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2월 ‘국정 개입’ 논란의 핵심 인물인 정윤회 씨가 11일 밤 고소인 자격으로 검찰의 고강도 조사를 마치고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검찰청을 나서던 중 취재진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최근 검찰과 국정원 등 사정기관을 통해 포착된 민낯을 종합해 보면 정권 초기에는 최순실 씨 전 남편인 정윤회 씨와 박 전 대통령 동생인 박지만 EG그룹 회장의 힘겨루기로 요약된다. ‘문고리 3인방’을 손에 쥔 정윤회 씨가 주도하긴 했지만 박 회장이 당시 언론에 알려진 것처럼 일방적으로 밀린 상황은 아니었다.
박 회장은 청와대 출입도 하지 않고 목소리를 내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비록 정 씨가 문고리 3인방을 통해 박 전 대통령의 눈과 귀를 장악하고는 있었지만 박 회장도 ‘박지만 라인’으로 분류되는 인사들이 청와대, 검찰, 국정원 등 핵심 권력기관에 포진해 있었기 때문이다. 박 회장은 박 전 대통령에게 정윤회를 멀리하라고 여러 차례 조언했고 이에 정윤회 씨와 3인방은 박 회장을 상당히 껄끄러워 했다는 후문도 들린다. 정 씨는 3인방을 통해 박지만 마타도어 보고서를 올리는 등 끊임없이 견제를 계속 했다고 한다.
박 회장의 힘이 적지 않았다는 증언은 국정원에서도 나온다. 한 국정원 관계자는 “박지만과 가까운 것으로 알려진 육사 출신의 한 직원이 정권 초반 잘나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조직 내에선 큰 집(청와대)이 뒤를 봐주고 있다는 얘기가 돌았다. 남재준 원장도 그를 함부로 하지 못했다고 한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힘의 축은 점점 정 씨 쪽으로 쏠리게 된다. 박 회장은 정 씨가 자신을 미행하려 했다는 보도에 대해 청와대 민정수석실 통해 확인하려 했지만 이 역시 정 씨에게 막혔다. 지난 2014년 5월 남재준 국정원장 경질도 정 씨의 작품이었다. 당시 남재준 전 국정원장의 교체 이유는 유우성 간첩조작사건 책임론 등이었지만 실제 상황은 달랐다. 남 전 원장은 정 씨와 관련된 비선실세 보고서를 청와대에 올렸다가 이틀 만에 전격 경질된 것이다.
정권 초기부터 시작된 갈등이 결국 박 회장이 완전히 밀리면서 정 씨의 승리로 확정된 사건이 터졌다. 바로 지난 2014년 10월 이재수 전 국군기무사령관(중장)의 갑작스런 경질이었다. 이 전 사령관은 중앙고와 육군사관학교(37기) 동기동창인 데다 친분이 두터워 평소 ‘절친’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 이 전 사령관이 임기 1년 만에 갑작스런 경질을 당해 당시에도 논란이 됐다.
군 핵심 보직인 기무사령관 임기가 통상 2년 안팎이었다. 이 전 사령관은 제3야전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장경욱 전 기무사령관이 6개월 만에 교체된 데 이어 박근혜 정부 들어 기무사 수장의 두 번째 불명예 퇴진이었다. 이 전 사령관은 한민구 당시 국방장관과 가까운 것으로 알려져 있어 당시 인사에 그보다 윗선인 청와대가 개입했을 것이란 추측을 가능케 했다. 앞서의 국정원 관계자도 이 추측을 뒷받침해줬다. 그는 “육사 출신으로 군 사정에 밝은 추명호 전 국가정보원 국장이 정 씨 등과 함께 기무사령관 교체를 주도한 것으로 안다”고 귀띔했다.
정 씨와 박 회장의 진검승부에서 박 전 대통령이 정 씨의 손을 들어준 대표적 사례였다. 이후 군에서도 박지만 라인은 추후 인사에서 ‘물 먹는’ 등 몰락이 가속화됐다. 사실상 ‘정윤회 세상’이 됐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정윤회 씨의 독무대는 오래가지 않았다. 먼저 지난 2014년 2월 최순실 씨와 이혼하면서 박 전 대통령과 강력하게 연결됐던 고리 하나가 사라졌다. 여기에 이 전 사령관 경질 약 한 달 뒤에 터진 문건 사태가 결정적이었다고 한다.
공직기강비서관실이 작성한 ‘청 비서실장 교체설 등 VIP측근(정윤회) 동향’이라는 제목의 동향 감찰 보고서를 ‘세계일보’에서 입수해 보도하면서다. 박관천 경정이 작성했다는 이 보고서는 문고리 3인방을 비롯한 박근혜 대통령의 핵심 보좌진을 ‘십상시’라고 일컬으며 비선 실세로 지목했다. 당시 청와대는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문건은 루머이며 청와대 문건 유출은 국기문란”이라고 강하게 비판한 바 있다.
2016년 10월 박근혜 정부 비선실세로 국정농단 의혹을 받고 있는 최순실이 31일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에 출석 하고 있다. 사진=임준선 기자
정 씨가 밀린 자리는 자연스럽게 박 전 대통령과 사적으로 친분이 있는 최 씨 몫이 됐다. 박 회장과 정 씨의 힘겨루기의 끝에 어부지리로 최 씨가 떠오르게 된 셈이다. 최 씨 독무대의 시작은 이 시점이라는 얘기는 최 씨 주변에서도 들을 수 있었다.
또 최순실 씨와 가까운 한 사업가는 “최 씨가 박 전 대통령과 가까운 건 맞지만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정권 초부터 그랬던 건 아니고, 또 그랬다 하더라도 국정을 농단할 수준은 아니었다. 박근혜 패션 등 사적인 부분에서 조언을 했다. 1988년 박근혜 정치 입문 후 중요한 일들은 정윤회와 3인방이 했다. 그런데 정윤회가 밀리고 난 뒤 최순실이 그 역할을 했다. 이러다 사달이 난 것이다. 최순실이 갑자기 세진 권력을 주체하지 못해 휘둘렀고, 사적으로 이용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처음에는 최 씨도 적극적으로 국정에 개입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한 검찰 관계자는 “최순실 지인이 참고인 조사에서 ‘최순실은 원래 정치에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정윤회와 이혼한 후 3인방 등과 자주 어울리면서 눈이 휘둥그레질 만한 정보를 많이 접하더니 이런저런 일에 개입하게 된 것이다. 나랏일을 무슨 동네 아줌마들이랑 미용실에서 수다 떠는 정도로 생각했던 여자다. 최순실을 견제하던 정윤회와의 이혼이 비극의 시작인 것 같다’고 증언했다고 한다”고 귀띔했다.
최 씨를 견제할 세력도 없었고 딱히 대적할 상대도 없었다. 최 씨는 청와대를 제집 드나들 듯하면서 ‘주사 아줌마’를 연결해주고 옷을 만들어 바치면서 견고해져갔다. 이런 구중궁궐 소식은 입을 타고 점점 세간에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수위도 점점 높아져 갔다. 딸인 정유라 씨의 대학교 특례입학과 말을 지원받는 수준에서 재단을 만들어 기업 ‘삥’을 뜯는 대담한 짓까지 서슴지 않았다. 국정농단이 임계선을 넘어갔다.
정치권에 오래 몸담았던 자유한국당 한 관계자는 “박지만 회장은 박정희 정권 중심에서 권력을 지켜봤다. 정 씨는 20여 년간 비서실장으로 박 전 대통령을 보좌해왔다. 둘 다 최소한 권력 주변과 중심에서 그 속성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최순실은 달랐다. 권력의 속성을 모르고 휘두르다 탄핵까지 이어졌다고 본다”고 말했다.
김태현 기자 toy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