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의 오래된 격언이다. ‘정치는 생물이다’는 말처럼 빠르게 변하는 정치권에서 ‘퇴물’로 전락했다 화려하게 복귀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몇 번이나 정계은퇴 선언을 번복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당선보다는 낙선이 익숙했다.
지난해 5월 손학규 당시 국민의당 상임선대위원장이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제19대 대통령선거 선거대책위원회 해단식에 참석해 물을 마시고 있다. 박은숙 기자
하지만 이번엔 정말 그 불이 꺼졌는지도 모른다는 평이 나오고 있다. 손학규 국민의당 상임고문 이야기다. 측근 그룹에서도 이번에는 ‘정말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앞으로 손 고문이 나갈 길이 마땅히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 2014년 손 고문은 재보궐선거 패배로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당시에는 타이밍도, 메시지도 좋았다는 평가가 대체적이었다. 당시 손 고문은 “함께 잘사는 나라를 만들어 저녁이 있는 삶을 돌려드린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해 송구스럽다”라며 “능력도 안 되면서 짊어지고 가려 했던 모든 짐을 이제 내려놓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후 정계 복귀부터 거의 모든 행보에서 불운이 겹치기 시작했다.
만덕산에 들어간 손 고문은 2016년 총선을 앞두고 김종인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러브콜을 받았다. 20대 총선에서 힘을 보태달라는 도움 요청에 손 고문은 끝내 동참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정치권 관계자들은 민주당의 참패를 예상하고 있었지만 예상밖의 선전으로 123석을 얻어 부활에 성공했다. 당시 측근 그룹은 ‘20대 총선에서 복귀해 역할을 했어야 했다’는 의견이 많았다.
손 고문은 정작 한 박자 늦은 총선 약 한 달 뒤 정계복귀를 선언했다. ‘광을 팔 수 있을 때’는 놓치고 명분마저 잃은 복귀였다. 그는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하면서 정치 재개에 나섰지만 직후 ‘최순실 태블릿 PC’ 사건이 터지며 복귀는 순식간에 잊혔다. 지난해 2월 손 고문이 국민의당 입당식을 가진 날에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구속되며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지난 2016년 11월 박근혜 전 대통령이 거국중립내각 국무총리를 선임해 성난 여론을 달랠 수 있다는 추측이 나오기 시작했다. 손 고문도 국무총리직을 수용할 수 있다는 뜻을 내비쳤다. 하지만 역시 며칠 뒤 청와대는 김병준 전 청와대 정책실장을 국무총리 내정자로 임명해 김칫국만 마신 셈이 됐다.
뭐든 해보려고만 하면 헛발질로 종결되면서 지난 9월 손 고문은 3개월간 스탠퍼드대학교 방문연수를 떠났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와 호남 중진 의원들의 갈등이 정점에 달하고 있을 때 정작 한국을 떠나 있으면서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
더불어민주당 당직자는 “한때 같은 당이었지만 정말 운이 안 따라줬다. 어떻게 저렇게까지 타이밍이 안 맞을 수 있냐”고 말했다. 국민의당, 바른정당 통합이 본격화되면서 손 고문은 12월 말 6일 일찍 귀국을 선택했다. 그에게 합당파, 반대파 모두 큰 기대를 걸었다.
손 고문 지지자나 측근 그룹의 아쉬움은 여기서부터 본격화된다. 먼저 그는 국민의당과 바른정당 통합을 지지하는 모습을 취했다. 당시 손 고문이 통합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는 안도 나왔으나 통합추진위원회를 따로 꾸리지 않기로 방침을 정하면서 없는 일이 됐다. 손 고문이 통합된 당의 당대표를 맡거나 지방선거를 앞두고 비상대책위 위원장을 맡는 안도 점쳐졌지만 현재로서는 요원하다. 손 고문의 역할이 사실상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손 고문의 한 측근은 “안 대표를 포함한 통합파에서 기대한 손 고문 역할은 호남 중진 의원들에게 신망이 두터운 손 고문이 역할을 하면서 탈당 없이 합당하거나, 하더라도 최소한의 인원만 탈당하는 선에서 봉합하길 기대했다. 하지만 손 고문의 존재감은 전혀 없었고 탈당할 의원은 전부 다 한 상황이다. 앞으로 당 대표나 비대위 위원장을 줄 이유도 받을 명분도 없다. 일을 해야 돈을 받지, 한 일이 없는데 뭘 기대하겠나”라며 “민주평화당 쪽으로 합류를 결정했다면 한 명이라도 의원을 더 빼와서 민평당을 교섭단체로 만들었어야 하는데 그러지도 못했다.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할지 막막한 상황이다”
정치권에서는 그에게 남은 길이 별로 없다는 데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일부에서는 손 고문이 사는 길은 오는 지방선거에서 험지 출마밖에 없다는 의견도 나온다. 어쩌면 이번 지방선거가 손 고문에게는 마지막의 마지막 기회라는 것이다.
장예찬 시사평론가도 “손학규가 정치적 위상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던져야 한다. 이제 더 잃을 게 없다는 냉정한 자각이 필요하다. 명분이 어찌되었든 손학규는 불안한 정치 상황으로 인해 민주당과 국민의당 어느 편도 돕지 않았고, 민주당의 승리와 국민의당의 선전이라는 양쪽의 결과에 지분이 전혀 없게 됐다”며 “이제는 막다른 절벽에 다다랐음을 인정하고 다소 위험한 기회라도 올인해야 한다. 안전지향적 선택을 이어간다면 손학규는 영원히 ‘고문’으로만 남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오히려 손 고문 주변에서는 이 같은 방안도 어렵다고 보는 비관론도 존재하고 있다. 앞서 손 고문의 측근은 “이미 너무 많은 기회를 놓쳤다고 본다. 잡을 수 있는 기회를 놓쳤고 타이밍은 번번히 어긋났다”며 “험지 출마에 감동하는 시대도 지났다고 생각한며 출마한다고 당선될 가능성은 더 적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곧 진정한 의미의 ‘끝’이 올 수도 있을 것 같다”며 씁쓸해 했다.
김태현 기자 toy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