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블록체인 기술에 큰 관심을 보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은 삼성전자 서초사옥. 고성준 기자
이 부회장의 기대와 달리 삼성의 블록체인 R&D(연구·개발)는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했다. 삼성은 오너가 구속된 지난해서야 그간의 R&D 성과를 내놓기 시작했다. 삼성 내에서 블록체인 사업을 주도하는 곳은 IT업체인 삼성SDS다.
삼성SDS는 삼성전자가 지분 22.58%, 삼성물산이 지분 17.08%를 보유해 각각 1, 2대 주주에 올라 있다. 이 부회장 본인도 지분 9.2%를 갖고 있어 삼성 승계작업의 핵심 회사로 지목된다. 2014년 11월 기업공개(IPO)를 마친 삼성SDS는 상장 초기 주당 40만 원대까지 주가가 급등했지만 이후 낮은 이익률에 따른 주식 고평가 논란이 일면서 지난해 초 10만 원대까지 급락했다.
그런데 ‘4차 산업혁명’ 열풍에 힘입어 지난해 3월부터 삼성SDS의 주가는 반등했다. 지난 8일 종가 기준 삼성SDS 주식은 23만 6000원에 거래되며 최초 공모가인 19만 원을 웃돌았다. 국내 최대 기관투자자인 국민연금도 지난 1월 삼성SDS의 지분율을 5%까지 끌어올렸다. 같은 달 17일 하이투자증권은 ‘컴퍼니리포트’(이상헌·조경진 연구원)를 통해 “4차 산업혁명과 관련하여 동사(삼성SDS)의 성장성이 부각될 수 있을 것”이라며 “블록체인, 스마트팩토리, 빅데이터 분석, 인공지능(AI), 클라우드, 스마트물류 등 신규사업이 확대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지난해 삼성SDS는 기업용 블록체인 플랫폼인 넥스레저를 출시했다. 은행연합회의 도움을 얻어 국내 시중은행 16곳과 함께 넥스레저 기술을 이용한 공동인증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또 해양수산부, 관세청, 현대상선, 한국IBM 등과 함께 해운물류 부문에 블록체인을 적용하는 시범 프로젝트를 운용하고 있다. 삼성은 향후 넥스레저의 적용 분야를 금융·물류에 국한하지 않고 제조·바이오부문까지 확대할 것으로 전망된다.
삼성 안팎에선 폐쇄적 플랫폼인 넥스레저와 다른 ‘개방형 플랫폼’의 개발 필요성도 언급된다. 삼성SDS는 지난달 31일 회사 비전으로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 리더’를 발표하고, 오는 2020년까지 글로벌 회사로 도약하기 위한 기술 혁신을 이루겠다고 밝혔다. 특히 홍원표 삼성SDS 대표는 최근 내부적으로 블록체인 사업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법무부가 가상화폐 거래소 폐쇄 방침을 밝힌 지난달 12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에 위치한 가상화폐 거래소 ‘코인원블록스’를 찾은 시민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현재 온라인상에서는 법무부의 가상화폐 거래소 폐쇄 방침을 놓고 찬성과 우려의 목소리가 대립하고 있다. 고성준 기자
앞서 이 부회장은 블록체인 기술의 알고리즘인 ‘개방성’에 주목한 것으로 알려졌다. 재계에선 이 부회장이 유독 블록체인에 애착을 갖는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 옛 미래전략실의 폐단을 언급하기도 한다. ‘이건희의 유산’으로 불리는 미래전략실은 중앙집중적 의사결정이 특징이다. 복수의 재계 관계자는 “이 부회장이 그간 미래전략실 중심의 수직적 조직 운영을 달갑지 않아 했다”고 말했다.
실제 삼성은 올해부터 ‘이사회 중심 경영’을 확대하고, 각 계열사의 책임경영을 강화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삼성 각 계열사가 유기적으로 연결돼 경영에 따른 책임을 분산하는 시스템은 블록체인의 알고리즘과 거의 일치한다. 삼성 측은 “선진경영기법을 도입해 잘못된 의사결정을 줄이겠다는 의도로 해석하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삼성의 블록체인에 대한 투자가 본격화되면서 금융투자업계에선 소위 ‘삼성코인’의 출시 가능성을 놓고 설왕설래가 한창이다. 암호화폐(가상화폐)의 기술적 토대가 블록체인이기 때문에 블록체인 기술이 발전하면 자연스레 암호화폐를 발행할 수 있다. 또 삼성전자는 최근 비트코인 채굴에 특화된 반도체를 대량 생산하기로 하면서 시장의 기대감을 높였다. 금융권 한 인사는 “비트코인을 사는 것은 결국 해당 블록체인 기술에 투자하는 것과 같다”며 “지금은 비트코인 등 여러 암호화폐가 난립하지만 기술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몇 년 뒤 지금의 가치를 인정받을 화폐는 많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미 세계 블록체인 스타트업들은 ICO(Initial Coin Offerings)를 통해 자사가 발행한 암호화폐로 신규 투자금을 조달하고 있다. 그러나 암호화폐가 실물 경제와 유리돼 있기 때문에 금융권을 중심으로 “암호화폐 투자는 본질적으로 도박에 가깝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때문에 기술력이 낮은 스타트업과 경쟁력이 떨어지는 암호화폐가 시장에서 퇴출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그 대안으로 실물 경제에 토대를 둔 초국적기업이 암호화폐를 직접 발행하거나 특정 암호화폐에 대량 투자할 수 있다는 관측이 꾸준히 제기됐다. 이미 세계적인 필름업체 코닥(KODAK)은 자체 개발한 코닥코인을 선보이기도 했다. 업계에선 세계적인 네트워크와 플랫폼을 갖춘 아마존, 구글과 같은 글로벌 IT업체가 암호화폐를 발행할 수 있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삼성으로서는 만약 자체 개발한 블록체인이 국내외 전자상거래에 쓰이고, 기존 사물인터넷 기술이 발전하면 자사만의 글로벌 플랫폼을 구축할 수 있다. 이 상황에서 삼성코인이 출시되거나 특정 암호화폐의 이용을 강제하면 플랫폼 사용자들은 따를 수밖에 없다. 현재 삼성전자는 암호화폐 이더리움을 기반으로 하는 블록체인 연합체 ‘이더리움 기업 연합(EEA)’에 가입돼 있다. 다만 삼성 측은 아직까지 직접적인 암호화폐 발행 또는 투자와 거리를 두고 있다. 삼성 사정에 밝은 앞의 인사는 “일단은 블록체인을 내부 구현해 삼성만의 플랫폼을 만드는 것이 과제”라고 말했다.
강현석 기자 angeli@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