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감독원의 현장검사로 은행들의 채용비리 정황이 드러났다. 사진은 서울 중구 KEB하나은행 을지로 신사옥 앞에서 시민단체 회원들이 채용비리 규탄 집회를 하는 모습. 연합뉴스.
금융감독원(금감원)은 2017년 12월부터 2개월간 11개 은행을 대상으로 현장검사를 실시해 총 22건의 채용비리를 적발했다. 그 결과, KEB하나은행이 13건으로 가장 많았으며 KB국민은행과 DGB대구은행이 각각 3건, 부산은행이 2건, 광주은행이 1건으로 나타났다. 채용전형·점수 조작, 채용인원 변경, 학벌 차별 등 유형이 다양했다.
KEB하나은행은 2016년 청탁을 받고 6건의 특혜채용을 한 의혹을 사고 있다. 필기전형·1차면접에서 최하위점을 받은 거래처 사외이사 지인에 대해 전형공고에 없던 ‘글로벌 우대’를 적용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해당 지인은 임원 면접 점수 임의조정으로 최종 합격했다. 계열 카드사 사장 지인도 비슷한 방식으로 합격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명문대 출신자의 면접점수를 올리고 합격권 내에 있는 여타 대학 출신자 점수를 내려 합격·불합격을 조작한 정황도 7건이나 된다. 금감원 조사에 따르면, KEB하나은행 인사부는 임원 면접이 종료된 후 서울·연세·고려·위스콘신대 출신 지원자 7명의 점수를 임의로 올려 합격시켰다. 반대로 한양·가톨릭·동국·건국대 등 여타 수도권 출신 지원자 7명의 점수는 깎아 불합격 처리했다.
KB국민은행(국민은행)도 다를 바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민은행은 2015년 채용 과정에서 전 사외이사의 자녀가 서류전형에서 840등으로 공동 최하위점을 받자 이를 통과시키기 위해 서류전형 합격자 수를 확대했으며 최종 합격까지 보장했다. 윤종규 KB금융그룹 회장의 종손녀(윤 회장 누나의 손녀), 최고경영진 중 한 명의 조카 등에 대해서도 서류전형과 1차면접에서 최하위권을 기록했지만 2차면접에서 최고 등급을 부여해 최종합격선에 이르게 했다. 금감원은 KEB하나은행과 KB국민은행이 채용 청탁에 따라 각각 55명, 20명을 별도 관리하는 이른바 ‘VIP리스트’도 만든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대구은행은 인성점수가 합격기준에 미달해 불합격 처리돼야 마땅한 임직원 등의 자녀 3명을 간이면접에서 정성평가 최고 점수를 부여해 최종 합격시킨 의혹을 사고 있다. 이 중 박인규 DGB금융지주 회장의 운전기사 자녀도 포함된 것으로 전해진다.
부산은행은 전 정치인 자녀 2명을 합격시키고자 사전에 입수한 가족관계 정보 등을 면접위원에게 전달, 채용 인원을 임의로 늘린 의혹을 사고 있다. 광주은행은 인사담당 부행장보가 자녀의 임원면접 면접관으로 참여해 고득점을 주면서 합격시킨 의심을 받고 있다.
금감원은 이 같은 채용비리 정황과 함께 ▲블라인드 채용 미이행 ▲명확한 채용평가 기준 부재 ▲전문계약직 채용에 대한 내부통제 미흡 사례 등도 검찰에 넘겼다. 금감원은 이 같은 정황이 사실로 드러날 경우 엄중조치를 취하겠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채용 비리가 가장 심각하게 드러난 곳은 현재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우리은행이다. 우리은행은 2015년 10명, 2016년 19명, 2017년 8명 등 지난 3년간 무려 37명을 부정 합격시켰다.
지난해 10월 17일 심상정 정의당 의원이 공개한 ‘2016년 우리은행 신입사원 공개 추천현황 및 결과’ 자료에 따르면, 당시 150여 명의 신입사원 중 10%에 해당하는 16명이 채용특혜를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그 중엔 국정원, 금융감독원, VIP 고객 등의 자녀와 친인척 그리고 지인들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2016년 우리은행 신입사원 공채 추천현황 및 결과 자료. 심상정 정의당 의원실 제공
해당 자료를 보면 추천인, 성별, 출생연도, 출신학교 등이 포함돼 있다. 그간 은행들이 강조한 ‘블라인드 채용’에 회의적인 목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다. 눈에 띄는 점은 ‘여신 740억’, ‘신규여신 500억 추진’, ‘퇴직연금 41억’, ‘RAR 9억’ 등 영업실적을 기재한 비고란이다. 이 때문에 우리은행 특혜채용이 고객의 은행거래 대가로 이뤄졌다는 해석이 나오기도 했다. 이미 이광구 전 우리은행장과 5명의 전·현직 임직원들은 부정채용에 관여한 업무방해 혐의로 기소된 상태다.
금융권 채용비리는 시중은행에 국한하지 않는다. 이를 관리·감독해야 할 금융당국도 채용비리를 저지른 것으로 나타났다. 2015년 9월 5급 직원 채용 당시 금감원은 앞서 사례처럼 합격자 수를 늘려 필기시험 탈락자였던 고위간부의 지인을 구제했다. 이후 최종면접에서 높은 점수를 주면서 최종 합격시켰다.
지방인재 10% 내외 채용 조항을 악용하기도 있다. 대전 소재 대학교 출신이라고 속인 서울 소재 대학 출신 지원자를 지방인재로 분류해 합격시킨 것이다. 전형 과정에서 충분히 허위 여부를 가릴 수 있었지만 살펴보지 않은 것이다.
합격자를 대상으로 당초 계획에 없던 세평(평판조회)을 실시해 3명을 탈락시키고, 지원분야도 다른데다 예비후보자보다 후순위였던 지원자를 합격시킨 사례도 있다. 금감원은 또 경영학 분야에선 세평에 이상이 없는 후보자를 탈락시키고, 부정적 세평을 받은 후보자를 합격시키기도 했다. 2016년 상반기 민원처리 전문지원 채용 시에는 합격자를 자의적으로 조정하기도 했다.
금융권의 이 같은 채용비리는 국민들에게 큰 실망감을 주고 있다. 특히 가뜩이나 취업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인 현실에서 취업준비생들이 느끼는 허탈감과 상실감은 어마어마하다. 매년 합격권에 있던 지원자들이 부정 합격자들 때문에 고배를 마셔야 했기 때문이다.
금융권 취업을 준비하고 있는 취업준비생들은 하나같이 “허무함과 분노가 크다”고 성토한다. 금융권 취업에 수차례 실패한 바 있는 A 씨는 “설마 했던 일들이 들려올 때마다 힘만 더 빠지고, 정말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대구가 고향인 취준생 B 씨는 올 설을 앞두고 불공정한 현실 탓에 마음만 더 씁쓸해졌다. B 씨는 “채용특혜를 받는 고위급 인사들의 자녀들 모습과 내 모습이 대비돼 보여 고향에 내려가 부모님을 뵙는 것조차 괴롭다”며 “금수저·흙수저 공식이 공고한 것 같다”고 푸념했다.
금융권의 이 같은 ‘풍토’ 때문에 진로를 바꾼 취업준비생도 있다. 금융권 취업을 노리다 물류업계로 진로를 바꾼 C 씨는 “이전부터 교수님이나 업계 선배들로부터 금융 쪽, 특히 은행들이 집안이나 대학을 많이 본다는 얘기를 자주 들었다”며 “이 때문에 금융권 취업을 포기했다”고 말했다.
취업준비생들은 이구동성으로 채용비리가 비단 금융권만의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D 씨는 “채용비리가 어디 금융권만의 문제냐”라며 “전체 취업시장에 만연해 있는 일이라고 여기면서도 어쩔 수 없이 공부할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금융권 취업을 준비하고 있는 E 씨는 “채용비리가 없는 곳이 없다고 생각한다”며 “이 같은 비리가 과연 언제쯤 완전히 청산될지 의문”이라고 일침했다.
전문가들은 채용비리를 해묵은 사회적 문제라고 평했다. 신세돈 숙명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채용비리는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닐 뿐 아니라 당장 드러난 부분에 대한 수사, 몇몇 임원에 대한 징계 역시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다”라며 “1~2년이 걸리더라도 금융기관 전체에 퍼져 있는 부조리에 대한 수사·연구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이성진 기자 reveal@ilyo.co.kr
채용비리 금융권만의 일인가…‘임직원 자녀 가산점’ 아예 공개도 금융권 채용비리가 불거지면서 일반 사기업에서 이뤄지는 특혜채용과 그 적절성 등에 관해서도 이목이 쏠리고 있다. 채용비리가 금융권에 국한할 문제가 아니라는 지적도 함께 나온다. 실제 사기업에서 이뤄지는 채용비리는 금융권 못지않다. 사진은 취업준비생들이 대기업 입사시험을 치른 후 고사장을 빠져나오는 모습. 고성준 기자 기업 관계자들 말에 따르면 채용비리는 공공연한 일이다. 한 대기업 임원은 “일반 기업이라고 채용 때 부적절한 일이 없겠느냐”라며 “대표적인 것이 임직원 자녀 채용 때 가산점을 주는 것인데, 이는 채용공고 때 아예 공개하는 회사도 있을 정도로 회사마다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다른 대기업 고위 인사는 “주로 서류전형 때 누구누구 좀 잘 봐줘서 면접까지만 올려달라는 말은 많이 듣는다”며 “워낙 지원자가 많다보니 서류전형 때 변별력이 떨어지는 만큼 요구를 들어주는 경우도 봤다”고 전했다. 그러나 기업에서는 채용비리를 저지를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또 다른 대기업 관계자는 “사기업은 지배구조와 의사결정에서 외부 지원과 감시가 크게 필요치 않기 때문에 금융권처럼 고위층 자녀를 채용해 힘을 얻을 필요가 없다”며 “필요하면 그들을 직접 임원이나 사외이사로 모셔오지 그 자녀들을 특별히 우대하지는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사기업의 채용에 대한 문제제기가 제대로 되지 않는 이유는 공공기관과 달리 민간기업 채용정보에 대한 접근이 어려워서다. 특채 입사자의 능력, 기업 인력수급 현황, 전형절차의 공정성 등을 쉽게 확인할 수 없는 경우가 그만큼 많다는 의미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관계자는 “민간기업의 경우 자료 등을 오픈하지 않으니 정보가 한정돼 있어 특채에 대한 잘잘못을 따지기가 어렵다”며 “의사결정권자들끼리 의견만 통일해도 그 적정성 판단은 쉽지 않다”고 말했다. 기업 채용과 관련해 또 하나 의문이 드는 것은 오너 자녀들의 특채다. 대기업 오너 자녀들은 경영수업이라는 이유로 별다른 입사 과정이 없을 뿐 아니라 바로 차장급으로 입사하는 경우가 많다. ‘오너 자녀’이기 때문에 특별대우를 받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이 같은 오너 일가 자녀·친인척 입사에 대해 ‘채용비리’라고 규정짓는다. 한 변호사는 근로기준법 제6조를 근거로 “대기업 임직원 자녀도 하나의 사회적 신분으로 볼 수 있지 않겠느냐”며 “사회적 신분을 이유로 차별(특별채용)한다면 이는 그릇된 일”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대기업 관계자들의 생각은 다르다. 앞의 대기업 임원은 “특수관계인 개념으로 접근해야 하며 최대주주의 오너십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 봐야 한다”며 “큰 범주로 보면 소유권·재산권 행사로도 볼 수 있어 이를 부정한다면 자본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