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성행위, 성추행, 성폭행, 폭행 등의 의혹을 받는 이윤택은 국내 연극계를 호령해온 거장이다. 성추행 의혹을 받는 이윤택의 스승 오태석은 연극계 절대권력이자 대한민국 연극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후배들의 이어지는 성추행, 성폭행 폭로에 이들은 서로 다른 대응방식을 내놨다. 즉각 기자회견을 연 이윤택 연출과 잠적한 오태석 대표를 바라보는 피해자들과 연극계의 반응을 들여다봤다.
연극연출가 이윤택이 19일 오전 서울 종로구 30 스튜디오에서 성추행 논란 공개 사과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최준필 기자
2월 19일 이윤택 연출은 서울 종로에 있는 연희단거리패의 30스튜디오에서 사과의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는 성폭행 의혹에 대해서는 “성관계는 있었지만 폭력적이지는 않았다”며 전면 부인했다. 기자회견 이후 피해자들의 상처가 아물기는커녕 추가 폭로가 줄지어 터져 나왔다. 연극인들은 그가 성폭행을 부인해 진정성 있는 사과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보고 있다.
21일에는 연희단거리패 중견단원인 오동식 호서대 겸임교수가 폭로글을 올리며 상황이 더욱 복잡해졌다. 오 씨는 ‘해당 기자회견은 짜인 각본대로 연출됐으며 성폭행 건도 일부 극단원들이 인지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오 씨에 따르면 기자회견을 열기로 한 이윤택 연출은 사과문을 완성하고 단원들에게 기자회견 전 리허설을 해보자고 제안했다. 단원들이 기자가 돼 예상 질문을 던지면 이윤택 연출이 대답하는 방식이었다. 김소희 대표는 “선생님 표정이 불쌍하지 않아요. 그렇게 하시면 안돼요”라며 기자회견에 알맞은 불쌍한 표정을 짓도록 제안했다. 그러자 이 씨는 다시 표정을 지어보이며 “이건 어떠냐”고 물었다. 이윤택 연출은 자신의 극장에서, 자신이 쓴 글을 토대로 기자회견을 연출한 셈이다.
김소희 연희단거리패 대표도 피해자의 폭로로 가해자 대열에 서게 됐다. 김 대표는 후배들이 성폭행을 당하는 것을 방조하고 도리어 이윤택 연출의 이 같은 행각을 도왔다는 의혹을 받았다. 익명의 제보자가 언론을 통해 김소희 대표의 부정을 폭로하자, 김 대표는 정정보도를 요구하며 “익명 인터뷰는 거짓”이라고 호소했다. 그렇지만 분노한 익명의 제보자가 실명을 공개하며 반박하는 글을 올리자 비난을 피할 수 없게 된 김소희 대표는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의 뜻을 전달했다.
김소희 대표와 이윤택 연출은 사태를 진화하기 위해 기자회견을 열고 언론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하지만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을 부정하고 여론에 거짓 호소를 한 것은 도리어 화가 되어 돌아왔다. 이제는 해체된 연희단거리패의 마지막 작품은 이윤택이 직접 출연하고 연출한 사과 기자회견이 되고 말았다.
이윤택 연출의 기자회견보다 충격적인 것은 오태석 대표의 잠적이다. 오태석 대표는 성추행 폭로로 연극 인생을 불명예스럽게 마무리하게 되자 ‘잠적’을 선택했다. 오태석 대표는 통상 연출가가 공연 기간 자신의 공연을 관람하는 것을 넘어 매일 새로 장면을 바꾸는 등 작품에 대한 애착이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자신의 이름이 거론되기 시작한 19일부터 외부활동을 하지 않고 연락마저 끊었다. 21일까지 진행된 자신의 공연장에도 모습을 비추지 않았다.
극단 목화에 따르면 극단도 오태석 대표와 연락이 닿지 않고 있다. 연출가가 잠적하고 여론의 비판이 거세지자 단원들의 불안감은 점점 커지고 있다. 목화의 한 신참 배우는 19일 “선생님이 직통으로 배우와 연락하지는 않으신다. 개인의 일이라 극단 차원에서 어떤 발표를 할 것 같지는 않다”고 말했다. 하지만 20일 오태석 대표의 이름이 기사에 실명으로 공개되자 목화 단원들 역시 외부와 연락을 끊어 버렸다. 21일 공연장에서 만난 목화의 한 중간 기수 배우는 “고참 선배들 지도하에 공연준비를 하고 있다”며 “내부적으로 이 일을 공론화하거나 대책회의를 하지는 않았지만 각자 참담해하며 걱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극단 목화 오태석 대표의 성추행 논란으로 극단 해체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다. 대학로 극단 목화 연습실. 금재은 기자
연극계는 극단이 해체될 수도 있는 초유의 상황에서 구성원들이 이 문제로 대책회의조차 하지 않는 것 자체가 비정상적인 극단의 운영 구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말한다. 목화는 소통방식은 특이하다. 오태석 대표는 휴대폰이 없고 극단 관계자와 직접 연락을 하지 않는다. 오태석 대표의 아내와 그가 신뢰하는 고참 수석배우가 연락책이 돼, 배우들에게 대표의 지시사항을 전달한다고 알려졌다.
목화의 사정에 밝은 인사는 “목화는 여자 둘이서 운영하고 오태석은 연출만 한다고 보면 된다”며 “오태석의 딸이 극단 운영의 큰 그림을 그리면 한 고참 여배우가 이를 실행하며 배우들을 관리한다”고 말했다.
오태석 대표는 지금까지도 외부와 소통하지 않고 잠적해 무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다. 피해자가 제기한 의혹에 대해서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음으로써 더 이상의 추가 폭로도 이뤄지지 않았다. 이윤택 연출의 기자회견이 도리어 추가 폭로의 물꼬를 튼 것과는 상반된 결과다. 하지만 문화계 관계자와 연극인들은 오태석 대표의 잠적이야말로 이번 사태에서 가장 비통한 부분이라고 입을 모은다.
연극계 관계자는 “선생님은 우리 연극 한 세대를 연 사람이고 그 뒤를 수많은 연극인들이 따랐다”며 “진정 후배들과 연극을 생각한다면 잠적이라는 무책임한 태도를 보일 수 있을까. 믿어지지 않는다. 응분의 대가를 치르고 사죄하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현재까지 거론된 인사 말고도 추가 폭로로 떨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연극학과 교수들과 관련해 “언제 터져도 놀랍지 않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미 미투로 폭로된 이윤택, 오태석 등의 부적절한 행동 역시 연극계에서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다음 폭로 대상으로 서울소재 연극학과 A 교수가 거론되고 있다. A 교수는 학생들과 학교 밖에서 따로 만나 식사를 하고 “데이트하자” 등의 말을 일삼은 것으로 알려졌다. A 교수의 한 제자는 “워낙 사건이 많아 거론되는 것 같은데 A 교수가 없으면 학교가 위기를 겪게 돼 폭로를 망설이는 것 같다”고 말했다.
금재은 기자 silo12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