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 500짯 지폐에 그려져 있는 마하 반둘라 장군의 초상.
충성과 헌신. 이제는 점점 사라져가는 덕목인지라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걸까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옛 버마는 태국 왕조들과 198년간의 긴 전쟁을 하기도 했지만 결코 진 적이 없습니다. 충성스런 용기가 넘쳤기 때문입니다. 국민들의 영웅 마하 반둘라 장군의 짧은 삶에도 그것이 진하게 배어 있습니다. 그는 1782년 태어나 12세에 부친을 잃고 학업을 중단해야만 했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밭일을 하며 어린 동생들을 돌보아야만 했습니다. 청년이 된 그는 승마, 무술, 코끼리 타기에 능했습니다. 키가 173센티미터로 추정됩니다. 1806년 왕세자의 보디가드가 되고 그후 전쟁 공적이 인정되어 버마군대의 총사령관이 됩니다. 수없는 이웃 왕국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둡니다. 그는 담대한 용기를 가졌습니다. 따라서 전술도 담대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지형이 험난한 벵골과 인도국경의 눈보라치는 산을 넘어 진군했습니다.
버마 마지막 왕조인 만달레이 왕궁 안에 있는 마하 반둘라 동상.
영국의 계획은 아예 버마의 남부를 공격해 벵골 국경에서 마하 반둘라의 군대를 몰아내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세계 초강대국인 영국입니다. 이미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페낭을 점령한 시기였습니다. 아치볼드 캠벨 경이 이끄는 영국군은 양곤을 공격했고 쉽게 함락되었습니다. 버마 국민들에겐 충격과 놀라움의 시간입니다. 마하 반둘라는 군대를 이끌고 남부로 향했습니다. 그는 초기의 전투에서 몇 차례 승리했지만 1825년 다누부(Danubyu) 전투에서 전사했습니다. 그의 짧고도 충성스런 일생이 끝났습니다. 그의 죽음과 함께 꼰바웅 왕조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영국은 남부 버마에 이어 아라칸, 테나세림까지 공략했습니다. 영국함대는 버마를 관통하는 이라와디강을 거슬러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당시 버마의 수도 아마라푸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장군을 잃은 버마군은 기세를 잃었고, 영국군이 내놓은 강화조건은 충격적이었지만 1826년 바지도 왕은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굴욕적인 내용의 얀다보(Yandabo) 조약입니다. 아라칸, 테나세림, 아쌈, 마니푸르를 영국에 넘겼습니다. 마하 반둘라가 확장한 영토들입니다. 전쟁배상금으로 1백만 파운드를 주어야 했고, 서쪽의 라카인주와 남쪽의 따닌따리주를 내주어야 했습니다.
마하 반둘라 장군의 이름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사진은 양곤의 마하 반둘라 공원. EPA/연합뉴스
그가 죽은 후의 버마 운명은 완전히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미얀마 국민들은 마하 반둘라 장군이 전쟁터에서 남긴 마지막 말을 기억합니다. 이 시대에 지도자의 용기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느끼게 하는 한마디입니다.
“우리는 전투에서 패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운명입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하고 삶 전체를 지불합니다. 그러나 나는 용기가 없어서, 우리보다 우월한 적과 만나서 전투에서 패했다는 모욕과 불명예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전투에서 최고사령관을 잃음으로 버마인이 전투에서 패배했다는 것을 알게 해주십시오. 이것이 버마인들의 투쟁 정신의 영원한 본보기가 될 것이며, 우리 민족의 명예와 영광을 되찾는 일이 될 것입니다.”
정선교 Mecc 상임고문
필자 프로필 중앙대 문예창작과 졸업, 일요신문, 경향신문 근무, 현 국제언론인클럽 미얀마지회장, 현 미얀마 난민과 빈민아동 지원단체 Mecc 상임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