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G는 지난 5일 “차기 사장 후보로 백복인 현 KT&G 사장을 확정했다”고 밝혔다. 사진=KT&G
그러나 KT&G 2대 주주인 IBK기업은행(6.93%)이 백 사장의 연임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지난 2일 기업은행은 KT&G 지분 보유 목적을 ‘단순 투자’에서 ‘경영 참여’로 변경한다고 공시했다. 또 KT&G 2대 주주로서 ‘현 경영진을 감시하겠다’는 이유로 전문가 출신 사외이사 2명을 추천했다. 뿐만 아니라 KT&G 사장 선임 과정에 문제를 제기하며 공문을 발송하고 부행장이 직접 항의 방문하는 등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기업은행 측은 “주주 역할 강화로 경영진의 불공정한 의사결정을 견제하겠다는 의도”라고 설명했다.
앞서 KT&G는 백 사장의 이른바 ‘셀프 연임’을 위해 사장 공모 기간을 축소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일반 기업의 경우 대부분 사장 공모 기간은 5일 안팎이다. 공모에 필요한 서류 구비와 원서 작성 등에 걸리는 시간을 고려해서다. 그런데 KT&G는 지난달 30일 홈페이지를 통해 사장 공모를 공고한 후 이틀에 걸쳐 서류접수를 받고, 단 하루 만에 서류 심사를 끝냈다. 다음날엔 면접을 진행하고, 곧바로 백 사장을 차기 사장 후보로 선정했다. 공모부터 심사, 면접, 추천까지 단 1주일 만에 속전속결로 연임을 확정지은 것이다.
기업은행은 오는 3월 열릴 주주총회에서 백 사장의 연임을 반대할 것으로 알려졌다. KT&G의 해외 사업 부실 의혹도 도마에 오를 것으로 보인다. KT&G는 인도네시아 담배회사를 인수하는 과정에서 분식회계를 한 것 아니냐는 의혹을 받았다. 인도네시아 분식회계 의혹은 백 사장 연임을 반대해 온 KT&G 일부 전직 임원들의 고발로 금융감독원(금감원)에서 감리가 진행 중이다. 의혹이 사실로 확인되면 백 사장은 또 다시 검찰 수사를 받게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금감원 안팎에선 해외사업 관련 KT&G의 불법 행위가 확인되지 않는다는 말이 나온다. 금감원 사정에 밝은 한 인사는 “해외 법인의 경우 자료 확보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설사 비자금을 만드는 등 불법행위가 있었다 하더라도 이를 입증하기는 매우 어렵다”고 말했다.
금융권 일각에선 현 경영진을 흔들 목적으로 분식회계 의혹이 일부 과대포장된 것 아니냐는 시선도 있다. 앞서 백 사장은 2016년 광고대행사로부터 수천만 원의 뒷돈을 수수한 혐의로 기소됐지만 법원은 백 사장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지난해 검찰은 대법원 상고를 포기하면서 수사 과정에 문제가 있었음을 자인했다. 백 사장에 대한 수사는 박근혜 정부 당시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주도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KT&G를 비롯해 포스코, KT 등 민영화된 공기업은 정권교체기마다 최고경영자(CEO)가 검찰 수사를 받고 물러나는 악순환을 반복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는 국가기관이 대주주로 있는 민간기업 경영진을 강제적인 방법으로 교체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실제 검찰은 현재 KT&G에 대한 직접 수사를 고려하지 않는 것으로 전해진다.
기업은행의 갑작스런 경영 참여 배경을 놓고 금융권에선 김도진 IBK기업은행장과 관련 짓는 시각도 있다. 사진=IBK기업은행
KT&G는 백 사장 취임 후 ‘해외 매출 1조 원 시대’를 열었고, 전자담배 ‘릴(lil)’을 시장에 안착시키는 등 경영면에서 성과를 내왔다고 주장한다. 내부 공채 출신 첫 CEO인 백 사장은 전략, R&D 등 핵심부서를 거치며 높은 업무 이해도와 조직 장악력 등이 강점으로 꼽힌다. 담배업계에선 늘 정치적 외풍에 시달려 온 KT&G가 문재인 정부 들어 ‘독립’을 시도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재계 관계자는 “민간기업 사장 선임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말한 것이 부메랑이 돼 돌아온 격”이라고 말했다. 만약 3월 주주총회에서 연임안이 가결되면 백 사장의 임기는 2021년까지 늘어난다.
기업은행의 갑작스런 경영 참여 배경을 놓고 금융권에선 김도진 IBK기업은행장의 최근 활동과 연결짓는 시각도 있다.
김 행장의 최근 모드는 적극적인 정부 정책 협조로 사퇴설을 일축했다. 김 행장은 사내 준정규직 3000여 명의 정규직 전환 계획을 내놓은 데 이어 ‘동반자 금융’을 통해 소상공인과 벤처기업에 대한 집중 육성 계획을 밝혔다. 금융권 관계자는 “평창올림픽을 가장 앞장서 홍보하고, 정부 맞춤형 금융상품을 내놓는 등 정부 정책에 발을 맞추고 있다”라고 말했다.
실제 박근혜 정부 당시 KT&G 지분 매각을 추진하던 기업은행은 문재인 정부 들어 돌연 매각 계획을 철회하고, 스튜어드십코드라는 정부 기조에 발맞춰 움직이고 있다. KT&G 최대주주인 국민연금(9.09%)조차 백 사장 연임과 관련한 언급을 꺼리는 상황에서 기업은행의 선제적 반발은 김 행장의 불안한 거취와 맞물려 여러 해석을 낳고 있다. KT&G 안팎에선 ‘김 행장이 임명권자에게 잘 보이려 무리수를 둔 것 같다’는 반응도 나온다.
KT&G는 기업은행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내 기관투자자와 외국인 투자자를 설득해 주주총회를 강행할 것으로 알려졌다. 출석 주주 과반 찬성을 얻으면 기업은행 측 의사와 관계없이 백 사장의 연임이 확정된다. 다만 주총 의결을 위해선 발행주식 총수 25% 이상의 찬성이 필요하기 때문에 국민연금과 기업은행이 연임에 반대하면 KT&G는 지분 5% 이상을 보유한 외국인 투자자 ‘퍼스트 이글 인베스트먼트(First Eagle Investment)’와 ‘블랙록 펀드 어드바이저스(BlackRock Fund Advisors)’의 도움이 절실하다. 기업은행과 KT&G 모두 백 사장 거취에 대한 질문에는 “공식 입장이 없다”고 답했다.
변수는 기업은행이 과연 독자 판단으로 경영 참여를 선언했는지 아니면 정권의 의중이 반영됐는지 여부다. 현재 청와대 내에는 ‘정책실’ 라인과 ‘기재부’ 라인이 양립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앞의 금융권 관계자는 “여지껏 정부와 맞서 잘된 기업은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강현석 기자 angeil@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