난다.
3도
[3도] 백1·3으로 바짝 압박을 가한 다음 5의 젖힘이 수상전의 급소. 흑6을 기다려 백7로 전열을 정비하니 누가 유리한 싸움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게 돼버렸다.
4도
[4도] 피차 두 눈이 없는 상태이므로 수상전은 필연인데 흑1로 치중했을 때 줴이는 손을 빼 백2로 우변을 지켜버렸고 이것이 결정타가 됐다. 흑3에는 백4의 따냄(4…△). 그런데 이것은 빅의 형태인데 공격을 당하던 백이 거꾸로 선수를 잡아 2로 보강까지 한 셈이니 부분적으로 흑이 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아직 돌을 거둘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커제는 이미 백2의 시점에서 이미 둘 마음이 사라진 것으로 추측된다.
이 바둑을 지켜본 신진서 8단은 “2점이나 깔았는데도 불구하고 초반 전투에서 실패하자 커제 9단이 의욕을 상실한 것 같다”고 평했다. 또 신민준 6단은 “제한시간 30분에 초읽기 30초를 3회를 주는 속기 대국이라 인간이 불리한 게 사실이다. 또 커제 9단이 2점을 놓았지만 6집반 덤을 냈으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2점 바둑은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커제 9단이 또 도전한다고 해서 승리한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커제의 용기 있는 행동(?)에 자극받았을까. 얼마 전 이세돌 9단과의 한중일 명인전 결승에서 다 이겨있던 바둑을 패해 국내팬들에게도 익숙한 롄샤오 9단도 커제와 똑같은 조건으로 2점에 도전했지만 역시 줴이를 당해내지 못했다(247수, 백불계승). 또 그로부터 며칠 후 이번엔 이세돌 9단의 라이벌 구리 9단도 2점에 도전했지만 구리 역시 승리를 거두진 못했다.
한때 조치훈 9단과 전성기를 같은 시대에 보냈고 이창호 9단과 세계랭킹 1위를 다퉜던 린하이펑(林海峰) 9단은 “만약 바둑의 신(神)과 바둑을 둔다면 석 점을 놓고 두겠다. 하지만 목숨을 걸고 두라면 넉 점을 놓아야 하지 않을까”라고 말했는데 만일 지금 다시 묻는다 해도 린 9단이 같은 대답을 할지 궁금하다.
유경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