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24일(현지시각) 미국의 모든 눈과 귀가 미시간 주 랜싱 법원의 한 재판정에 고정됐다. 이날 이곳에서는 미국 체조 국가대표팀의 팀 닥터로 명성이 높았던 래리 나사르(54)에 대한 선고 재판이 열렸다. 재판을 담당한 로즈마리 아퀼리나 판사는 그에게 징역 최단 40년, 최장 175년을 선고했다. 사실상 죽을 때까지 감옥살이를 해야 하는 셈이다. 재판 시작 후 16개월 만의 일이다.
30년 간 150여 명의 미성년자를 성추행·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래리 나사르에 대해 최장 175년의 형이 선고됐다. AP/연합뉴스
이날 선고에 앞서 판사는 나사르가 제출한 편지 형식의 반성문을 혐오스럽다는 듯 던져버리기도 했다. 그의 편지에는 “미디어가 그들(피해자)에게 내가 한 행위들이 잘못된 것이라고 설득한 것”이라며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더니(Hell hath no fury like a woman scorned), 그건 완벽한 악몽이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판사가 법정에서 이 대목을 읽자 방청객들 사이에서는 탄식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아퀼리나 판사는 “이 편지는 피고인이 아직 자신의 행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걸 보여준다. 명망 높은 의사이니 누구의 말도 들을 필요가 없으며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당신의 행위를 ‘치료’라고 한다면 난 당신에게 내 개들조차 보내지 않을 것”이라며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판사가 표현한 나사르는 ‘정확하고, 계산적이며, 교활하고, 비열한’ 인물이었다. 자신의 직위와 명예를 이용해 스스로 방어할 수 없는 어린 소녀들을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고 유린했다는 것.
선고에 앞서 7일 동안 실명과 얼굴을 공개하기로 결심한 나사르의 피해자 전원이 법정에 나와 ‘릴레이 증언’에 참여하는 유례없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성범죄 사건에서는 2차 피해를 우려해 익명으로 피해 사실을 알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들은 더 이상 스스로를 감추지 않고, 동료 피해자들과 함께 목소리를 높였다. 그들 세대 이후의 소녀들이 또 다시 겪을 수 있을 악몽을 깨트리는 첫 걸음이었다.
30년 동안 나사르에게 유린된 피해자는 모두 156명. 이들 대부분은 미성년자 시절 나사르에게 치료와 재활 훈련을 받았던 체조 선수들이거나 댄서였다. 검찰은 나사르를 향해 “역사상 가장 많은 어린이 피해자를 낸 연쇄 아동성범죄자”라고 표현했다. 아퀼리나 판사는 피해자들을 “살아남은 자매들(sister survivors)” “전사들(warriors)”라고 부르며 그들의 용기를 북돋았다.
피해자 가운데에는 전 미국 체조 국가대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알리 레이즈먼과 매케일라 마로니, 시몬 바일스, 가비 더글라스 등이 포함됐다. 2012년 런던올림픽 체조 단체전 금메달리스트인 마로니는 나사르 사건이 불거지자 트위터에 ‘미투(Me Too)’ 해시태그를 달고 성폭력 피해를 밝혔다. 그녀는 “13살 이후부터 2016년 체조계를 은퇴하기까지 나사르에게 지속적인 성폭력을 당했다”고 증언했다.
2012년, 2016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레이즈먼 역시 15세 때부터 피해를 입어왔다고 TV 방송에 출연해 밝혔다. 더욱이 레이즈먼이 이 같은 사실을 공론화할 것을 우려한 미국 체조협회가 그에게 “발설하지 말라”고 요구하기까지 한 것으로 드러나 더 큰 논란을 낳았다.
나사르의 성폭력 피해자는 그가 담당한 스포츠 선수나 그의 클리닉을 들른 환자뿐만이 아니었다. 증언을 위해 법정에 섰던 카일 스티븐스는 단순히 부모와 친분이 있던 나사르에게 6년여 동안 성폭력을 당했다고 밝혔다. 그는 이후 나사르의 아이들을 돌보면서도 같은 범행 아래 신음해야 했다.
BBC에 따르면 그녀는 법정에서 “나사르는 내 나이가 여섯 살일 때 나를 처음으로 유린했다. 그 때 나는 아직 젖니조차 빠지지 않은 어린 아이였다”고 증언했다.
이어 나사르를 노려보며 “당신은 이제야 알았겠지만, 어린 소녀들이 언제까지고 어린 상태로 있지 않는다. 그들은 이제 강력한 여성으로 자라났고, 당신의 세계를 부수기 위해 돌아왔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스티븐스의 아버지는 딸의 성폭력 피해를 믿지 않았다가 2016년에야 진실을 알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나사르의 범행이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지난 2016년 9월이다. 미국 조간신문 ‘인디아나폴리스 스타’는 레이첼 덴홀렌더를 포함한 두 명의 전직 체조선수들이 나사르를 성폭력 혐의로 고소했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전 미국 체조 국가대표이자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알리 레이즈먼이 법정에서 증언하고 있다. ‘가디언’ 영상 캡처.
덴홀렌더는 BBC와의 인터뷰를 통해 나사르의 성폭행 사실을 직접 증언하기도 했다. 그는 “15살이 된 이후로 나사르의 클리닉을 방문할 때마다 그가 나를 성폭행했다”고 밝혔다. 덴홀렌더의 어머니가 종종 그와 함께 나사르의 클리닉을 방문했는데, 이때 나사르는 마사지 침대의 머리 쪽에 어머니를 이동시켜 자신의 범행을 보지 못하도록 했다.
덴홀렌더는 “한 손으로는 스포츠 마사지를 하면서, 다른 한 손은 수건으로 가린 뒤 손가락을 신체 부위에 집어넣었다. 한 번은 속옷을 풀러 신체 부위를 만지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이때 덴홀렌더는 “나사르의 행위가 치료나 진료가 아니라 성폭행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다”고 말했다.
사건이 알려지자 나사르에게 같은 피해를 입었다는 150여 명의 여성들이 나사르를 동시에 고소하기에 이른다. 이들은 모두 미성년자인 시절 나사르에게 성폭력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2017년 2월에는 세 명의 전직 체조선수인 자네트 안톨린, 제시카 하워드, 제이미 댄처가 얼굴과 실명을 공개하고 나사르의 범행 사실을 언론을 통해 직접 알리기 시작했다.
주로 자신의 병원이나 체육관, 미시간주립대 사무실에서 이뤄진 나사르의 범행은 ‘재활훈련’과 ‘치료’라는 이름 아래 행해졌다. 나사르 역시 자신의 범행에 대해 “적절하고 적법한 범위 내에서의 의료 과정이었으며 환자들도 이와 같은 사실을 잘 알고 있다”고 강하게 반박해왔다.
검찰은 피해자들의 증언을 종합해 나사르를 ‘아동 성폭행’ 혐의로 처음 기소했다. 그런데 기소 한 달 후, 나사르의 자택을 수색하던 FBI가 아동 포르노 사진과 영상 3만 7000여 장을 발견한다. 이 가운데는 나사르가 직접 수영장에서 어린 여자아이들을 희롱하는 영상도 있었다.
연방법원은 그에게 아동 포르노 소지, 제작 혐의를 추가 적용했으며 3건의 유죄가 확정된 아동 포르노 건과 관련해 60년 형을 선고했다. 이 형량을 채우고도 나사르가 살아있다면, 그 직후 아동 성폭력에 따른 형량 40~175년을 복역해야 한다. 아퀼리나 판사의 말대로 선고가 곧 ‘사형 집행문’이 된 것.
피해자들은 이번 선고에 눈물을 흘리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나사르 스캔들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나사르로 하여금 범행을 마음 놓고 저지를 수 있는 권력을 주고, 이를 묵인한 체조협회와 미시간주립대 역시 화살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소속 선수들의 피해 사실을 입막음하려 한 미국 체조협회와 나사르의 범행을 묵인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미시간주립대에 대한 수사가 착수된 상황이다.
미시간주립대 루 애나 사이먼 총장은 나사르의 선고 당일 사임했으며, 미국올림픽위원회 대표인 스콧 블랙먼이 체조협회 이사회 회원에게 이번 스캔들의 책임을 묻고 사임할 것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CNN에 따르면 블랙먼은 “30일까지 사임 후 2월 28일까지 임시 이사회를 구성하지 않으면 체조협회는 스포츠 운영 기구로서 지위를 잃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
박혜리 기자 ssssch333@ilyo.co.kr
‘사이다 판사’ 로즈마리 아퀼리나, 피해자에게는 격려를 피고인에게는 엄벌을 래리 나사르에게 175년 형을 선고한 미시간주 랜싱법원의 판사 로즈마리 아퀼리나(Rosemarie Aquilina)의 속 시원한 ‘사이다’ 발언이 미국 전역에서 주목받고 있다. 가해자에게는 한없이 혹독한 모습을 보이는 반면 피해자들에게는 공감과 격려를 아끼지 않은 그녀의 태도 많은 언론들도 찬사를 보내고 있다. 래리 나사르의 재판에서 175년형을 선고한 아퀼리나 판사. AP/연합뉴스 CNN은 “피해자들의 증언을 듣는 일은 보통 하루 이틀이면 끝나지만 아퀼리나 판사는 150명이 넘는 피해자들의 증언을 듣는 데에만 7일을 할애했다”며 “아퀼리나는 모든 여성들에게 그녀의 법정을 열어주었다”고 평가했다. 나사르에게 중형을 선고하던 날에도 아퀼리나 판사의 강력한 발언은 계속됐다. 30분 넘게 자신의 판결에 대해 열정적으로 설명하던 아퀼리나 판사는 “나는 방금 당신의 사형집행 영장에 서명했다”며 “당신은 감옥 밖으로 걸어 나갈 자격이 없다”며 최종 선고를 내렸다. 또 나사르를 향해 “당신에게 이 같은 선고를 내리는 건 내 명예이자 특권”이라는 말을 던지기도 했다. 아퀼리나 판사는 법정에서 자신의 분노를 여과 없이 표출했다. 그녀는 “만약 헌법이 허락했다면 나는 그가 이 아름다운 영혼들에게 한 짓을 그대로 되돌려 받도록 허락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가해자에게 단호한 발언을 이어갔지만 피해 여성들에게는 한없이 따뜻한 모습을 보였다. 그녀는 증언대에 선 여성들을 향해서는 ‘슈퍼 히어로’ ‘살아남은 자들’이라며 그들의 용기를 격려했다. 또 자신들의 피해가 곧 자신의 잘못으로 말미암은 것이라 자책하는 피해자들에게는 “아픔은 여기 남겨두고 밖으로 나가 더욱 위대한 일을 하길 바란다”고 축복하기도 했다. 이처럼 ‘사이다’와 ‘감동’을 넘나드는 아퀼리나의 발언과 그의 판결은 SNS를 통해 퍼지면서 미국 전역의 열광적인 호응을 낳았다. 다만 아퀼리나 판사는 “재판에 관한 기사들이 지나치게 생존자들에게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며 언론과의 공식적인 접촉을 거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판결 이후 미국은 물론, 전 세계에서 그에 대한 인터뷰 요청이 쏟아지자 이에 대해 불편함을 밝힌 것이다. 사건은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하지 재판관인 자신이나 피해자의 이야기에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져서는 안 된다는 것. 한편 범죄소설의 저자이기도 한 아퀼리나 판사는 2013년 디트로이트시의 파산 보호 신청이 주 헌법을 위반했다며 신청 철회를 명령하며 자신의 판결문을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에게 보내 주목을 받은 바 있다. [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