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5일 오후 서울구치소를 나서고 있다. 이 부회장은 이날 항소심에서 징역 2년 6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고성준 기자
이 부회장의 석방은 정치권은 물론 재계와 법조계도 예상 못한 ‘파격’이었다. 전례 없는 재벌 개혁 여론이 탄력을 받는 상황에서 이 부회장에 대한 감형은 ‘재벌 봐주기’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또 사법부는 이번 정부 들어 ‘판사 블랙리스트’ 파문 등에 휩싸이며 내부 적폐 청산 요구를 받았다. 법조계 안팎에선 전·현직 고위 법관들의 비리 의혹이 담긴 소위 ‘ㅇㅇㅇ파일’이 사법 개혁의 신호탄이 될 것이란 소문이 무성했다.
이 부회장에 대한 선고를 앞두고 청와대 사정에 밝은 한 인사는 “민의가 곧 법리가 될 때도 있다”라며 “이 부회장을 풀어주면 사법부가 과연 그 뒷감당을 할 수 있겠느냐”라고 말했다. 재계 관계자도 이 부회장의 석방 가능성을 낮게 점치면서 “내가 알기로 태평양(이 부회장 측 변호인단)의 목표는 징역 3년 안팎”이라며 “대법원 판결 전까지 JY(이재용 부회장)가 조금만 더 버티면 집행유예에 대한 당위성이 생기고, 성난 민심도 일부 달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그러나 법원은 예상을 뒤엎고 이 부회장에게 ‘면죄부’를 내렸다. 법원은 삼성 사건의 핵심 쟁점으로 꼽히던 뇌물 공여의 대가성 여부에 대해 “삼성은 정권의 피해자”라는 이 부회장 측 주장을 받아들였다. 항소심 재판부는 “이 부회장이 뇌물 공여 대가로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어떠한 이익을 요구하거나 취득한 증거가 없고, 전형적인 정경유착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라며 “국정농단 사건의 주범은 박근혜 전 대통령과 그 위세를 등에 업어 사익을 추구한 최서원(최순실)으로 보아야 한다”고 판시했다.
또 재판부는 최순실 특별검사팀(특검)이 공소장에 포함한 삼성의 ‘승계작업’과 ‘부정청탁’에 대해 “(삼성물산 합병이) 이 부회장에게 직간접적으로 유리한 효과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지만 경영상 필요 또는 합목적성도 존재한다”라며 “뇌물공여에 대한 비난과 책임을 이 부회장 개인에게만 집중시킬 수 없다”고 밝혔다. 즉 법원은 이 부회장이 최순실과 달리 사익을 추구하지 않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법원 판결 후 정치권과 시민단체에선 비난이 줄을 이었다. 최순실 특검은 즉각 입장문을 내고 “법원에서 정의가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를 기대했는데 너무 안타깝다”며 “법원과 견해가 다른 부분은 상고하여 철저히 다투겠다”고 밝혔다. 재계에서조차 “삼성의 힘을 확인했다”는 자조 섞인 반응이 나왔다. 재계 고위 관계자는 “1심과 180도 다른 판결에 개인적으로 놀랐다”라며 “정부와 어느 정도 공감대가 있지 않고서야 어느 판사가 이런 판결을 내릴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삼성 안팎에선 이 부회장이 던진 법정 밖 ‘승부수’가 재판부의 판결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이 부회장은 이번 선고를 앞두고 1심이 유죄로 인정한 횡령액 80억여 원을 전액 변제했다. 일반 재판에서 횡령 사건 피의자가 피해액을 변제하면 재판부는 이를 양형에 반영한다. 실제 법원은 이 부회장에 대한 집행유예 선고 과정에서 “피고인(이 부회장)이 원심에서 유죄로 인정한 횡령액 전부를 삼성전자에 반환하여 피해를 회복하였다”고 판시했다.
삼성전자 액면분할도 같은 맥락에서 “사전 기획됐을 것”이란 꼬리표가 붙는다. 삼성전자는 지난달 31일 주당 액면가액을 50분의 1로 낮추는 파격적인 액면분할 계획을 밝혔다. 당시 삼성전자는 “액면분할로 더 많은 사람이 삼성전자 주식을 보유할 기회가 생기고, 그에 따른 배당 혜택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해당 공시가 발표된 시점과 이 부회장의 선고일이 불과 1주일 차이인 까닭에 뒷말이 끊이지 않았다. 앞의 재계 관계자는 “오너 입장에서 액면분할을 하면 지분 매입에 돈이 많이 들어 경영권 승계가 어려워질 가능성이 있다”라며 “이번 발표는 삼성 오너의 지배구조를 문제 삼는 정부에 더는 승계작업을 하지 않겠다는 메시지를 전달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삼성 사정에 밝은 한 인사도 “이 부회장이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때와는 다른 방법으로 경영하고 싶어한다”며 “삼성전자를 주축으로 ‘이사회 중심 경영’을 그룹에 뿌리내리려 한다”고 주장했다.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서초사옥. 고성준 기자
재계 관계자 및 삼성전자의 설명을 종합하면 이 부회장은 옛 총수 중심 지배구조 강화와 ‘원격 경영’ 대신 적은 지분으로도 각 이사회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이른바 ‘이사회 중심 경영’에 일찍부터 관심을 기울였다. 삼성전자를 포함한 각 회사가 자율적인 이사회를 구성해 이사회 안에서 모든 의사결정을 책임지는 비교적 이상적인 시스템이다.
특히 ‘이건희 체제’의 유산인 미래전략실을 없애고 필요한 경우 자신이 직접 각 회사의 등기임원이 돼 전문경영인으로 인정받겠다는 것을 기본 구상으로 하고 있다. 앞의 삼성 사정에 밝은 인사는 “올해 안에 삼성 경영 시스템의 획기적인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삼성경제연구소의 경영 컨설팅을 기초로 삼성물산, 삼성생명, 삼성화재 등 핵심 계열사에 대한 지분 정리 또는 구조조정이 실행될 가능성이 점쳐진다. 정부가 요구하는 순환출자 고리 해소도 그대로 따르겠다는 것이 삼성의 입장이다.
재계 일각에선 삼성의 오너 리스크가 여전하다는 것에 우려를 제기한다. ‘경제 검찰’로 불리는 공정거래위원회는 삼성의 불안정한 지배구조와 공익재단 편법 운영에 대해 감시를 지속하고 있고, 국세청은 삼성 경영 승계의 최대 난관으로 꼽히는 상속·증여 부분에 대해 언제든 조사할 채비를 하고 있다. “승계작업은 없다”는 삼성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대법원이 삼성의 승계작업을 인정하면 이 부회장의 선고 결과는 또 다시 뒤집힐 수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1심 선고도 이 부회장의 명운을 가를 변수로 지목된다.
앞의 재계 고위 관계자는 “이 부회장에 대한 이번 판결에는 사실상 국가 경제성장을 견인해달라는 무언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라며 “최근 문재인 대통령이 일자리와 관련해 한화와 현대차를 잇달아 방문한 것에 힌트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결국 문제는 경제 살리기와 일자리 창출”이라며 “삼성은 재계의 ‘맏형’인데 그동안 역할을 못했던 부분이 있고, 앞으로도 이건희 회장의 유고가 부담이 될 것으로 보이는 만큼 4대 그룹과 함께 공개 모임을 만들어 정부와 허심탄회하게 소통하는 자리를 가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당장 삼성은 이번 평창동계올림픽이 끝날 때까지 대회 메인 스폰서 자격으로 선수단과 조직위원회, 언론 등을 후원할 것으로 알려졌다. 성공적인 대회 개최에 심혈을 기울이는 정부로서는 삼성이 쌓아올린 글로벌 네트워크가 일부 필요할 수 있다. 그러나 이번 올림픽에 공식 초청된 이명박 전 대통령처럼 삼성의 참여가 이 부회장의 면죄부를 의미하진 않을 것이란 지적이 나온다. 삼성은 이 부회장 석방 다음날인 지난 7일 경기 평택에 30조 원을 들여 반도체 공장을 짓겠다고 밝혔다.
강현석 기자 angeli@ilyo.o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