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전 대통령이 1월 17일 강남구 삼성동 사무실에서 검찰의 특수활동비 수사 관련 기자회견을 마친 뒤 사무실을 빠져나가고 있다. 박정훈 기자 onepark@ilyo.co.kr
삼성 소송비 대납이 뇌물로 인정될 경우 액수가 40억 원에 달해 이 전 대통령 혐의 중 가장 무거운 형량이 예상된다. 한 변호사는 “삼성 소송비용 대납이 뇌물죄로 인정된다면 10년 이상의 징역이나 무기징역까지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당시 김경준 씨와 옵셔널벤처스를 상대로 투자금 반환 소송을 벌이고 있었던 다스는 지난 2009년 3월 미국 법률회사 에이킨 검프를 법률 대리인으로 선임한다.
다스가 에이킨 검프를 선임하는 과정에는 김백준 전 기획관이 적극관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전 기획관은 이전부터 알고 지내던 에이킨 검프 소속 김석한 변호사와 접촉해 소송과 관련된 논의를 했고 이후 다스는 김 변호사를 선임했다. 다스 내부 자료에서도 김 변호사는 김 전 기획관과의 구두합의를 통해 영입됐다는 점이 명시되어 있다. 사기업 소송에 청와대 관계자가 개입한 것 자체가 부적절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최근 보도에 따르면 이 전 대통령 측이 소송비 대납금 40억 원 중 10억 원 정도를 돌려달라고 요구한 정황도 포착됐다. 검찰은 이 전 대통령 측이 소송비용 지불 후 남은 돈을 개인적으로 착복하려 한 것은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그렇다면 삼성의 다스 소송비 대납은 사실일까? 이 전 대통령 측도 의혹이 제기된 후 자체 조사를 해본 결과 소송비 대납은 실제 있었던 일로 파악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소송비 대납은 이 전 대통령 측이 모르게 이뤄진 일이라는 입장이다. 이 전 대통령 측은 오히려 김 변호사에게 자신들이 속은 것이라는 입장을 내놨다.
이 전 대통령 측 한 관계자는 “김 변호사가 먼저 무료 변론을 해주겠다고 접근했다. 소송비 대납이 되려면 다스하고 법무법인하고 얼마를 주기로 계약을 하고 그 돈을 대신 줘야 대납이다. 무료 변론을 해주기로 했으니 처음부터 대납해줄 소송비가 없었다”면서 “이미 기존에 로펌 2곳에서 사건을 맡고 있었는데 무료 변론이 아니었다면 김 변호사를 추가로 선임할 이유가 없었다. 무료로 해준다니까 한 번 해보라고 한 것뿐”이라고 주장했다.
다스는 당시 김경준 씨와 옵셔널벤처스를 상대로 투자금 반환 소송을 벌이고 있었다. 김경준 씨와 벌이는 손해배상 청구소송은 림 루거(Lim Ruger·Lim, Ruger & Kim LLP) 로펌이 맡고 있었고, 옵셔널벤처스 측과의 소송은 그레고리 M.리 변호사가 맡고 있었다.
이 관계자는 “김백준 전 기획관이 뒤늦게 소송비 대납 사실을 알고 김석한 변호사에게 소송비를 삼성에 돌려주라고 요구했지만 돌려받지 못했다”면서 “재미 한인인 김석한 변호사는 한국과 관련한 대형 사건이 터지면 무료 변론을 미끼로 먼저 접근해 인맥을 쌓고 그 인맥을 통해 사건을 따내는 로비스트”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김 변호사는 2013년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의 성추행 사건 때도 무료 변론을 자처해 화제가 됐었다. 소송비 대납 사건 당시 에이킨 검프 소속이었던 김 변호사가 2015년 아널드앤포터라는 로펌으로 이직하자 삼성은 이곳으로 로비 대행사를 변경하기도 했다. 윤 전 대변인과 접촉해 김 변호사에 대해 물었지만 “당시 사건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며 답변을 거부했다.
앞서의 이 전 대통령 측 관계자는 “김백준 전 기획관이 당시 사석에서 ‘무료 변론이라고 했지만 조금은 소송비를 청구할 줄 알았는데 아예 청구를 안 하니까 이상하다’고 했다”면서 “그때까진 소송비 대납 사실을 몰랐던 거다. 한 1억~2억이나 청구할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나중에 (소송비 대납 사실을) 알고 나선 너무 많이 청구했다고 김 변호사 측에 항의했다”고 말했다.
관계자는 “지금 김 변호사가 받은 수임료가 370만 불(약 40억 원)이라고 하는데 말이 안 된다”면서 “1심에서 소송비로 38억 원이 들었는데 기존 변호사들도 2심에서는 2억 정도를 청구했더라. 재판이 대부분 1심에서 진행됐고 2심부터는 합의해보자고 해서 변호사가 한 게 없다. 소송비는 일한 시간만큼 계산된다. 김 변호사는 2심부터 재판에 참여했다. 무료 변론을 약속했지만 나중에 변호사비를 청구하더라도 다른 변호사들과 마찬가지로 2억 정도 했어야지 40억이라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 관계자는 “삼성이 에이킨 검프와 2007년 10월부터 3년간 자문 계약을 맺고 매달 12만 5000불을 자문료로 지급했다. 또 2010년에 57만 불을 지급한 게 있다. 우리 측이 파악한 바로는 삼성이 에이킨 검프 측에 전달한 돈은 이게 전부인데 총 500만 불 정도 된다. (김 변호사가 변론을 맡은) 2009년부터 따지면 자문료까지 합쳐도 삼성이 에이킨 검프 측에 지급한 돈이 300만 불이 조금 넘더라. 370만 불이라는 이야기가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다. 소명이 안 되는 돈은 57만 불인데 그 돈을 왜 삼성이 지급했는지는 우리도 모른다. 당시 삼성은 에이킨 검프뿐만 아니라 다른 미국 내 법무법인들과도 자문 계약을 맺고 자문료를 지급하고 있었다. 2007년부터 계약해 지급하고 있던 자문료까지 소송비 대납이라고 하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반면 검찰은 삼성이 에이킨 검프와 허위 컨설팅 계약을 맺고 자문료 명목으로 사실상 다스 소송비를 대납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학수 전 삼성 부회장도 검찰 조사 과정에서 컨설팅 대가 명목으로 보낸 돈은 다스가 부담해야 할 수임료를 대신 내준 것이라고 자백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다면 57만 불이 다스 소송비 대납 명목이었냐는 질문에는 “그건 우리도 모르겠다. 57만 불이 더 가 있는 것은 우리도 이상하게 생각했다”고 답했다.
한편 김 전 기획관은 이명박 정권 시절에 이미 다스 소송비 대납 사실을 주변에 말하고 다니며 불만을 토로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이 관계자는 “김 전 기획관이 6~7년 전 사석에서 김석한 변호사가 다스를 도와준 것처럼 생색내면서 삼성 사건 받아 가는데 (다스 소송에서) 일한 게 없다. (소송비를) 돌려받아야 하는데 안 준다”고 불만을 토로했다고 말했다.
어찌됐든 소송비 대납이 있었기 때문에 김 전 기획관이 김 변호사에게 항의한 것 아니냐는 질문에는 사실을 인정했다. 관계자는 “당시 김 전 기획관과 김 변호사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 김 전 기획관은 그렇게 많이 받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돈을 삼성에 돌려주라고 했지만 돌려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결국 김 전 기획관이 불법성을 인지하고도 사건을 제대로 마무리 짓지 않고 넘어 간 것 아니냐는 질문에는 “그것은 판단하기 나름”이라고 답했다
이학수 전 부회장과 김백준 전 기획관이 각각 청와대의 요구와 이 전 대통령의 지시가 있었다고 진술한 것에 대해서는 “왜 그런 진술을 했는지 모르겠다. 이 전 대통령에게 소송비 대납과 관련해 물어봤더니 전혀 모르고 있더라. 무슨 약점이 잡혀서 그런 진술을 하는 거 같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이 전 대통령 측의 주장에 대해 검찰 측은 “현재 진행 중인 사건에 대해서는 드릴 말씀이 없다”며 답변을 거부했다. 일각에선 이 전 대통령 측이 모든 잘못을 김석한 변호사에게 떠넘기려 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김 변호사는 에이킨 검프 최고경영진을 역임한 인물이다. 동양인이 미국 대형 법률회사 최고경영진에 오른 것은 김 변호사가 최초였다.
에이킨 검프는 지난해 매출액 기준으로 세계 36위에 오른 대형 법률회사다. 이런 이력을 감안하면 김 변호사가 삼성과 청와대를 상대로 사기를 쳤다는 이 전 대통령 측의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김 변호사는 소송비 대납 사건과 관련해 함구하고 있다. 검찰도 연락을 취해봤지만 김 변호사는 답변을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명일 기자 mi73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