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흐를수록 버스에는 특별한 장치들이 등장했습니다. 과거 ‘버스안내양’이 뒷문을 열고 닫다가, 갑자기 자동문이 생겼습니다. 안내양의 “이번 정류장은~”이란 안내는 음성방송을 거쳐 전광판이 대신했습니다. 최근엔 짧은 뉴스나 각종 영상 및 광고까지 보여주는 ‘버스 TV’가 그자리를 꿰찼습니다.
현재까지 ‘버스 TV’ 설치는 점점 늘어나 서울시내버스 약 7500대 중 4600대(2016년 9월 기준)에 TV가 설치되어있습니다. 소리가 나오지 않아 전통적인 TV 개념은 아니지만, 엄연히 방송이 나오는 TV입니다.
그런데 최근 ‘버스 TV’를 두고 실효성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특히 서울 시민들 사이에서는 “제 역할도 못하는데, 뭐 하러 설치했느냐”는 불평이 터져나오고 있습니다. ‘일요신문i’가 버스에 직접 올라타서, 시민들의 목소리를 들어봤습니다.
202번 버스 안 내부 전경. 일요신문 DB
2월 5일 아침 7시 30분경, 온도계는 영하 15도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기자는 버스 정류장에서 혹한의 추위를 견디다가 202번 버스(불암동↔후암동)에 올라탔습니다. 버스에는 승객들이 가득했습니다. 옴짝달싹 할 수 없었습니다.
버스에 있는 봉들에 몸을 간신히 기댄 채 한숨을 돌린 뒤, 운전기사 쪽에 있는 TV를 봤습니다. 하지만 TV를 주목하고 있는 승객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TV 화면에서는 서울시의 ‘미세먼지 대응요령’과 관련된 내용이 나오고 있었지만 승객들은 대부분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습니다. 도대체 이유가 뭘까요?
서울시 내일연구소의 광고 화면, 연예인 장윤주가 모델로 나온다. 일요신문 DB
김 아무개 씨(66)은 “TV를 본 적은 없다. 정류장 안내도 나오지 않고, 그림이 나오는 광고만 계속 나온다. 소리가 안 나와서 답답한데, 글씨도 작아 화면에 있는 자막도 보이지 않는다. 버스안내를 들려주는 음성방송하고 TV화면이 엇박자가 나서 집중하기도 어렵다. 차라리 없는 게 낫다”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TV 화면 속에서는 광고가 계속 나오고 있었습니다. 서울시의 미세먼지 대응요령 안내 방송이 끝난 순간, 성형외과 광고가 약 20초간 나왔습니다. 그 광고에 이어 운동요령을 설명하는 방송이 이어졌지만 약 3분이 흐른 뒤 끝났습니다. 곧이어 서울시의 내일연구소의 정책광고가 나왔습니다.
특히 내일연구소의 광고는 맥락을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인기 연예인 장윤주가 사람들과 함께 등장할 때마다, ‘국공립 어린이집 확충’ , ‘찾아가는 동주민센터’ 등의 문구가 나오지만 도무지 어떤 광고인지 파악할 수가 없었습니다. 구체성이 떨어져 보였습니다.
버스 TV에 나온 성형외과 광고. 박정훈 기자
이런 방식으로 202번 버스 TV에서는 ‘미세먼지 대응요령’-‘성형외과 광고’-‘운동요령 방송’-‘정책광고’가 무한히 반복됐습니다. 버스 TV가 출근길부터 승객들의 외면을 받고 있는 이유입니다. 온갖 광고에 대한 노출 덕에, 승객들의 피로감도 상당하다는 볼멘소리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서울시 교통정책과 관계자는 “광고가 과다하다는 지적에 대해 공감한다. 시와 버스조합이 논의하고 버스조합이 공개입찰 절차를 밟아 영상광고를 하고 있다. 콘텐츠의 다양화를 검토 중이기 때문에 개선될 것이다”고 답변했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버스는 어떨까요? 2월 7일 오전 10시경 기자는 472번(개포동↔신촌역) 버스를 탔습니다. 버스 안에는 승객 7명이 있었습니다. 출근길이 조금 지난 시각이기 때문에 한가한 분위기가 느껴졌습니다.
472번 버스가 정류장으로 들어오고 있다. 박정훈 기자
472번 버스에서도 TV를 보는 승객들은 없었습니다. 의자에 앉아 잠을 자거나 스마트폰을 보고 있을 뿐, 고개를 들어 버스 TV를 보는 이들을 찾기 어려웠습니다. 정류장에서 새로 탑승한 시민들도 습관처럼 TV를 지나쳤습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곳에서도 광고 문제가 심각했습니다. TV 화면에서는 ‘그 시절 추억의 시간이 찾아옵니다’라는 자막과 함께 세계명작 극장전 홍보를 위한 광고가 끊임없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약 10분 이상이 흘렀지만 광고 화면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472번 버스 내부 전경. 박정훈 기자
472번 버스 승객들은 TV 화면 아래쪽에 표시된 자막에 대해서도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이 아무개 씨(여․29)는 “미세먼지와 관련된 날씨 안내는 괜찮지만, 자막의 글씨가 너무 작다. 어르신들이 많이 불편할 것 같다. 버스 뒤편에서는 자막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광고 화면의 비중을 줄이고 글씨 크기를 크게 했으면 좋겠다”고 밝혔습니다.
472번 버스 TV 화면, 운동요령을 알려주는 방송이 나온다. 박정훈 기자
김 아무개 씨(28)는 “운동 방송이 유용해서 곧잘 참고를 하지만, 화면 아래쪽에 실시간 뉴스가 잘 보이지 않는다. 경기도처럼 버스 뒷문에도 TV를 설치하면 좀 나아지겠지만 비용이 많이 들 것 같다”라고 덧붙였습니다.
버스 뒤편에서 TV까지 거리는 약 4m. 기자가 버스에 탑승한 약 20분 동안, 중요한 뉴스가 자막으로 흘러나왔지만 글씨는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472번 버스 왼편 좌석에서 찍은 사진, 화면이 보이지 않는다. 박정훈 기자
문제는 또 있었습니다. 버스 왼편 좌석에 앉으면, TV를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습니다. 버스에 설치된 손잡이와 기둥이 버스 화면을 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472번 버스 왼편 좌석에 앉아있던 이 씨는 “여기서는 잘 안 보인다. 손잡이 두 개 정도만 없애면 될 것 같은데… 왜 그쪽에 설치했는지 모르겠다”고 밝혔습니다.
6211버스 내부 전경(좌)와 버스 사진. 박정훈 기자
6211번 버스(신월동↔상왕십리역)의 상황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버스 봉들이 화면을 가린 사진이 보이시나요? 김 아무개 씨(여․38) 씨는 “손잡이와 봉 때문에 도저히 TV를 볼 수가 없다”라면서 “시야 확보가 될 만한 공간이 버스에 없는 데다, 너무 높은 곳에 있어서 앞쪽에서는 더욱 보기 힘들다”라고 밝혔습니다.
이에 대해 서울시 교통정책과 관계자는 “버스라는 한정된 공간에서는 적정한 위치에 TV를 달기가 어렵다. 통로에 설치하면, 시민들이 카드를 찍을 때 불편하다”며 “중간 통로에 놓으면 머리에 닿아서 안 보인다. 나름대로 고민을 거친 끝에 운전석 뒤편에 설치한 것이다”고 설명했습니다.
시 관계자의 말대로, 진정 TV 위치는 ‘최선’일까요? 노인들도 TV 시청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교통약자석에서 TV를 도저히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통약자석은 노약자 임산부 등을 위한 공간으로, 버스의 앞쪽에 설치돼있습니다. 교통 약자석에 앉은 노인들이 TV를 보기 위해서는 고개를 뒤로 젖혀야 합니다.
6211버스 교통약자석(아래)과 버스 TV. 박정훈 기자
황 아무개 씨(78)는 “버스를 탈 때마다 뭔가 번쩍번쩍해서 신경이 쓰인다. 하지만 본 적은 없다. 버스에 TV가 왜 있어야 하는지 모르곘다”며 “교통약자석에서 TV를 보려면, 고개를 들고 봐야 한다. 근육에 무리가 가서 너무 피곤하다”고 밝혔습니다.
버스는 ‘시민의 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지만, TV가 오히려 시민들의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과도한 광고 방송, 시야 확보의 어려움, 뉴스 자막의 작은 글씨 때문에 시민들에게 외면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누구를 위한 TV일까요?
최선재 기자 s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