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을 방문한 대북특사단이 3월 5일 평양에서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과 기념 촬영을 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북한의 최고 실력자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을 반드시 만나 속시원하게 담판을 지어야 하는데 평양으로 가기 직전까지 김 위원장 면담 일정이 오리무중이었던 것이다.
“못 만나, 못 만나. 오늘은 아냐” 특사단 5명 중 ‘상당수’가 방북 첫날인 3월 5일에 김 위원장을 만나기는 힘들 것으로 예상했다. 예전부터 남북간 만남에서는 신경전과 줄다리기가 ‘오랜 전통’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첫날부터 특사단을 깜짝 놀라게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3월 5일 오후 2시 50분쯤 특사단이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 숙소인 고방산 초대소로 이동한 뒤 짐을 풀자 마자였다. 김영철 당 중앙위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이 특사단 숙소로 찾아왔다. 그리고는 “오늘 바로 김 위원장을 면담하고 만찬도 있을 것”이라는 통보를 전격적으로 했다. 긴장감 속에 여장을 풀고 있었던 특사단은 비로소 안도했다. “일이 잘 풀리겠구나!”
#통 크고, 친절한 김 위원장(?)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때 이뤄진 두 차례의 남북정상회담, 그리고 우리 정부가 특사를 북한으로 보냈을 때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상당한 수준의 밀고 당기기 끝에 회담이 진전됐다.
북측에 대해 우리 정부가 했던 관례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실제 지난달 김 위원장의 여동생인 김여정 북한 노동당 중앙위 제1부부장이 방남했을 때 우리 정부는 문 대통령과 오찬이 있을 것이라고만 통보하고 정확한 일정을 알려주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 특사단은 숙소 도착 직후부터 김정은의 빠르고 통 큰 결정을 맞이했다.
평양에 도착한 직후 김정은을 만나게 된 특사단은 김 위원장을 면담하기 위해 북측이 제공한 리무진 승용차를 타고 조선노동당 본부로 갔다. 우리 정부 인사가 북한 노동당사를 방문한 것은 이번이 처음. 그만큼 북측이 우리 특사단을 깍듯이 대우한 것으로 읽힌다.
‘놀람’은 또 이어졌다. 특사단이 노동당 본부 앞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자 불과 수 미터 앞에 김 위원장과 김 제1부부장이 함께 서 있었다. 특사단은 김 위원장이 특사단 하차 장소까지 나와 영접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김 위원장은 정 실장에게 먼저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고 정 실장이 자신의 손을 잡자 다시 두 손으로 정 실장의 손을 잡고 환영의 뜻을 나타냈다.
이어 김 위원장은 서훈 국가정보원장, 천해성 통일부 차관, 김상균 국정원 2차장, 윤건영 청와대 국정상황실장 등 특사단원 전원과 악수하고 일출 사진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후 일행은 접견 장소로 이동했는데 이 자리에서도 김 위원장은 우리 특사단을 정중히 맞이했다.
면담 시작에 앞서 정 실장이 문 대통령의 친서를 김 위원장에게 전달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서자, 김 위원장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 가운데까지 걸어 나왔다. 그리고는 두 손으로 문 대통령의 친서를 받았다.
특사단은 이 장면에서 ‘김 위원장이 솔직, 담백하고, 배려심까지 갖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가졌다고 한다.
자리로 돌아온 김 위원장은 검은 뿔테 안경을 쓰고 문 대통령의 친서를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 문 대통령의 친서는 A4 용지 한 장 분량이었으며, 친서를 모두 읽은 김 위원장은 옅은 미소를 띤 채 배석한 김 제1부부장에게 친서를 건넸다.
#우리가 몰랐던 김 위원장(?)
애초 수석특사인 정의용 안보실장은 김 위원장과의 대화를 어떻게 풀어나갈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정 실장은 수첩에 어떻게 비핵화 의지를 전달할지, 김 위원장이 한미연합훈련 재연기 등을 요구하면 어떻게 설득할지 등 스스로 만든 ‘시나리오’를 가정한 뒤 이를 수첩에 메모해놓고 회담에 임했다.
그러나 김 위원장은 이미 우리 측 입장을 자세히 알고 있었으며, 면담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한미연합훈련 등과 관련해 시원한 말을 쏟아냈다. “어려움을 잘 알고 있다” “이해한다” 등의 말을 내놓더니 이내 대화를 주도해나갔다.
김 위원장은 비핵화 등 북한이 예민하게 여길 것으로 예상됐던 문제에 대해 솔직하게 의견을 드러냈으며, 1시간 남짓 진행된 면담에서 우리가 큰 선물 보따리로 여기는 6개 항의 합의사항(▷제3차 남북정상회담 4월 말 개최 ▷정상간 핫라인 설치 ▷북한의 비핵화 의지 천명 ▷북미대화 용의 ▷대화기간 전략도발 중단 ▷남측 태권도시범단·예술단 평양 방문)을 대부분 확정 지었다. 정 실장이 미리 준비해간 시나리오를 펼쳐들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한 특사단은 이 장면에서 “정권 출범 직후부터 지난한 과정을 거친 남북의 노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고 말했다.
특사단은 무엇보다 김 위원장이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특사단은 김 위원장이 지난해 7월 베를린 구상 이후 이어진 문 대통령의 한반도 구상을 소상히 파악하고 있는 것에 놀랐다고 한다.
김 위원장은 “전 세계의 시선과 국민이 갖는 기대를 잘 알고 있다”고도 언급했다. 남측에서 왜 왔고 세계가 북한에 대해 어떤 요구를 내놓고 있는지 알고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이에 특사단 관계자는 “북한도 쉽지 않은 난제를 푸는 과정인데 여기에서 김 위원장의 리더십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했다. 김 위원장이 여러 사안에 대해 많이 알고, 리더십도 있어서 1시간 남짓한 접견에서도 아주 순탄하게 결과물을 도출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감안해 특사단은 “문 대통령의 축적된 노력과 김 위원장의 숙성된 고민이 합쳐져서 6개의 합의가 나올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김 위원장은 우리 언론이나 해외언론을 통해 보도된 자신에 대한 평가와 이미지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이미지를 소재로 무겁지 않은 농담까지 해가며 여유 있는 모습으로 대화를 이끌었다고 한다.
#북측의 배려 돋보였다
우리 특사단은 평양에 27시간가량 머무르면서 융숭한 대접을 받은 것은 물론, 심적으로도 비교적 편하게 지냈던 것으로 확인됐다.
방북일정 첫째 날인 3월 5일 오후 북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과의 접견을 마치고 김정은 위원장 등 북측 인사들이 퇴장한 가운데 특사단은 10분 정도 접견장에서 휴식을 취한 뒤 만찬장으로 이동했다. 접견 장소와 만찬장은 바로 붙어 있는 구조였다.
특사단이 만찬장의 문을 열자마자 특사단은 또 한번 놀랐다. 김 위원장과 그의 부인 리설주가 특사단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특사단 5명 모두와 악수하고 따뜻하게 인사했다.
만찬장 분위기를 더욱 편하게 만든 것은 김 위원장의 동생인 김여정 당 중앙위 제1부부장이었다. 지난달 평창동계올림픽 개회식 참석차 방남했을 때 이미 식사를 함께해 특사단과 구면이었던 만큼 김 제1부부장은 “북한 음식이 입에 맞습니까”라고 연신 물으며 특사단을 챙겼다.
테이블 위에는 와인과 북한식 인삼주인 ‘수삼삼로’ 외에 전통주도 많았지만, 특사단과 북측 일행은 와인 한 잔만 하고 이후에는 양측 모두 평양 소주만 마셨다.
북측은 방남 때 들었던 남측 인사들의 이야기를 기억했다가 이를 오·만찬 메뉴에 적용했다. 청와대에 따르면 북한 고위급 대표단이 방남했을 때 우리 측 인사가 ‘평양은 냉면이 최고라던데 맛보고 싶다’, ‘평양식 온반은 어떤 음식인가’라고 말했는데 이 얘기가 고스란히 메뉴에 반영된 것이다.
첫날 만찬에서는 바로 온반이 나왔다. 북측은 평양냉면 얘기도 기억하고 있다가 둘째 날 점심때 냉면으로 유명한 옥류관으로 특사단을 안내했다.
김영철 북한 노동당 중앙위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은 “원래 평양 인민들은 냉면을 두 그릇씩 먹는다”면서 특사단에 냉면을 더 권했다. 특사단 중 한 명은 녹두지짐을 많이 먹어서 배가 불렀는데도 결국 냉면을 한 그릇 더 먹었다.
옥류관 냉면은 꿩으로 육수를 낸 뒤 닭으로 다시 국물을 우려내 오래 끓인 육수로 만들어서 남측에서 파는 평양냉면과는 맛이 달랐다는 게 특사단의 전언이다.
특사단은 “화려하고 극진한 대접이라는 인상보다 세심하고 정성어린 환대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공포분위기 전혀 없었다
청와대는 특사단이 ‘국빈급 경호’를 받았다고 하면서도 구체적인 경호 방식은 문재인 정부의 ‘열린 경호’와 비슷했다고 말했다. 예전에 평양에 가면 대부분이 일대일로 남측 인사들을 ‘마크’했지만 이번에는 특사단을 보호하면서도 부담을 주지 않는 방식으로 자유를 보장, 부담을 전혀 주지 않으려는 모습이 돋보였다고 청와대는 설명했다.
북한은 숙소인 고방산 초대소 건물 한 층을 특사단이 통째로 쓸 수 있게 했다. 이런 상황에서 북측 경호원들은 해당 층의 양쪽 출입구만 지킬 뿐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덕분에 특사단은 1층에 커피를 마시러 가거나 경내를 산책하는 데 간섭을 받지 않고 비교적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었다.
고방산 초대소에는 특사단이 필요로 하는 물품도 잘 준비됐다. 숙소에 있던 TV를 켜니 KBS, MBC, 드라마채널 등 남측 채널을 비롯해 CNN, CCTV 등 전 세계 방송도 시청할 수 있었다.
인터넷 환경도 잘 준비돼 있어서 특사단은 네이버, 다음 등 국내 포털을 자유롭게 이용해 국내 뉴스를 실시간으로 검색했다.
#통신 교통수단은?
대북 특사단은 비화(秘話) 팩스와 위성전화를 가져가 통신 체계를 유지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특사단은 위성전화는 거의 쓰지 않고 비화 팩스를 통해 청와대 상황본부에 모든 상황보고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비화 팩스의 보안성이 가장 좋기 때문이다. 방북 첫날 오후 6시부터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과 접견 및 만찬을 갖기로 했다는 내용도 팩스로 날아왔다.
비화 팩스는 암호화된 신호로 전송돼 상대가 알 수 없고 우리만 해석할 수 있는 장비다. 위성 전화는 도·감청의 우려가 상대적으로 크기 때문에 긴급 상황에만 사용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특사단의 평양 활동 사진은 위성망으로 전송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특사단에는 국내 취재진은 물론이고 청와대 전속 사진단도 포함되지 않았다. 특사단은 수행단이 직접 찍은 사진 3장을 전자우편으로 청와대에 전송했고, 청와대는 이를 언론에 공개했다.
한편 특사단은 평양에 갈 때 대통령 전용기인 공군 2호기를 타고 갔다. 이 비행기는 흔히 대통령 전용기로 알려진 ‘공군 1호기’와는 전혀 다른 기종. 공군 1호기는 대통령의 해외 순방에 이용되며, 일명 ‘코드 원’으로 통하는데 대한항공 소속 보잉 747-400(2001년식) 여객기를 임차해 사용 중이다.
공군 2호기는 민간항공사가 아닌 공군 소유다. 다만 2호기는 기체가 작고 항속거리가 짧아 사실상 국내용으로만 용도가 제한된다. 탑승 가능 인원도 40여 명에 불과하다. 2호기는 전두환 전 대통령 재임 시절인 1985년 도입한 보잉 737-3Z8 기종이다.
이 비행기도 과거에는 1호기로 불렸으나 민간항공사 소유의 여객기를 임차해 대통령의 해외 순방에 사용하면서 2호기가 됐다. 2호기는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과 2003년 1월 임동원 대통령 외교안보통일 특보가 방북했을 때도 이용됐다.
최경철 매일신문 서울 정경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