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지 일본기원에서 결승1국의 공개해설을 맡은 장쉬 9단(대만인이지만 일본기원 소속이다)은 자성의 목소리를 먼저 냈다. 13년 전 그는 제9회 LG배 세계기왕전 결승에서 중국의 위빈 9단을 꺾고 우승을 차지했었다. 하지만 일본은 그 후 단 한 번도 세계 정상에 서지 못했다.
한국과 중국에 밀려 세계무대에서 숨조차 쉬지 못하던 일본은 13년 후 다시 정상에 설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7관왕 이야마 유타(井山裕太)가 결승에 오른 것. 야야마는 제22회 LG배 조선일보 기왕전 본선에서 저우루이양, 양딩신, 커제 등 중국의 상위랭커들을 잇달아 제압하고 결승에 올랐다.
제22회 LG배 조선일보 기왕전 최종국 종국 장면. 일본 이야마 유타(오른쪽)가 아쉽게 패했다.
이야마 유타의 선전에 고무된 일본기원은 이야마와 셰얼하오(謝爾豪) 5단의 결승전을 자신들의 홈그라운드로 유치해 기대감을 한껏 높였다.
앞서 언급했듯 이야마는 일본 내 7대 기전인 기성(棋聖), 명인, 본인방, 왕좌, 천원, 기성(碁聖), 십단을 보유하고 있다. 20세기 최강이라는 조치훈 9단도 이루지 못했던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그러나 세계대회 우승 경력이 없다는 게 항상 걸렸었는데 드디어 천재일우의 찬스를 잡은 것.
이야마는 바둑팬들 사이에 ‘거봉선생’이라 불린다. 알파고의 업그레이드 판인 알파고 마스터는 2016년 말 인터넷 바둑 사이트에 다시 나타나 인간계 강자들을 공포에 떨게 했었는데 바로 이때 이야마가 제일 잘 뒀다.
1도
‘1도’가 당시의 바둑. 마스터에게 모두 100수를 버티지 못하고 비세에 빠졌을 때 이야마는 중반까지 유리하게 이끌어 관전자들을 놀라게 했다. 백이 이야마인데 중앙 전투에서 흑16까지 마스터의 흑돌을 거봉의 우형으로 유도한 것이 이 바둑의 하이라이트. 비록 종반 역전을 허용하긴 했지만 이 대국은 인간이 알파고 마스터와 맞붙은 60판 중 가장 잘 싸운 대국으로 평가받는다.
결승 1국을 앞두고는 셰얼하오 5단의 발언 때문에 일본 바둑계가 발칵 뒤집혔다. 기자회견에서 전망을 묻는 가벼운 질문에 셰얼하오가 “일본의 정상급 기사라지만 세계무대와 일본바둑은 격차가 있기 때문에 별로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광역도발을 시전했기 때문이다.
이에 사람 좋은 이야마도 가만있지 않아 “셰얼하오는 아직 중국의 다른 초일류급 기사들에 미치지 못한다”고 반격해 대국 전부터 분위기는 한껏 달아올랐다.
그렇게 시작된 3번기 제1국은 이야마가 골인 일보직전에서 무너졌다. 180수에 끝난 이 바둑은 160수 언저리까지 이야마가 유리했지만, 마지막 10여 수에서 실수가 연속적으로 나오면서 셰얼하오가 첫 판을 가져갔다.
2도
2국은 1국과는 반대 양상이었다. 막판에 몰린 이야마가 심적으로 부담스러웠는지 초반부터 실리를 밝히다가 중앙에 거대한 흑 세력을 허용한다. ‘2도’가 바로 그 장면. 흑의 연탄공장 같은 모양에 삭감이 아닌 백1의 침투는 비세를 의식한 이야마의 승부수. 그리고 백13까지 잡혀있던 백 2점까지 끌고 나올 수 있게 돼서는 바둑이 어지러워졌다. 사실 이래도 여전히 흑이 우세했지만 승부를 걸어간 이야마의 독기에 셰얼하오가 흔들리면서 결국 이야마가 반집 대역전승을 거두게 된다.
3도
13년 만에 일본의 비원(悲願)을 풀기 위해 나선 이야마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한다. 초반 공격 실패가 패인이 됐다. ‘3도’가 3국의 초반. 백1로 젖혔을 때 바로 막은 흑2가 이 바둑의 패착이나 다름없는 수. 백3으로 그냥 완생시켜준 것이 뼈아팠다. 결과적으로 흑은 이 백을 좀 더 괴롭혔어야 했다. 흑2로는 3의 곳에 뛰어들어 백의 눈모양을 파헤치는 것이 최선. 죽지야 않겠지만 일단 이 백이 사활에 걸리면 백은 다른 곳에서도 마음놓고 싸우지 못한다. 실전에서는 백이 마음 놓고 A까지 뛰어들어 흑 모양을 파괴하면서 실리의 격차가 벌어지게 됐다.
1998년생으로 중국랭킹 16위인 셰얼하오는 LG배 본선에서 홍성지, 김지석, 최철한에 이어 중국 장웨이제를 연거푸 꺾으며 결승에 올랐다. 우승 전 최고 기록은 2012년 제1회 백령배 4강이었다.
한편 이야마가 정상에 오르진 못했지만 일본은 나름 고무된 분위기다. 과거 세계대회 성적이 워낙 안 좋아 후지쯔배와 도요타덴소배와 같은 세계대회가 사라지기도 했지만 최근 일본 신예 기사들의 분전으로 세계 정상권과 어느 정도 격차를 줄였다고 본다.
일본에서 최고 규모의 바둑도장 ‘홍도장’을 운영하고 있는 홍맑은샘 프로는 “현재 일본에서 유망주들이 많이 배출되고 있다. 이야마의 뒤를 쫓고 있는 이치리키 료나 시바노 도라마루 같은 기사들도 조만간 정상급 기량을 갖출 것으로 본다. 그들은 일본바둑 대표팀인 ‘고고재팬(GO碁 JAPAN)’에서 관리를 받고 있기도 하다. 바둑 유망주들도 ‘알파고’나 ‘딥젠고’의 영향 탓인지 과거 보다 많이 늘었다. 향후 5년 정도면 중국은 몰라도 한국은 따라잡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는 것이 일본 바둑계 분위기”라고 전했다.
유경춘 객원기자
일본의 비원을 이루려던 이야마는 마지막 고비를 넘지 못했다.
이야마 유타의 승리를 기대하며 일본기원 내 공개해설장에 운집한 일본 바둑팬들. 2국 대역전승에 한껏 고무됐으나 마지막 3국에서 패하자 장탄식을 쏟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