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라도에서 한가한 오후를 보내는 여행객들. | ||
남제주군 대정읍 모슬포항을 떠난 배는 마라도로 가는 도중, 그 어미섬인 가파도 선착장에 잠시 머리를 댄다. 항구에서 겨우 20분, 거리로는 5km밖에 떨어지지 않은 이 섬은 마라도의 이름에 가려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다. 그러나 수려한 경관만큼은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
섬 한 바퀴를 도는 데 걸어서 두 시간이면 충분한 이곳은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섬이다. 보리밭 곳곳에 자리잡은 무덤은 육지 사람들이 보기에 기이한 풍경이 아닐 수 없다. 거의 모든 밭들이 하나 이상의 무덤을 안고 있는데, 그 무덤들은 바다를 배경으로 그림처럼 들어앉아 있다. 이곳에서 무덤은 자연 속에서 숨쉬는 살아있는 존재다. 무덤을 밭 한 가운데 두어도 전혀 거리낌이 없다.
해안선을 따라 걷다보면 어디선가 ‘휘이익’ 하는 휘파람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온다. ‘숨비소리’다. 해녀들이 수면 위로 목을 빼며 물 속에서 버겁게 참았던 숨을 내뱉는 소리. 따라 한다고 낼 수 있는 소리가 아니다. 길게는 5분 넘게 숨을 참으며 자맥질하던 해녀들만 낼 수 있는 생명의 숨소리다.
북동쪽 해안의 돌담은 제주와는 또 다른 분위기다. 다공질현무암으로 쌓은 담이 아니라 해안의 몽돌들을 이용해 쌓았다. 담이라기보다 성벽처럼 느껴진다. 곳곳에는 바람에 무너진 부분이 보이는데, 몽돌들이라 서로 껴안는 힘이 부족해서 허물어진 것이다. 다공질현무암으로 쌓은 돌담은 바람에 무너지는 법이 거의 없다.
가파도에는 수령이 50년 이상 된 나무가 단 한 그루도 없다. 화마 탓이다. 나무가 자랄 만하면 큰불이 섬을 뒤덮었다. 그래서 섬에는 따가운 여름 햇볕을 피할 그늘이 마땅치 않다. 단 한 곳 예외가 있다면 가파초등학교 운동장. 초등학생 13명, 유치원생 4명이 다니는 가파초등학교 운동장 주변으로 2백여 그루의 동백나무와 향나무, 종려나무가 시원한 그늘을 만든다. 여름에 가파도를 찾는 여행객이라면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정보다.
▲ 배 위에서 본 마라도 전경, 바다가 만든 걸작품 ‘해식동굴’(가운데), 가파도 앞바다에서 물질하는 해녀들(맨 아래). 뿔소라와 전복이 주로 잡힌다. | ||
마라도의 해식동굴은 모두 9개. 보통 7m 정도 깊이로 동굴이 나 있다. 수만 년에 걸쳐 파도가 만들어 놓은 걸작품이다.
마라도는 가파도보다 더 작아서 둘러보는 데 1시간이면 족하다. 그래서 여행객들을 싣고온 배도 이곳에 고작 1시간30분 동안 머물 뿐이다.
마라도에 발을 내리면 이국적인 풍광에 먼저 놀라게 된다. 비단결 같은 녹색 잔디가 온 섬을 감싸고 억새와 들꽃, 올망졸망 모인 아담한 집들이 평소 봐왔던 풍경과는 거리가 있다. 또한 푸른 하늘과 그보다 더 짙푸른 바다의 시원스러움이 마음 속 찌꺼기들을 모두 게워내는 듯한 느낌이 드는데, 피안이 있더라도 이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을까 궁금할 정도다.
섬 오른쪽 해안도로를 따라 5분쯤 걷다보면 바다가 보이는 작은 언덕에 ‘초콜릿캐슬’이라는 작은 집이 있다. 남제주군 대정읍에 있는 초콜릿박물관 마라홍보관인 이 건물은 차 한잔 즐기기에 더 없이 좋은 곳이다. 건물 앞 벤치에 앉아 바다로 울려퍼지는 음악을 들으면서 차 한잔 마시노라면 이 세상 모든 행복을 다 안은 듯하다.
이곳에서부터 다시 5분쯤 걸어가면 드디어 우리나라의 최남단에 닿는다. ‘대한민국최남단’이라고 적힌 기념비가 이곳에 있다. 그러나 마라도 사람들은 이곳을 최남단으로 치지 않는다. 관광객들을 위해 단순히 세워놓은 비석으로 치부할 뿐, 그들이 진짜로 최남단으로 인정하는 곳은 따로 있다. 바로 장군바위다. 최남단비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보이는 초라한 장군바위에도 우리나라의 끝을 증명하는 ‘한국최남단’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최남단 기념비가 해군에서 제작한 것이라면 장군바위는 그 옛날부터 이 자리에 있던 진짜 최남단의 상징물인 것이다.
잠시 머무르는 것만으로 이 섬을 다 보았다고는 할 수 없다. 섬의 아름다움에 취한 사람들은 누가 붙잡지 않아도 섬에 남는다. 오늘 떠난 배는 내일 다시 올 터, 미련이 없다.
▲ 그림처럼 내려앉은 마라도의 등대와 성당. 왼쪽 버섯처럼 생긴 건물이 마라도 성당이다. | ||
종다리와 찌르라기 소리, 귀뚜라미와 갖은 풀벌레 소리, 그리고 떠나는 배의 고동 소리, 해안을 때리는 너울의 울음소리, 갈대 부대끼는 소리, 제주를 향해 부는 남동풍에 마라도 등대의 태극기가 펄럭이는 소리, 그리고 등대 옆 풍차 돌아가는 소리. 이 모든 소리는 섬을 위한 자장가 소리에 다름 아니다.
고즈넉이 마라도에도 어둠이 찾아온다. 그 이전에 마라도 남쪽 바다와 하늘은 황금으로 물든다. 해질녘 30여 분 동안 마라도의 평화는 정점에 오른다. 그곳을 찾은 나그네의 마음도 더불어 평화로워진다.
그래서일까. 이 섬은 사람들에게 ‘희망의 섬’으로 불리고 있다. 아픈 가슴을 보듬어 살피고 스스로 일어날 수 있게 하는 치유의 섬. 그곳이 바로 마라도다.
마라도의 한 민박집에서 생활하는 K씨. 마라도에서 만난 그는 한때 서울에서 잘 나가던 식당 사장님. 사고로 다리를 다친 후 술로 끼니를 때우다시피 하며 폐인처럼 지내다 마라도로 내려왔다. 처음에는 섬의 겉모습에 끌렸지만 지내다보니 어머니 같은 편안함에 장기체류를 결정했다. 몸도 마음도 많이 나았지만 아직 그는 마라도를 떠나는 마지막 배를 쳐다볼 수가 없다고 고백했다. 조금만 더 세상에 대한 증오와 회한이 가시면 섬을 떠날 테지만 지금은 때가 아닌 듯하다고. 그와 비슷한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마라도에는 많다. 섬은 점점 더 그들을 강하고 온전하게 할 것이다.
마라도에서 하룻밤을 묵게 된다면 새벽같이 일어나 일출을 보는 즐거움을 누리길 바란다. 등대가 있는 곳에서 바라보이는 일출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푸르스름한 새벽 하늘을 가르며 일순간 붉게 사위를 물들이는 최남단 일출을 보노라면 차오르는 뿌듯함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다.
★가는 길: 제주시 종합터미널에서 서부산업도로나 서회선 일주도로로 운행하는 버스를 이용해 모슬포나 송악산선착장으로 간다.
●모슬포항: 가파도행은 오전 8시30분과 오후 2시에 있다. 요금 3천2백원. 마라도행은 오전 10시와 오후 2시. 요금 5천원.
●송악산선착장: 마라도만 운항한다. 오전 9시30분부터 오후2시30분까지 1시간 간격으로 운항. 요금 1만5천원.
★숙박·먹거리: 마라도에는 KBS <인간극장>에 주인공으로 출연했던 두 형제가 운영하는 별장민박(064-792-3322)을 비롯해 여러 민박집이 자리잡고 있다. 섬에 들어가면 오른쪽으로 민박집들이 즐비하다. 민박은 3만원, 식사는 끼니별로 5천원. 제주 특미인 갈치국과 톳무침 등이 나온다.
마라도에 가면 꼭 맛볼 것 한 가지. 바로 자리돔이다. 어린이 손바닥만한 자리돔은 회로 먹어도 맛있고 구워 먹어도 좋다. 제주도에서는 젓갈을 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