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 측은 이를 두고 ‘정치보복’이라는 반발하고 있으나, 결정적인 증언들이 핵심 측근들의 입에서 나오고 있어 ‘보복’이란 말이 무색해진 상황이다. 역대 정권에서도 ‘지난 정권 죽이기’ 논란이 불거져 왔다. 과연 적폐청산일까 정치보복일까. 역대 정권이 지난 정권 또는 과거의 정적과 대립한 5가지 사례를 꼽아봤다.
국민장으로 장례가 치러진 노 전 대통령 분향소 모습. MB의 정치 보복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라는 비극으로 끝났다. 일요신문DB
1992년 14대 대통령선거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YS)이 당선됐다. 14대 대선에서 YS의 감정을 상하게 한 후보가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이었다. 정 전 회장은 YS를 두고 “누런 호박에 검은 줄 친다고 시원한 수박되겠습니까. 흰머리 염색하고 빨간 넥타이 매고 구두 굽 높게 한다고 그것이 변화고 개혁입니까”, “하다못해 시골면장도 인격자여야 하는데 면장감도 안되는 사람이 대통령 한다고 난리를 칩니다”는 등 강도 높은 발언으로 YS를 몰아붙였다.
가장 앞서는 후보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던 측면도 있었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하기 힘들다. YS는 대통령이 되고 난 뒤 정 전 회장을 강도 높게 몰아붙였다. 먼저 정 전 회장은 선거법 위반으로 검찰 조사를 받아야 했다. 불구속 기소된 정 전 회장은 결국 93년 11월 대선법 및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가 항소심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아 교도소 신세는 간신히 면했다.
그 이후에도 현대그룹의 수난은 계속됐다. 당시 정부가 앞장서서 약 3년간 금융제재로 현대그룹을 압박했다고 알려졌다. 결국 정 전 회장은 정권이 바뀌고 나서야 압박을 벗어나게 된다.
#2 YS vs 전두환, 노태우 씨
“선거혁명을 통한 민주화가 내 지론이었으나, 이 정권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젯밤과 오늘 내내 생각한 끝에 이 정권을 완전히 타도할 것을 결심했다. 나는 박정희 정권을 타도시킨 사람이다. 기필코 전두환 노태우 정권을 타도할 것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1987년 대통령 선거 직후 기자회견에서 외쳤던 말이다. 하지만 1990년 YS는 옛 감정은 접고 3당 합당이라는 충격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과거는 잊은 듯 보였던 그였지만 대통령이 되면서 ‘과거사 바로 세우기’ 작업에 돌입하게 된다. 1995년 YS는 그 작업의 끝에 12·12 군사반란과 5·17 내란을 일으킨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구속과 사형 선고를 이끌어낸다.
물론 이를 두고 ‘전 정권 죽이기‘라고 부를 수는 없다. 전 씨와 노 씨 모두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당시 문민정부에 참여했던 한 정치원로는 “하나회 숙청 작업부터 두 전직 대통령 사형 선고까지만 놓고 보면 YS를 비판할 수 없다. 당시 지지율을 보더라도 국민이 원하는 ‘적폐 청산’ 작업이었다”고 말했다.
#3 노무현 전 대통령 vs DJ
2002년 한나라당이 국정감사에서 국민의정부의 대북 비밀송금 의혹을 제기했다. 결국 ‘남북 정상 회담 관련 대북 비밀 송금 의혹 사건 등의 진상 규명을 위한 특별 검사 임명 등에 관한 법률’로 인해 특검이 실시됐다. 당시 민주당 내 입장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해 주길 바랐지만 결국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지난 대선 때도 다시 제기된 참여정부 ‘호남홀대론’의 배경이 되는 사건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특검을 수용하면서 호남과 친노의 결별이 시작됐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10년이 넘게 시간이 흘렀음에도 DJ(김대중 전 대통령)계와 친노가 갈라지면서 국민의당이 깃발을 들었을 때 호남은 국민의당에 몰표를 보냈다. 또 지난 대선에서도 박지원 전 대표가 “문재인은 우리 전북 인사들을 차별했다. 문재인은 대북송금 특검을 해서 우리 김대중 대통령을 완전히 골로 보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인한 최대 피해자는 현대그룹 정씨 일가라는 말도 나온다. YS시대 최대 피해자였던 정주영 전 명예회장은 DJ 정부에서 소떼를 몰고 방북하는 등 정부친화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결국 부메랑이 돼 돌아왔기 때문이다. 대북송금 특검이 진행되면서 정 전 명예회장의 5남인 정몽헌 전 현대그룹 회장이 계동 현대그룹 사옥에서 뛰어내렸다.
#4 MB vs 노무현 전 대통령
이명박 전 대통령 당선 직후부터 노 전 대통령과의 충돌이 시작됐다. 시작은 대통령 기록물이었다. 2008년 7월 보수단체가 대통령 기록물이 담긴 하드디스크와 시스템 서버를 봉하마을로 옮겼다며 기록물에 관련된 참여정부 인사들을 고발했다.
검찰이 대통령 기록물 유출 사건 수사에 착수했다. 당시 여론은 법률상 맞는 합법한 일을 했다는 노 전 대통령 쪽과 그럼에도 유출 우려가 있는 것은 사실이라는 MB 쪽으로 팽팽히 맞섰다. 결국 노 전 대통령은 MB에게 편지를 썼다. “이명박 대통령님, 모두 내가 지시해서 생겨난 일입니다. 나에게 책임을 묻되, 힘없는 실무자들을 희생양으로 삼는 일은 없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기록은 국가기록원에 돌려 드리겠습니다”는 내용이었다.
본격적인 정치보복은 이명박 전 대통령 취임 이후 약 1년 뒤 박연차 게이트가 터지면서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에 나서면서 시작됐다.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이 권양숙 여사에게 건넸다는 100만 달러, 정상문 전 총무비서관에게 건넨 3억 원 등에 대해 수사가 이뤄졌다. 이후 대통령 특수활동비까지 수사가 번졌다. 결국 노 전 대통령이 생을 마감하면서 사건은 비극적으로 끝났다.
당시 노 전 대통령 영결식에서는 아이러니한 장면을 발견할 수 있다. 당시 영결식에 참석한 MB에게 백원우 전 의원은 “이명박! 어디서 분향을 해!”라며 “살인마! 노무현 대통령에게 사죄하십시오”라고 외쳤다. 현재 백 전 의원은 적폐청산 작업 선봉인 국정원·경찰·검찰·국세청·감사원 등 5대 사정기관의 업무를 총괄하는 민정수석실에 민정비서관으로 근무 중이다. 약 10년 전과 정반대 상황으로 볼 수 있는 셈이다.
#5 박근혜 전 대통령 vs MB
진보적인 정치 성향 유권자들은 흔히 ‘이명박근혜’ 시대로 지난 10년을 규정한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는 게 당시 정치권 관계자들의 일관된 목소리다. MB정부 사정에 밝은 정치권 관계자는 “MB와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지지 세력도 친이계와 친박계로 뚜렷히 갈렸고 분위기도 사뭇 달랐다. 특히 박 전 대통령의 MB 청산 작업은 지금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친이계와 친박계는 10년 간 피를 튀기는 전쟁을 치렀다. 그 이전부터 시작된 갈등은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지금도 회자되는 2007년 경선에서 친이계는 박 전 대통령을 겨냥해 ‘최태민’을 꺼내들었고 친박계는 ‘BBK’를 꺼내들었다. 당시 ‘경선에서 이기면 당선’이라는 분위기 속에서 본선보다 두 경선 캠프의 싸움이 치열했다.
MB가 당선된 뒤 친이계의 친박계 견제는 더 심해졌다. 절정은 2008년 총선의 친박계 ‘공천학살’이었다. 도저히 참지 못한 친박계가 ‘친박연대’라는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당명을 내세워 나갔고 살아 돌아왔다. 2012년에는 거꾸로 친박계가 칼을 쥐고 친이계를 학살했다. 박 전 대통령이 비상대책위원장으로 당을 재편했고 친박계가 주류가 됐다. ‘컷오프’를 무기로 MB정부 실세들을 공천에서 탈락시켰다.
박 전 대통령이 당선된 뒤 MB를 향해 검찰도 나섰다. MB를 겨냥해 일명 ‘사자방’(4대강 정비 사업, 자원외교, 방산비리) 수사, 포스코, 농협 등 기업 수사가 강도 높게 진행됐다. 하지만 결국 큰 소득 없이 끝났다. 당시 정치보복 때문에 결국 탄핵에 이르게 됐다는 시각도 있다. 2016년 총선에서 친이계를 포함한 비박계를 무리하게 공천 탈락시키려다 결국 압승으로 예상된 총선에서 기대 이하의 성적을 거뒀기 때문이다.
김태현 기자 toy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