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듯 귀화 선수들이 증가한 배경에는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금 8개, 은 4개, 동 8개로 총 20개의 메달을 확보해 역대 최고 성적인 종합 4위에 오르겠다는 목표가 있다. 그동안 쇼트트랙, 스피드스케이팅, 피겨스케이팅에서만 메달을 땄던 한국으로선 얕은 동계스포츠의 저변을 해결하기 위해 각 경기단체에서 귀화 선수 영입에 나섰다.
스포츠 무대, 특히 올림픽에서 순혈주의가 사라진 건 오래됐다. 올림픽에 출전하는 나라마다 귀화 선수를 통해 메달 획득에 나섰고, 4년 전 러시아 대표팀은 빅토르 안이란 이름의 안현수를 소치 동계올림픽에 출전시켜 금메달 3개를 확보한 바 있다. 그러나 다른 시각에선 우리말도 제대로 못하고 혈통도 다른 선수가 어떻게 한국을 대표하느냐는 비판도 뒤따른다. 평창올림픽에서 뛰는 귀화 선수들의 사연을 알아봤다.
크로스컨트리 스키와 사격을 결합한 바이애슬론은 선수들이 무게 3.5kg가량 나가는 소총을 메고 크로스컨트리와 같이 일정 거리를 주행하고 정해진 사격장에서 사격한다. 주행 시간과 사격 점수에 따라 최종 순위를 가리는 종목이다. 바이애슬론은 귀화 선수들 중 메달 가능성이 가장 높은 종목으로 꼽힌다.
러시아 태생의 티모페이 랍신은 바이애슬론 러시아 대표를 지낸 기대주다. 연합뉴스
러시아 태생의 티모페이 랍신, 스타로두베찌 알렉산드르(한별), 안나 프롤리나(서안나), 예카테리나 에바쿠모바는 올림픽 출전을 목적으로 지난해 한국으로 귀화했다. 이중 랍신은 2008년부터 2016년까지 러시아 대표를 지냈고 국제 바이애슬론연맹(IBU) 월드컵에서 6차례 우승한 전력의 바이애슬론 스타다. 지난해 귀화 직후 무릎 인대 수술을 받고 힘겨운 재활 훈련을 소화했던 랍신은 올림픽을 앞두고 빠르게 컨디션을 회복 중이다.
랍신이 한국으로 귀화한 배경에는 러시아 대표팀 내 파벌 문제 등이 작용했다. 파벌 싸움에 휘말려 대표팀에 선발되지 못한 상황에서 한국의 귀화 요청을 받아들인 것이다.
스키와 사격을 모두 소화해야 하는 바이애슬론은 경험과 기술이 매우 중요하다. 랍신의 등장은 대표팀의 다른 선수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쳤고, 랍신도 동료들에게 경기 노하우를 알려주는데 앞장서고 있다. 바이애슬론 종목의 사상 첫 메달 획득을 기대하게 만드는 랍신은 최근 열린 월드컵 3차 스프린트에서 8위에 올랐고, 4차 대회에서는 14위를 기록했다.
여자부의 안나 프롤리나는 귀화 1호 선수다. 러시아 대표팀 일원으로 2009년 평창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계주 금메달을 획득했고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 여자 스프린트에서 4위에 올랐다. 그러나 2013년 아들 출산 후 대표팀을 나와야 했던 그에게 한국에서 귀화 요청을 했고 프롤리나는 2016년 3월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태극마크를 달고 뛴 2016년 8월 하계선수권대회에서 프롤리나는 한국 바이애슬론 사상 최초로 스프린트 은메달과 추적 동메달을 획득했다. 2017-2018 BMW 국제바이애슬론연맹 4차 월드컵 여자 추적 경기에선 8위에 오르며 첫 탑10 진입의 기쁨을 누렸다. 예카테리나 에바쿠모바도 기대주로 꼽힌다. 지난해 2월 동계선수권대회에서 여자 개인 15km 5위를 차지했다.
안나 프롤리나와 예카테리나 에바쿠모바의 소속은 전남체육회. 전남체육회는 두 명의 귀화 선수 관련해서 “우리나라의 바이애슬론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러시아 선수들을 영입했다”고 밝혔다. 올림픽 이후의 거취와 관련해선 “선수들이 러시아로 돌아가지 않는 한 우리 소속으로 계속 남는다”면서 “동계체전에도 출전해야 하기 때문에 당분간은 전남체육회 소속으로 활약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이들의 급여는 어디에서 지급하는 걸까. 전남체육회의 한 관계자는 “우린 메달 획득 관련 성과급만을 지급한다. 연맹에서 선수들 급여를 지급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 대답했다.
바이애슬론 러시아 대표를 지낸 안나 프롤리나도 평창동계올림픽에서 태극마크를 달고 메달 사냥에 나선다. 연합뉴스
평창동계올림픽을 앞두고 단일팀 문제로 연일 뉴스의 중심에 있었던 아이스하키 대표팀. 그중 남자 아이스하키 대표팀에는 무려 7명의 귀화 선수가 합류했다. 아이스하키의 변방이나 다름없는 한국에서 사상 처음으로 올림픽 무대에 선을 보이는 남자 아이스하키 대표팀 귀화 선수들 중에는 골리 맷 달튼(32·안양 한라)이 가장 눈에 띈다. 달튼은 2016년 3월 특별 귀화를 통해 한국 국적을 취득, 태극 마크를 달았다. 달튼은 NHL 보스턴 브루인스를 거쳐 세계 2위인 러시아대륙간리그(KHL)에서 3년을 뛴 뒤 2014년 7월 국내 실업팀 한라에 입단했다.
달튼은 야구의 에이스로 비견될 만큼 전력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귀화를 선택하기까지 그도 많은 고민을 했지만 한번 결정한 이상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달튼은 올림픽을 앞두고 열린 미디어데이를 통해 다음과 같은 귀화 소감을 밝혔다.
“우리는 귀화 선수가 되기 위해 많은 시간을 헌신했고, 노력했다. 가볍게 내린 결정이 아니다. 귀화 선수들에 대해 일부 부정적인 여론이 있는 것을 알지만, 그들도 그들만의 의견이 있을 것이다. (귀화한) 우리를 한 명의 대한민국 선수로 받아들여 주는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싶다. 그건 정말 우리에게 큰 의미가 있다.”
달튼은 다리 패드 양쪽과 퍽을 쳐내는 블로커, 그리고 마스크의 뒷부분에도 태극기를 달고 뛴다. “대표팀의 한 선수로서, 그리고 올림픽에 한국 국가대표로 참가할 수 있어 행운이라고 생각한다”는 소감으로 올림픽에 대한 기대감을 드높인 달튼. 흥미로운 건 A조에 속한 한국 남자 아이스하키 대표팀이 조별리그에서 캐나다(1위), 체코(6위), 스위스(7위)와 격돌한다는 사실이다. 캐나다는 달튼의 조국이다.
여자 아이스하키 대표팀도 23명의 올림픽 엔트리 가운데 4명이 귀화 선수다. 박은정, 임진경, 박윤정, 랜디 희수 그리핀은 모두 한국계. 이 가운데 랜디 희수 그리핀은 하버드대 생물학과를 졸업하고 듀크대에서 생물학과 석박사 통합 과정을 이수한 인재다. 한국인 어머니와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지난해 3월 한국으로의 특별 귀화 시험 최종 관문을 통과했다. 2015년 한국의 대표팀 제안을 받고 별다른 망설임 없이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고. 올림픽 출전이라는 꿈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시나리오였다.
아이스댄스 국가대표로 뛰게 된 재미동포 출신 민유라와 미국 출신 알렉산더 겜린도 귀화 선수다. 연합뉴스
겜린은 미국에서 한국으로 입국했을 때 인천공항 직원이 자신을 외국인 입국심사대로 안내했을 때 대한민국 여권을 보이며 “저 한국 사람이에요”라고 말했다는 에피소드를 갖고 있다.
민유라와 겜린은 어렸을 때부터 미국에서 같은 코치로부터 스케이트를 배웠던 사이. 겜린은 여동생을 파트너 삼아 아이스댄스 선수 생활을 시작했지만 여동생이 은퇴하면서 겜린 남매 조는 해체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민유라가 손을 내밀었고 미국에서 태어난 민유라가 한국 국적을 택하자 올림픽을 앞두고 겜린도 귀화를 신청했다.
독일 여자 국가대표 출신인 루지의 아일린 프리쉐는 2016년 12월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프리쉐는 2012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2관왕에 오르며 독일의 유망주로 떠올랐지만 내부 경쟁에 밀리며 2015년 은퇴했다. 평범한 직장 생활을 하던 프리쉐는 썰매에 대한 갈증을 느낄 무렵 대한루지연맹의 귀화 제의를 받고 고민 끝에 귀화를 결심했다.
한국대표팀에 합류한 프리쉐는 한국 루지의 비밀 병기다. 누워서 타는 루지는 썰매 날이 스케이트 날처럼 얇아 미세한 움직임에도 반응하기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몸에 익숙해야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다. 삼겹살과 불고기, 그리고 케이팝을 사랑하는 프리쉐는 경기도에서 창단한 루지팀 소속이다.
한편 4년 전 유일한 귀화 선수 신분으로 쇼트트랙 대표팀에 합류했던 공상정은 한국 태생의 화교 3세였다. 그는 쇼트트랙 여자 3000m 계주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한국에서 열리는 평창올림픽 출전을 위해 강도 높은 훈련을 반복했지만 불의의 부상을 당하며 대표팀의 꿈을 잠시 접었다. 공상정의 아버지 공번기 씨는 ‘일요신문’과의 전화통화에서 “상정이는 부상으로 현재 재활 훈련 중”이라고 말하면서 “평창 올림픽 출전이 무산돼 굉장히 아쉬워하고 있다. 올림픽 출전은 실력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 운도 따라줘야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영미 스포츠전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