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4월말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판문점 평화의집에서 제3차 남북정상회담을 갖기로 했다. 사진은 합성.
“평양을 다녀왔습니다.”
역사는 197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는 한국전쟁 후 남북이 서로를 인정하지 않던 때였다. 남북한은 1971년 1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한국적십자사 정홍진과 북한적십자사 김덕현을 실무자로 해 판문점에서 비밀접촉을 가졌다. 이 만남을 통해 1972년 5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평양을 비밀리에 방문해 북한 김일성 주석을 만났고, 북한 역시 박성철 노동당 2부수상이 서울을 찾아 남북한 사이에 정치적 의견 교환이 처음으로 이뤄졌다.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왼쪽)이 1972년 11월 비밀리에 방북해 평양에서 열린 제2차 남북조절위원장회의에 참석해 김일성 주석과 악수하고 있다. 사진=일요신문DB
이러한 접촉의 성과는 ‘7·4 남북공동성명’이라는 결과물로 이어졌다. 이는 국토분단 이후 남북이 최초로 통일과 관련해 합의발표한 공동성명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특히 이 성명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해야 한다’ ‘사상과 이념 및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해야 한다’고 밝힘으로써,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이라는 통일 3대원칙을 처음 내세웠다. 분단 27년 만에 처음 합의한 이 3대원칙은 이후 남북한간에 이뤄진 모든 접촉과 대화의 기본지침이 됐다.
이렇게 남북 대화의 물꼬가 터지는 듯 싶었으나, 한국에서 10월 유신헌법 선포와 북한의 사회주의 헌법 채택, 박정희 전 대통령의 6·23 선언 등을 계기로 남북 대화는 다시 교착상태에 빠지게 됐다.
1980년대 전두환 정부 들어서 적십자, 국회, 경제, 체육 등 여러 분야에서 남북회담이 성사됐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1985년 당시 장세동 안기부장과 박철언 특보를 보내 김일성 주석에게 친서를 전달하기도 했다.
남측 대표 정원식 총리와 북측 대표 연형묵 총리의 서명이 들어간 남북기본합의서. 사진=연합뉴스
노태우 정부에서 다시 남북한 사이에 공동 합의서를 이끌어냈다. 1991년 12월 13일 서울에서 열린 제5차 고위급회담에서 나온 ‘남북기본합의서’가 그것이다.
이후 합의서는 1992년 2월 평양에서 열린 제6차 고위급회담에서 합의서 문건을 정식 교환하고, 9월 제8차 회담에서 최종적으로 3개 부속합의서를 채택하면서 효력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서문과 4장 25조로 이뤄진 남북기본합의서는 7·4 남북공동성명에서 천명한 조국통일 3대원칙 재확인과 민족 화해 이룩, 무력 침략과 충돌 방지, 긴장 완화와 평화 보장, 교류 협력을 통한 민족 공동의 번영 도모, 평화통일을 성취하기 위한 공동의 노력 등을 규정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1991년 남북 고위급 회담에서 기본합의서에 서명한 후 청와대를 예방한 남북 대표단과 기념촬영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하지만 이 합의서 내용은 1993년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 탈퇴를 시도, 남북 관계가 다시 경색되면서 사실상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남북기본합의서와 함께 남북정상회담도 처음으로 제안됐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책 ‘김우중과의 대화’에서 “10년가량 북한을 오가면서 김일성 주석,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단 세 명이서만 20번 이상 만났다”며 노태우 전 대통령 때부터 ‘대북특사’로 남북정상회담을 주선했다고 밝혔다.
김영삼 정부에서 남북정상회담을 갖기로 일정을 잡았지만, 김일성 주석이 갑자기 사망해 결국 무산됐다. 사진=일요신문DB
1994년 7월 9일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김일성 주석이 갑자기 사망하면서 비상 국무회의를 주재한 김영삼 전 대통령. 사진=연합뉴스
이어 김영삼 정부에서는 남북정상회담이 성사 직전까지 갔다. ‘1994년 7월 25일 평양’에서라는 구체적인 회담 일정까지 잡혔다. 하지만 회담을 며칠 남기고, 김일성 주석이 갑자기 사망하는 바람에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이후 첫 남북정상회담은 2000년 김대중 정권에서 이뤄졌다. 그해 3월 정상회담을 위한 비밀접촉에 이어 김대중 전 대통령의 ‘베를린 선언’, 특사간의 접촉으로 4월 10일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정상회담 개최 일정을 발표했다. 당초 일정은 6월 12일부터 14일까지였지만, 북한이 ‘기술적인 준비관계’를 이유로 일정을 하루 연기했다.
2000년 6월 13일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한 김대중 대통령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악수를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0년 6월 13일 평양 순안 공항에서 역사적인 첫 만남을 가졌다. 체류기간 동안 양 정상은 두 차례의 회담을 진행했으며, 그 결과 ‘‘6·15 남북공동선언’을 발표했다.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백화원 영빈관에서 정상회담에 앞서 환담을 나누고 있다. 사진=일요신문DB
6.15 남북공동선언으로 이산가족방문단 교환, 남북장관급회담, 남북 경제협력추진위원회 구성 등이 이뤄졌으며, 다양한 분야에서 교류 협력이 본격적으로 진행됐다.
참여정부 수립 이후 임기 초반에는 대북송금 특검 등으로 남북관계가 다소 경색됐다. 하지만 2007년 ‘2·13 합의’ 이후 북핵 문제가 진전되면서 남북관계도 정상화돼 제2차 남북정상회담까지 이끌어냈다.
당초 김만복 국정원장이 대통령 특사자격으로 방북해 합의한 날짜는 2007년 8월 28일부터 30일까지였다. 하지만 준비기간 중 북한이 수해를 입어 일정이 같은해 10월 2일부터 4일까지로 연기됐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평양으로 항하며 군사분계선을 도보로 넘고 있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 권양숙 여사. 사진=청와대 사진기자단
1차 회담과 달리 2차 회담은 육로를 통해 북한을 방문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국가 원수로는 처음으로 도보를 통해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김정일 위원장은 4·25 문화회관 앞에서 평양으로 들어오는 노 전 대통령을 맞이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2007년 평양에 도착, 4.25 문화회관 광장에서 열린 공식환영식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함께 북측 의장대를 사열하고 있다.사진=청와대 사진기자단
두 차례에 걸친 회담 논의 결과를 토대로 양 정상은 10월 4일 남북관계의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10·4 남북공동선언’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명박·박근혜 보수정권이 들어서면서 남북관계는 사실상 단절됐다. 북한의 도발도 남북관계에 걸림돌이 됐다. 2008년 남한 관광객 피격으로 금강산 관광이 중단됐다. 이어 2010년 3월 26일에는 백령도 인근 해상에서 천안함이 북한의 어뢰공격으로 피격돼 침몰, 해군 장병 46명이 사망하고 실종됐다. 같은해 11월 23일 북한이 연평도를 향해 포격을 가해 해병대원 2명이 전사하고 민간인 2명이 사망하는 등 위기상황이 전개됐다. 심지어 남북간의 완충지대 역할을 했던 개성공단도 2016년 2월 10일 문을 닫았다.
2016년 박근혜 정부의 개성공단 운영 전면 중단 발표에 철수를 시작한 업체 화물차량들이 파주시 경의선 남북출입사무소를 통해 통일대교 검문소를 지나고 있다. 사진=임준선 기자
또한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은 지난 2011년 집권 이후 4차례 핵실험과 수십여 발의 탄도미사일을 발사해 한반도에 전운이 감돌게 했다.
물론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 역시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했다고 한다. 2009년 이 전 대통령의 측근인 임태희 당시 새누리당 의원이 제3차 정상회담을 위해 싱가포르에서 김양건 노동당 통일전선부장과 비밀회동을 가졌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2011년에는 김태효 청와대 대외전략기획관 등이 베이징에서 북측 인사와 회동, 정상회담 추진을 논의했으나 결국 무산된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북한은 이후 언론 등을 통해 “회동 자리에서 남측이 돈봉투를 주면서 정상회담을 애걸복걸했다”고 주장해 논란을 일으켰다.
문재인 대통령이 2월 10일 청와대에서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여동생 김여정 노동당 중앙위 제1부부장에게 김정은 위원장의 친서를 받고 있다. 사진=청와대
박근혜 전 대통령은 2015년 한 친박 전직 의원을 김양건 부장 측에 보내 정상회담 일정을 조율한 것으로 전해졌다. 또한 ‘최순실 게이트’가 한창이던 2016년 11월쯤 일부 친박 의원들이 출구 전략의 일환으로 정상회담을 추진했던 것으로 알려져 문제가 됐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 북한을 방문 중인 정의용 수석 대북특사 등 특사단이 5일 평양에서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과 면담하고 있다. 북측에서는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 등이 배석했다. 2018.03.06. 청와대사진기자단 제공
문재인 정부는 지난해 출범 이후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대북 제안을 끊임없이 시도했고, 그 성과가 보이기 시작했다.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김여정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이 김일성 가문 인사로는 최초로 한국을 방문했다. 김여정의 청와대 방문과 대북 특사의 방북으로 오는 4월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11년 만에 세 번째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하게 됐다.
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
[언더커버]남북정상회담 성사 앞과뒤3-문재인 발 북풍, 지방선거판 영향은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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