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테니스 영웅으로 떠오른 정현. 사진=호주오픈 페이스북
[일요신문] 한국 테니스의 역사가 새롭게 쓰였다. 역대 최고 기록과 동률을 이루더니 이를 넘어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 ‘한국 테니스의 희망’ 정현의 이야기다.
테니스 메이저대회 중 하나인 ‘2018 호주오픈’에 참가 중인 정현은 4강에 진출하며 한국인 역대 최고 기록을 세웠다. 이전까지 최고 기록은 지난 2007년 이형택의 US오픈 16강이었다.
이에 대한민국에는 ‘정현 신드롬’이 일고 있다. TV가 설치된 식당에서는 저마다 정현의 중계를 틀어놓았고,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는 그에 대한 이야기가 빠짐없이 흘러 나왔다. 일각에서는 ‘피겨의 김연아, 수영의 박태환’과 같은 반열에 올랐다는 평가도 나왔다.
호주오픈 8강에서 스트로크를 날리는 정현. 연합뉴스
# ‘돌풍’ 일으킨 호주오픈
2018년 새해를 세계랭킹 58위로 시작한 정현은 이에 따라 첫 메이저대회인 호주오픈 본선에 직행했다. 1회전에서 행운의 기권승, 2회전에서 3-0 완승을 거둔 그는 역대 한국 테니스 선수 최초로 호주 오픈 3회전에 진출한 선수가 됐다. 그의 한 걸음마다 새 역사가 쓰이는 순간이었다.
많은 이들의 이목이 집중된 3회전에서 그는 자신과 함께 투어에서 주목받는 ‘영건’ 알렉산더 즈베레프를 만나게 됐다. 세계랭킹 4위의 강호와의 대결에서도 정현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특유의 끈끈한 플레이 스타일과 집중력으로 역전승을 만들어냈다. 정현의 견고함에 흔들린 즈베레프는 라켓을 부러뜨리며 불만족스러운 감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16강 상대는 최근 10여 년간 ‘최강’으로 군림해 온 노박 조코비치였다. 정현은 이전부터 그에 대한 존경심을 드러내곤 했었다. 조코비치가 지난해부터 부상 등의 이유로 주춤하고 있지만 분명 정현에게는 버거운 상대였다. 정현은 지난 2016 호주오픈에서도 조코비치를 만나 0-3 완패를 당한 바 있었다.
하지만 정현은 특유의 집중력으로 팔꿈치에 통증을 호소하는 조코비치를 물고 늘어졌고, 결국 3-0 완승을 거뒀다. 8강에 진출한 정현은 자신과 함께 이번 대회에서 돌풍을 일으키던 테니스 샌드그랜(미국)까지도 꺾어내며 기어이 4강까지 진출했다.
정현의 준결승 상대는 ‘테니스 황제’ 로저 페더러. 또 한번 대이변을 꿈꿨지만 페더러의 높은 벽을 넘는 데는 실패했다. 발바닥에 물집이 잡혀 힘겨운 모습을 보이던 정현은 결국 2세트 도중 기권하고 말았다. 정현은 16강전부터 진통제를 맞고 경기를 가졌으며 준결승을 앞두고는 양 발에 부상이 심해져 치료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 순탄하지만은 않았던 투어생활
우승을 차지한 2017 넥스트 제너레이션 파이널. 사진=ATP 투어 페이스북
정현은 오래전부터 프로테니스 불모지인 한국에서 ‘희망’으로 평가 받아왔다. 지난 2013년 삼일공고 재학시절 윔블던 테니스대회 주니어 단식 준우승을 차지하며 스타덤에 올랐다. 비록 주니어 무대였지만 세계무대에서 자신의 존재를 알린 그는 한국 테니스의 기대주로 성장해 나갔다. 2012년부터 주니어 대회와 시니어 대회를 병행한 그는 꾸준히 세계 랭킹을 상승시켜 왔다.
2014년 본격적인 시니어 투어 생활을 시작한 그는 그해 1월 547위로 시작한 세계 랭킹을 연말에는 173위까지 끌어 올렸다. 9월 열린 인천 아시안게임에서는 임용규와 남자 복식조를 이뤄 금메달을 목에 걸기도 했다. 운동선수로서 어려움을 겪을 수 있는 군 문제까지 해결하며 탄탄대로에 놓이는 듯했다.
하지만 성장을 거듭해 온 정현에게 시련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15년을 51위로 마무리하며 기세를 올리던 그는 2016년 부상과 부진이 겹치며 슬럼프를 맞았다. 복근, 무릎 등에 부상이 겹치며 세계 랭킹은 100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부상 치료로 2016 리우올림픽 출전도 포기했다.
2016년 하반기 잠시 휴식기를 가진 정현은 2017년 다시 순위를 무섭게 끌어올렸다. 메이저 대회인 프랑스오픈에서 3회전, US오픈에서 2회전에 진출하며 개인 통산 최고 랭킹인 44위까지 오르기도 했다.
2017년 활약의 절정은 11월 열린 ATP 넥스트 제너레이션 파이널이었다. 8명의 참가 선수 중 6번 시드로 대회에 나선 정현은 조별 예선부터 결승전까지 단 한 번의 패배 없이 5전 전승을 거두며 트로피를 차지했다. 특히 대회 참가자 중 가장 랭킹이 높아 1번 시드를 받은 안드레이 루블레프를 조별예선과 결승전에서 만나 2경기 모두 승리를 거둬 기쁨을 더했다. 올해의 활약을 예고하는 신호탄이었다.
정현은 이번 호주오픈에서 세계가 주목하는 선수가 됐고 대한민국 테니스 역사를 새로 썼다. 그는 투어생활 7년차에 접어 들었지만 여전히 만 21세, 1996년생의 젊은 선수다. 이형택이 세웠던 대부분의 한국 테니스 최연소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다. 그의 앞으로의 행보가 더욱 기대된다.
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
총 상금이 골프의 4배? 헉! 우리가 몰랐던 테니스의 세계 # ATP 투어의 돈 잔치 대한민국은 프로테니스의 불모지나 다름없다. 생활체육으로서의 테니스는 널리 퍼져있지만 대중들에게 프로테니스의 세계는 관심사가 아니었다. 다만 정현의 이번 대회 수익이 밝혀지며 화제가 되고 있다. 정현은 4강 진출로 상금 88만 호주달러, 한화로 약 7억 5000만 원을 받았다. 16강전에서 조코비치를 누르고 8강에 진출하며 확보한 상금만 약 3억 8000만 원이다. 프로테니스의 4대 메이저대회, 그랜드슬램으로 불리는 호주오픈의 총 상금은 5500만 호주달러(약 472억 원)다. 우승자에겐 400만 호주달러(약 34억 원)가 주어진다. 테니스가 생소하던 많은 이들이 대회 상금 규모를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최경주, 박세리, 박인비 등의 활약으로 비교적 친숙한 미국남자프로골프(PGA) 투어의 경우 메이저대회인 US오픈의 지난 2017년 총 상금은 1200만 달러(약 128억 원), 우승상금 216만 달러(약 23억 원)였다. 테니스 또한 US오픈이 메이저대회로 분류되는데 총상금 5040만 달러(약 536억 원), 우승상금 370만 달러(약 39억 원) 규모다. 국내 남자프로골프(KPGA) 투어의 경우 가장 큰 규모 대회(제네시스 챔피언십)가 총상금 15억 원, 우승상금 3억 원이다. 그렇다면 정현이 지금까지 투어생활 중 벌어들인 상금 수익은 얼마일까. ATP 투어 홈페이지에 따르면 정현은 이번 호주오픈을 제외한 커리어 내 모든 단식 경기와 복식 경기를 통틀어 170만 9608 달러(약 18억 원)를 벌어들였다. # 테니스 그랜드슬램 골프 투어에도 메이저대회가 있듯이 테니스 또한 메이저대회가 존재한다. 그랜드슬램으로도 불리는 이 대회는 다른 대회에 비해 더욱 긴 역사와 큰 규모를 자랑한다. 테니스 투어의 4대 메이저 대회는 개최 시기 순서로 호주오픈, 프랑스오픈, 윔블던, US오픈이다. 4개의 대회는 각각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대회는 영국 런던에서 치러지는 윔블던이다. 1877년에 시작돼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테니스 대회’라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모든 복장을 흰색으로 통일해야 한다는 특징으로도 유명하다. 선수들의 속옷이나 신발 밑창 색깔 또한 흰색으로 철저히 제한하고 있다. 메이저 대회 중 유일하게 잔디 코트에서 벌어지는 대회다. ‘롤랑가로스’라고도 불리는 프랑스오픈은 클레이 코트에서 열리는 대회다. 대회를 치르는 코트에 깔린 붉은색 흙은 프랑스오픈의 상징이다. 유난히 클레이 코트에서 강한 모습을 보인 라파엘 나달이 좋은 성적을 거뒀다. 그는 커리어 내내 4강에 10회 진출해 10회 모두 우승을 차지하는 괴력을 보였다. US오픈은 1881년부터 시작됐지만 그랜드슬램에는 1967년 마지막으로 포함됐다. 잔디 코트, 클레이 코트를 거쳐 현재는 하드 코트에서 대회가 진행된다. 지난 2007년 이형택이 16강에 올라 역대 최고 성적을 거둔 바 있다. 호주오픈 또한 콘크리트와 고무 등을 이용해 만든 하드 코트에서 경기를 치른다. 이외에도 테니스는 올림픽에 대한 비중을 적게 두는 다른 프로스포츠와 달리 ATP가 올림픽 성적을 세계랭킹에 반영하며 참가를 장려하고 있다. 이에 로저 페더러, 라파엘 나달, 노박 조코비치 등 유명 선수들도 올림픽에 적극적으로 참가한다. 그랜드슬램 4개 대회와 함께 올림픽 금메달마저 획득하면 ‘골든 그랜드슬램’이라 부르기도 한다. [상] |
환희의 그 순간 남긴 한 마디 “Captain, 보고 있나” 정현의 이번 대회 ‘하이라이트 필름’ 중 하나는 세계 최강으로 군림하던 노박 조코비치를 꺾는 순간이었다. 정현은 마지막 포인트에서 조코비치의 에러로 자신의 승리가 확정됐음에도 덤덤한 표정을 지으며 네트를 향해 걸어갔다. 자신의 우상이자 16강 상대였던 조코비치와 손을 맞잡고 나서야 웃음을 지었다. 간단한 대화를 나눈 그는 관중석에 있는 가족과 코치진을 향해 큰절을 했다. 경기 후 코트에서 열린 승리 소감 인터뷰 이후 경기장에서 퇴장하며 카메라 렌즈 위에 한 서명도 화제가 됐다. 정현은 서명과 함께 “Captain 보고 있나”라는 문구를 함께 남겼다. 이는 삼성증권 테니스단 시절 지도를 받은 김일순 감독을 향한 것이었다. 정현은 삼성증권 테니스단에 소속돼 있었지만 삼성그룹이 스포츠단 지원을 축소하며 팀이 2015년 해체했다. 그는 경기 이후 인터뷰에서 “팀이 해체되고 김일순 감독님 마음고생이 심하셔서 위로해 드리고 싶었다”고 사연을 설명했다. [상] |
외롭다던 정현, 이제는 인기남 등극? 팬들 사이에서 화제가된 과거 화보. 사진=르꼬끄 스포르티브 정현의 측근에 따르면 그는 주변에 ‘외롭다’는 토로를 하곤 했다는 후문이다. 친분이 있는 이들이 소셜 미디어에 애인과 함께한 사진을 게시하면 ‘부럽다’는 댓글을 자주 달며 마음을 표현하기도 했다. 또한 한 테니스 전문매체와의 인터뷰가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정현은 당시 인터뷰에서 ‘여성팬 연락이 많이 오지 않나, 여자친구는 있나’ 등의 이성 관련 질문에 단호히 ‘아니다’라고만 답해 팬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정현은 이번 호주오픈 맹활약으로 전국민적 관심을 받으며 스타덤에 올랐다. 이번 활약과 함께 탄탄한 팔근육이 돋보이는 과거 화보가 일부 여성 사이에서 회자되기도 했다. 앞으로 그의 선수 생활뿐 아니라 ‘애정 전선’에도 긍정적인 기류가 흐르지 않을까. [상] |
약시 교정 안경 덕에 ‘교수님’ 닉네임 얻어 정현은 매 경기 안경을 착용하고 경기에 나선다. 안경은 그에게 일종의 트레이드 마크나 다름 없다. 하지만 정현에게 안경은 아픈 기억이기도 하다. 정현과 그의 형 정홍, 두 아들을 모두 테니스 선수로 키워낸 어머니 김영미 씨는 과거 인터뷰에서 “정현의 약시를 조기에 발견하지 못해 치료 목적으로 테니스를 시작했다”고 털어놓은 바 있다. 일찍 테니스를 시작한 형과는 달리 김 씨는 정현이 공부를 하길 바랐다. 그렇지만 정현은 7세가 되던 해 약시 진단을 받았다. ‘초록색을 많이 보면 좋다’는 의사의 조언에 초록색 장막으로 코트가 둘러 싸여 있고 연두색 공으로 경기를 펼치는 테니스를 정현에게 가르쳤다. 약시 교정을 위해 쓰기 시작한 안경이 이제는 프로선수 정현에게 ‘캐릭터’를 부여하고 있다. 해외에서 정현은 팬들로부터 ‘교수님(Professor)’로 불린다. 투어에 정현과 같이 안경을 착용한 선수가 드물기 때문이다. 이번 호주오픈 4강 활약으로 정현은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관심받는 선수가 됐다. 노박 조코비치와의 16강전은 로저 페더러의 경기를 제치고 멜버른 올림픽 파크의 메인 코트에서 열리기도 했다. 그만큼 많은 이들이 ‘교수님’ 정현을 주목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