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지난해 12월 22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횡령, 배임, 탈세’ 등 경영비리 혐의와 관련, 1심 선고 공판을 마치고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최준필 기자
K스포츠재단에 부정한 청탁과 함께 70억 원을 제공한 혐의로 기소된 신 회장은 지난 13일 1심에서 징역 2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신 회장은 지난해 롯데 경영비리 사건과 관련해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구속을 면했지만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유탄은 피하지 못했다. 롯데 창립 이래 총수가 구속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롯데 관계자는 “예상치 못한 참담한 결과”라며 “부회장단을 중심으로 비상경영체제를 수립해 현안을 해결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롯데 비상경영체제를 이끌 인물은 황각규 롯데지주 대표(부회장)다. 신 회장의 최측근이자 2016년 사망한 이인원 롯데 부회장의 후계자로 지목된 황 부회장은 롯데 2인자로 불린다. 황 부회장은 롯데케미칼(옛 호남석유화학) 출신으로 신 회장이 과거 호남석유화학에서 경영수업을 시작할 당시 곁에서 보좌해 신임을 얻은 것으로 전해진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롯데에서 고위직에 오르려면 일본어 실력은 물론 일본 문화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황 부회장의) 그런 점이 부각된 것 같다”고 말했다.
신 회장의 황 부회장에 대한 신뢰는 상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황 부회장이 그룹 최대 현안인 지배구조 개선을 위해 출범한 롯데지주 대표인 것이 이를 방증한다. 황 부회장이 마음만 먹으면 신 회장의 동의 없이도 롯데지주 계열에 대한 인사조치와 기업 인수·합병(M&A)이 가능할 정도다. 재계 일각에선 총수 공백 상황에도 세대교체를 단행한 삼성처럼 롯데도 대규모 임원 인사가 뒤따를 것이란 추측도 제기된다. 황 부회장을 중심으로 한 ‘신동빈 체제’를 더 공고히 하기 위해서다.
신동빈 회장이 그룹경영에 본격적으로 나서면서 롯데는 창업주인 신격호 롯데 총괄회장의 공(功)은 인정하면서도 과(過)와는 거리를 두는 ‘실용 노선’을 택해왔다. 롯데 관계자는 신 회장에 대해 “선대가 남긴 ‘구악’을 해소하려 애썼던 분”이라고까지 말했다. 박근혜 정부 당시 이뤄진 대대적인 검찰 수사는 이 같은 실용 노선에 힘을 더했다.
롯데는 오너 일가의 횡령·배임·탈세 재판에서 그 책임을 신동빈 회장이 아닌 창업주에게 돌리는 전략을 짰다. 실제 재판부는 경영비리 사건에서 신 총괄회장에게는 징역 4년을 선고한 반면 신 회장에게는 징역 1년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신 총괄회장은 고령과 건강 등을 이유로 형 집행이 무기한 연기됐다.
‘형제의 난’을 겪으면서 신 회장은 신격호식 ‘독단 경영’에 한계를 느끼고, 자신만의 경영 방식을 고민한 것으로 전해진다. 오너와 전문경영인이 공존하는 이른바 ‘뉴롯데’ 구상이 나온 배경이다. 이는 신 회장과 마찬가지로 총수가 와병 중이고, 개인 비리로 재판을 받고 있으며, 지배구조 강화에 어려움을 겪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이사회 중심 경영’을 들고 나온 것과 유사하다. 삼성 사정에 밝은 한 인사는 “이 부회장이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때와 다른 방법으로 경영하고 싶어한다”며 “삼성전자를 주축으로 ‘이사회 중심 경영’을 뿌리내리려 한다”고 말했다.
서울 잠실 롯데월드타워 전경. 고성준 기자.
공교롭게도 지난해 뇌물공여 등 혐의로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이재용 부회장은 지난 5일 2심에서 “뇌물죄는 인정되지만 부정한 청탁이 없었다”며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반면 신 회장은 면세점 현안에 대한 ‘부정한 청탁’이 인정돼 법정구속 수감됐다. 삼성과 롯데는 모두 재판 과정에서 청와대 요청에 불응할 경우 받을 수 있는 불이익을 우려해 재단에 출연한 것이란 논리를 폈다. 한 마디로 “정권의 피해자”라는 것이다.
반면 검찰은 안종범 전 청와대 경제수석 등 증인 진술과 ‘대통령 말씀자료’ 등 핵심 증거를 근거로 신 회장의 유죄를 확신하고 있다. 검찰 관계자는 “롯데는 자신들이 면세점을 뺏긴 상황에서 청와대 눈치를 봤다고 하지만 당시 롯데 내부에서 확보한 자료 등을 보면 면세점 특허 회복 자료가 작성되는 등 현안이 분명 존재했다”고 말했다.
롯데는 2심에서 삼성처럼 판결이 뒤집히길 바라고 있다. 신 회장의 뇌물죄가 끝내 확정되면 우여곡절 끝에 회복한 잠실 면세점 특허는 취소될 수밖에 없다. 2016년 관세청은 신 회장이 대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는 경우 면세점 특허를 취소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법조계 관계자는 “(삼성처럼) 2심 재판에서 박 전 대통령의 강요 부분을 입증해야만 신 회장이 감형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신 회장은 2심 준비와 동시에 오는 27일 예정된 롯데지주 주주총회에서 기존 롯데 비상장 계열사 6곳의 합병안을 통과시켜야 한다. 이번 주주총회는 신 회장의 복심인 황 부회장이 주도한다. 합병안이 통과하면 신 회장의 그룹 지배력이 강화됨은 물론 복잡한 순환출자구조도 대부분 해소할 수 있다. 호텔롯데 상장을 제외하고 ‘뉴롯데’ 구상의 9부 능선을 넘는 셈이다. 일부 소액주주의 반발이 변수지만 실제 합병이 무산될 가능성은 크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롯데지주 합병안이 통과하면 롯데지주는 황 부회장이 경영하고, 기존 한국 지주사 격인 호텔롯데는 일본 롯데홀딩스가 임시 경영권을 행사할 것으로 보인다. 일본 롯데의 경영 의지에 대해선 신 회장의 ‘옥중경영’ 또는 황 부회장의 ‘대리경영’ 등이 점쳐진다. 재계 일각에선 신동주 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의 경영 참여설도 나오지만 가능성은 희박한 것으로 전해진다. 롯데 사정에 밝은 한 인사는 “국내에 변변한 조직도 참모도 없는 신 전 부회장이 혼자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강현석 기자 angeli@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