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희 대구 경총 회장이 제공한 2월 19일 회의자료. 자료에는 차기 회장 선출의 건이 안건으로 포함되어 있다.
반면 박상희 회장은 “보이지 않는 손이 개입해 결과를 뒤집었다”며 반발하고 있다.
박 회장은 당시 상황에 대해 “2월 22일 정기총회에서 새 회장을 추대하기 위해 2월 19일 회장단 10여 명이 미리 모여 후임 회장 논의를 했다. 경총 회장은 경영계를 대표해서 정부와 싸워야 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이익은 없고 부담만 커서 맡고 싶어 하는 사람이 없다. 때문에 따로 투표를 하지 않고 미리 회장 후보를 정한 후 정기총회에서 추대하는 방식으로 선임한다”면서 “19일 회의에서도 회장 하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는데 누가 저를 추천해서 그럼 제가 맡아서 해보겠다고 했다. 그 자리에서 저를 회장으로 추대하기로 하고 참석자들이 박수를 쳤고 제가 수락 인사말까지 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경총은 2월 22일 정기총회에서 박 회장을 신임 경총 회장으로 선임하지 않아 사상 초유의 지도부 공백사태를 맞았다.
공식적인 내정이나 추대 절차가 아니었다는 경총 측 주장에 대해서는 “당시 회의 자료를 보면 공식적으로 차기 회장 선출 안건이 올라와 있다. 억지 주장”이라고 일축했다. 실제로 박 회장이 제공한 2월 19일 회의 자료에는 의안으로 차기 회장 선출의 건이 올라와 있었다.
박 회장은 지난 2월 21일 경총 회장 선임과 관련해 언론과 인터뷰도 했다. 박 회장은 “2월 19일 회의는 비공개 회의였는데 기자들이 어떻게 알고 전화를 해왔다. 2월 22일 정기총회에서 통과돼야 회장이 되는 것인데 미리 인터뷰하는 게 부담스럽다고 했더니 기자가 선임된 후에는 바쁘니 미리 인터뷰를 하고 기사는 22일 이후에 내겠다고 했다. 그런데 21일에 기사가 나갔더라. 어찌됐든 당시 회의 참석자들도 제가 회장으로 추대됐다고 인지하고 기자들에게 흘린 것이 아니겠나”라고 주장했다.
분위기가 급박하게 변한 것은 박 회장이 해당 인터뷰에서 김영배 당시 상임부회장을 연임시키겠다고 밝히면서다. 김영배 전 부회장은 지난해 5월 문재인 정부의 고용노동정책에 대해 “세금을 쏟아 부어 일자리를 만드는 것은 임시방편 처방에 불과하다”고 직격탄을 날렸던 인사다.
문재인 대통령은 김 부회장의 발언이 있은 후 이례적으로 “경총은 비정규직으로 인한 사회 양극화를 만든 주요 당사자로서 책임감을 느끼고 진지한 성찰과 반성이 먼저 있어야 한다”면서 직접 대응 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대통령의 질책에 간담이 서늘했을 텐데 김 전 부회장은 이후에도 정부 정책을 비판하는 작심발언들을 쏟아냈다.
박상희 회장의 경총 회장 선임이 무산되면서 김 전 부회장은 임기만료로 상임부회장직에서 물러났다. 차기 상임부회장은 새로 선임된 회장이 지명한다.
김 전 부회장을 연임시키겠다는 박상희 회장의 언론 인터뷰 내용이 알려지자 황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주요 그룹 관계자들에게 손경식 CJ 회장이 경총 회장으로 선임됐으면 좋겠다는 뜻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문화일보 보도에 따르면 황 의원은 상임부회장으로는 최영기 전 한국노동연구원장을 추천한 것으로 알려졌다. 황 의원은 박상희 회장 카드를 무산시키기 위해 정기총회를 하루 앞둔 2월 21일 밤늦게까지 주요 그룹에 참석을 압박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경총 정기총회에는 이례적으로 주요 그룹 부회장들이 모두 참석해 ‘박상희 카드’를 무산시켰다.
박상희 회장은 “제가 16대 국회의원을 지내 정치권에 인맥이 있다. 정부 여러 라인을 통해 확인해봤는데 이번 사태의 타깃은 제가 아니고 김영배 전 부회장이었다고 하더라”면서 “청와대나 여당이 개입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했다”고 주장했다. 취임 후 김 전 부회장을 연임시키려 한 이유에 대해서는 “제가 김 전 부회장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고 당장 그만두게 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문제가 될 줄 몰랐다”고 했다. 김영배 전 부회장은 지난 1979년 입사한 이후 40년 가까이 경총에서 근무해왔으며 상임 부회장직은 14년째 맡고 있었다.
박 회장은 “지난 2월 19일 최초 회의에서도 손경식 회장 추대 이야기가 나왔었다. 당시 참석자들이 손 회장은 80세가 넘은 고령이고 국정농단 재판에도 걸려있는 사람인데 제대로 회장직을 수행할 수 있겠느냐고 해서 그 자리에서 부결이 됐다. 며칠 사이에 이렇게 바뀔 수가 있는 것인지 이해가 안 된다”고 말했다.
회장 선출 개입 당사자로 지목된 황 의원은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황 의원은 최초 보도 당시에는 “국회 대관업무를 하는 선배가 CJ 측 인사를 데리고 찾아와 ‘경총 회장 선임과 관련해서 손경식 CJ 회장을 밀어달라’고 부탁해 ‘알았다’고 말했던 것뿐”이라고 언론에 해명했었다.
그런데 일요신문 취재 결과 손 회장은 경총 회장 선거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확인됐다. 손 회장은 경총 회장으로 선출된 2월 27일에도 인도 출장 중이었으며 2월 25일 회장으로 추대됐다는 연락을 받고도 “생각해 보겠다”며 한동안 뜸을 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황 의원은 이에 대해 “당시 해명 자체가 와전돼 기사에 실린 것이다. 국회 대관업무를 하는 선배가 CJ 측 인사를 데리고 찾아와 잘 봐달라고 부탁하길래 예의상 알았다고 한 것뿐이지 경총 회장 선임과 관련된 이야기는 나오지도 않았다”고 해명했다. 황 의원은 “저는 현재 국토위 소속으로 경총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제가 경총 회장 선출을 앞두고 주요 그룹에 연락을 했다고 하는데 재계에 아는 사람도 없다”고 했다. 황 의원이 지목했던 것으로 알려진 손 회장이 결국 경총 회장에 선임된 것에 대해서는 “저는 전혀 알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황 의원은 노무현 정부에서 청와대 행정관으로 근무했고, 지난 대선 때는 문재인 캠프에서 활동했다. 황 의원은 “저보고 친문(친문재인) 핵심이라고 하는데 대선 이후 민주당 의원들이 단체로 청와대를 찾았을 때를 빼고는 대통령 얼굴도 못 봤다”고 말했다.
그러나 박상희 회장은 경총 회장 선출 과정이 이상했다고 거듭 주장했다. 박 회장이 제공한 자료에 따르면 정기총회를 앞두고 갑자기 전형위원회 위원들이 대거 교체됐다. 평소 경총 회의에 참석하지도 않던 대기업 관계자들이 전형위원으로 포함된 것이다. 전형위원회는 차기 회장을 뽑는 경총 기구다.
박 회장은 “누군가 개입하지 않았다면 예전에는 아무도 맡으려 하지 않아 요식행위였던 회장 선출 과정에서 전형위원까지 중간에 바뀔 이유가 있느냐”고 지적했다. 박 회장은 “제가 파악한 바로는 윤여철 현대차 부회장이 전형위원 교체에 개입한 것으로 알고 있다. 새로 전형위원으로 포함된 대기업 관계자들 외에도 전형위원 대부분이 현대차와 특수관계다. 윤 부회장이 이번 사태를 주도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윤 부회장은 “전혀 사실무근”이라며 “(자신의) 통화기록을 다 뒤져봐도 좋다”고 했다. 다른 전형위원도 외압이 있었느냐는 질문에 “경총 회장 선임 과정에서 외압은 전혀 없었다”면서 여권 개입설에 선을 그었다.
이 같은 의혹에 대해 야당 측은 여권이 경총 회장 선임에 개입한 것이 사실이라면 적폐 중 적폐라며 검찰 수사를 촉구했다. 일요신문은 찍어내기 의혹의 피해 당사자인 김영배 전 부회장 측의 입장도 청취하기 위해 여러 차례 연락을 시도해봤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다.
김명일 기자 mi73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