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8월 31일 동영상 전문 웹사이트 ‘유튜브’를 통해 공개된 CF를 처음 본 대중들은 아마 당황스럽다는 생각을 먼저 했을 것이다. 분홍색 머리를 양 갈래로 묶은 한 소녀가 무반주로 5초 동안, 다소 심하게(?) 열정적으로 춤을 춘다. 대사는 ‘(과일 이름)톡톡톡 트로피카나’가 전부지만 중독성 있는 멜로디와 혼신의 힘을 다 한 춤 동작으로 대중들에게 황당하면서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모모랜드 주이’라는 이름을 대중에게 확실히 각인시킨 트로피카나 스파클링 광고 유튜브 캡처.
중독성 있는 CF가 대부분 그렇듯 대중들 사이에서 호불호가 갈렸지만 인터넷 커뮤니티마다 “저 여자애가 대체 누구냐”는 질문이 빗발쳤다. 걸그룹 모모랜드의 주이가 그룹의 새로운 센터이자 에이스로 뛰어 오른 데에는 바로 이 CF가 큰 역할을 했다.
모모랜드 팬덤에 신규로 유입되고 있는 이들의 대다수가 주이로 모모랜드를 처음 접했다고 밝히고 있다. 일반적으로 걸그룹의 인기를 책임지는 것으로 알려진 ‘비주얼 멤버’와는 조금 거리가 있는 주이의 급부상은 아이돌 업계에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남성과 여성을 막론하고 아이돌 그룹은 ‘꽃다발 효과’를 따른다. 잘생기고 예쁜 멤버들을 한 그룹에 모아놓고 전체 외모의 플러스 효과를 노리는 것. 개개인으로 보았을 때 다소 매력이 반감되는 멤버가 있다고 하더라도 단체로 묶으면 서로가 서로를 보완해 아름다움이 배가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러 꽃을 모아 놓아도 단연 눈에 띄는 꽃이 있기 마련이다. 흔히 ‘비주얼 담당’이라고 불리는 멤버다. 이들은 무대 대열이나 방송 촬영에서 센터를 차지해 ‘센터 멤버’라고도 불린다. 아이돌은 초반 인지도 잡기에 성공하지 못하면 도태될 수밖에 없다. 이렇다 보니 시각적으로 가장 만족감을 줄 수 있는 멤버를 앞세워 홍보 효과를 누리는 안정적인 방법을 선택해 왔다.
AOA의 단체 사진. 정중앙에 설현이, 그 왼쪽에 초아가 자리잡고 있다. 사진=FNC엔터테인먼트
AOA의 경우 비주얼 멤버인 설현을 센터로 내세웠다.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인지도 몰이에 앞장섰던 것도 설현이었다. 이후 활동에서 또 다른 비주얼 멤버인 초아가 급부상하면서 AOA 팬덤 내 인기 순위 양대 산맥으로 설현과 초아가 손꼽히며 대중들에게 이름을 알렸다. 이른바 ‘하드 캐리(사안을 확실한 승리 또는 성공으로 이끈다는 뜻의 신조어)’ 멤버다.
대형 엔터테인먼트의 경우도 ‘비주얼 멤버=최상위 인기 멤버’라는 공식을 깨트리지 못했다. SM엔터테인먼트의 걸그룹 레드벨벳, F(x), 소녀시대의 경우도 각각 아이린, 설리(전 멤버), 윤아의 비주얼 라인을 먼저 앞세워 대중들에게 그룹 존재를 각인시켜 왔다. 이후 그룹 전체가 충분히 인지도를 높이고 나서도 대중은 물론 팬덤 내에서도 이들 비주얼 멤버의 인기는 다른 멤버들과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다.
JYP엔터테인먼트의 미스에이는 비주얼 멤버이자 센터로서 남성 팬들의 인기를 독식했던 수지와 다른 멤버의 인지도와 활동이 큰 차이를 보였다. 드라마, 영화를 오가며 ‘첫사랑’ 이미지로 뭇 남성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수지는 명실상부 미스에이의 얼굴이자 에이스였다. 소속사 역시 막강한 팬덤과 인지도를 얻은 수지를 전폭적으로 지원하게 됐고, 이는 결국 다른 멤버들의 재계약 거부와 그룹 해체라는 결과를 낳게 됐다.
앞선 모모랜드의 경우도 원래 소속사가 센터로 내세웠던 비주얼 담당 멤버는 막내인 낸시였다. 미국 혼혈로 뮤지컬과 예능 무대를 넘나들며 가장 어린 나이임에도 꾸준히 인지도를 쌓아온 멤버기도 하다. 모모랜드로 데뷔 직후에는 그룹 자체보다 낸시 개인의 인지도가 더 높았을 정도다.
모모랜드의 단체 사진. 비주얼 멤버들이 주로 서는 정중앙(센터) 자리에 낸시(가운데 모자 착용)와 주이(오른쪽 네 번째 노란 머리)가 함께 있다. 사진=더블킥엔터테인먼트
그러나 주이의 ‘트로피카나’ CF가 대중의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면서 비주류 외모의 멤버가 비주얼 멤버를 압도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후 각종 예능프로그램을 섭렵하며 새롭게 에이스로 급부상한 주이의 인지도 몰이로 모모랜드는 지난 1월 11일, 데뷔 1년 반 만에 엠넷 ‘엠카운트다운’ 1위의 자리에 오르게 됐다.
업계에서는 이 이변에 대해 “신선하다”는 반응이 주를 이뤘다. 한 중소 연예기획사 홍보팀장은 “일반적으로 걸그룹은 무조건 가장 예쁜 애를 센터에 세워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고, 초반 인지도를 잡은 이후에도 그들을 중심으로 그룹이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다. 팬덤에 남성 팬들이 많은데다 그들이 멤버들의 외모에 매우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렇다 보니 걸그룹 계에서는 팬덤 내 가장 외모가 뛰어난 멤버가 곧 가장 인기가 많은 멤버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다. 그는 “보이그룹의 경우는 팬덤 내 인기 멤버와 대중들이 꼽는 인기 멤버가 다르다. 비주얼만으로 판단하기보다는 ‘볼매(볼수록 매력있다)’ 멤버를 선호하는 여성 팬들의 특성 때문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또 다른 연예기획사 홍보팀 관계자는 “신인 아이돌 그룹이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눈에 띄기 가장 쉬운 비주얼 멤버를 앞세워 방송마다 ‘돌리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다. 괜히 이 멤버들을 보고 그룹을 책임지는 ‘소년소녀가장’이라고 표현하는 게 아니다”라면서도 “비주얼을 민감하게 따지는 대중과 팬덤 내에서도 비주류에 속하는 주이가 인지도 원톱으로 그룹을 이끄는 것을 신기하게 보면서도 한편으로는 새로운 생존 전략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아마 걸그룹 팬덤 내에서도 볼매 멤버를 선호하는 여성 팬들이 증가하면서 업계의 판도도 변하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