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아무래도 경기 시간 단축 대책과 관련한 가장 상징적인 ‘사건’은 자동 고의4구 도입이다. ‘자동 고의4구’는 말 그대로 한 팀이 고의4구 의사를 밝혔을 때 투수가 투구를 하지 않고 타자를 그냥 1루로 내보낼 수 있는 룰이다. 이전처럼 포수가 일어서서 공 4개를 받아야 하는 형식적 절차를 없앤 것이다. 메이저리그가 먼저 총대를 메자 곧바로 일본이 뒤를 따랐고, KBO 리그도 올해 발 빠르게 도입을 결정했다. 전 세계 야구계가 ‘스피드 업’이라는 화두에 사활을 걸고 있다는 사실이 다시 한 번 입증됐다.
# 고의4구를 둘러싼 심리전
고의4구는 검의 양날과도 같다. 1점 차 1사 2·3루에서 1루를 고의4구로 채운 뒤 다음 타자에게 더블플레이를 유도했을 때의 짜릿함은 무척 크지만, 반대로 싹쓸이 적시 3루타가 나와 불필요한 점수까지 잃었을 때의 아쉬움도 두 배로 커진다. 이 때문에 “개인적으로 고의4구 사인은 웬만한 상황이 아니면 내지 않는다. 실패했을 때의 위험 부담이 너무 크다”고 말하는 감독들도 적지 않다. 또 고의4구는 상대 타자들에게 심리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작전이다. 고의4구를 얻어내는 타자에게는 은근한 자부심을, 바로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며 대기하는 타자에게는 묘한 굴욕감을 각각 안긴다. 아무리 1루가 비어 있어도 승부하기 쉬운 타자에게는 굳이 고의4구로 주자를 한 명 더 채우는 무리수를 두지 않기 때문이다.
넥센 박병호 선수가 고의 4구를 얻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실제로 한 팀을 대표하는 타자들에게는 절체절명에서 나오는 고의4구가 남다른 존재감을 증명하는 에피소드로 남기도 한다. 1998년 메이저리그에선 애리조나의 벅 쇼월터 감독이 8-6으로 2점 앞선 8회 2사 만루서 샌프란시스코 대타 배리 본즈를 상대로 고의4구를 지시해 화제가 된 적도 있다. 본즈의 장타로 동점 혹은 역전을 허용하느니 차라리 밀어내기 볼넷으로 1점을 주고 실점을 최소화하겠다는 작전이었다. 실패했다면 손가락질을 받았겠지만, 애리조나는 결국 본즈 다음 타자를 범타로 잡아내는 데 성공했다. 경기는 8-7로 끝났다.
그러나 상대를 잘못 선택하면 대기 타석에 서 있는 다음 타자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부작용도 생긴다.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잘못 건드렸다가는 괜히 잠에서 깬 사자에게 역습을 당하기 마련이다. 2010년 롯데와 두산의 준플레이오프 2차전이 대표적이다. 양 팀은 1-1로 팽팽하게 맞선 채 연장 10회까지 승부를 끌고 갔다. 홈팀이었던 롯데는 마지막 공격에서 선두 타자의 안타와 후속 타자의 희생 번트로 1사 2루 기회를 맞았다. 롯데의 다음 타순은 베테랑 조성환과 4번 타자 이대호. 둘 다 두산 입장에선 만만치 않은 타자였다. 다만 조성환은 이날 이미 안타 두 개를 때려내면서 좋은 타격감을 과시했고, 이대호는 이날 앞선 네 타석에서 안타 없이 돌아섰다는 점이 달랐다. 결정적으로 이대호의 발목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두산은 결국 조성환을 걸러 1루를 채우고 이대호와 승부하는 쪽을 택했다. 이날 유독 무거워 보이던 이대호의 배트가 다시 한 번 헛돌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미 네 타석 연속 침묵했던 이대호가 확률 상 이제는 ‘한방 칠 때가 됐다’는 점을 간과해 버렸다. 아무리 컨디션이 좋지 않아도 이대호는 ‘이대호’다. 이대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앞 타자 고의4구’라는 생경한 풍경을 지켜봤다. 그리고 이어진 1사 1·2루서 좌월 끝내기 3점 홈런을 날렸다. 그는 경기 후 인터뷰에서 “아주 재미있는 상황이었다”며 다시 한 번 웃었다.
# 유독 거셌던 찬반 논란, 왜?
이렇게 포수가 일어서서 투수가 던지는 공 네 개를 받고, 타석과 대기타석의 두 타자가 서로 다른 표정과 마음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는 장면은 더 이상 야구장에서 볼 수 없게 됐다. 앞으로는 더그아웃에 있는 감독이 고의4구 수신호를 보내면, 투수는 공을 던지지 않고 타자는 자동으로 1루에 출루한다. 메이저리그가 도입한 ‘자동 고의4구’가 일본과 한국에 안착했다.
특히 일본의 발 빠른 움직임은 놀라움을 안겼다. 일본 야구계는 야구의 정통성을 중시하고 보수적인 성향이 짙기로 유명하다. 비디오 판독 도입도 세 리그 가운데 가장 마지막까지 고민하고 망설였다. 그러나 올해 1월 일본 야구규칙위원회가 자동 고의4구를 공식 야구규칙에 추가하기로 결정하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KBO 리그가 올 시즌부터 자동 고의4구를 활용하기로 신속하게 결정한 데에는 일본의 선택이 큰 영향을 미쳤다. 야구 관계자들은 “세계야구소프트볼연맹이 메이저리그 사무국의 영향으로 자동 고의4구를 규칙에 추가했고, 이 때문에 2020년 도쿄올림픽에서도 자동 고의4구가 시행된다”며 “아무래도 도쿄올림픽을 포함한 국제대회에서도 이 룰이 채택된 영향을 일본도 크게 받은 듯하다”고 분석했다.
야구계에서는 여전히 자동 고의4구에 대해 찬반의 시선이 오간다. 찬성하는 쪽은 역시 ‘스피드 업’과 국제 야구의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을 이유로 꼽는다. 물론 경기 도중 고의4구를 직접 던져야 하는 투수들도 절대적인 찬성파다. 혹시 모를 실수를 방지할 수 있어서다.
한국시리즈 5차전 7-6으로 앞선 9회 1사 2·3루 상황에서 2017시즌 첫번째 고의4구를 던지고 있는 양현종. 방송 화면 캡쳐
지난해 최고 투수였던 양현종도 자동 고의4구 도입을 반겼다. 그는 지난해 정규시즌에선 고의4구를 하나도 던지지 않았지만, 한국시리즈 최종전인 5차전에서 7-6으로 앞선 9회 1사 2·3루서 구원 등판했다가 두산 허경민을 고의4구로 내보내는 만루 작전을 펼쳤다. 2017년에 양현종이 던진 유일한 고의4구였다. 그는 “고의4구는 스트라이크 존에 던지는 것과는 밸런스가 다르다. 고의4구 다음에는 병살타나 중요한 타자와 승부를 염두에 둬야 한다”며 “(고의4구를 던지다) 갑자기 세게 던지면 밸런스에 문제가 생긴다. 선수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는 밸런스에 민감한 스타일이라 개인적으로 긍정적”이라고 설명했다.
반면 반대하는 쪽은 “야구의 묘미를 잃게 된다”는 아쉬움을 표현한다. 메이저리그와 일본에서도 같은 이유로 비슷한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야구 경기에는 늘 변수가 가득하고, 또 그 변수로 인해 환희와 절망이 오가는 드라마가 펼쳐진다. 고의4구는 그 ‘드라마’를 더 풍성하게 만들어 주는 중요한 ‘변수’ 가운데 하나였다. 대부분 2루나 3루에 주자가 있을 때 고의4구를 선택하기 때문에 자칫 투수와 포수의 호흡이 맞지 않아 공이 뒤로 빠지기라도 하면 곧바로 실점과 연결되거나 경기의 흐름을 뒤흔드는 결과를 낳는다. 축구의 페널티킥처럼, 웬만해서는 실수를 하지 않지만 같은 이유로 실패했을 때 심리적 부담이 더 큰 게 바로 고의4구다.
“고의4구가 경기 시간 단축에 실제로 큰 효과를 주지 못한다”는 주장도 종종 나온다. 자동 고의4구 도입 첫 시즌인 지난해 메이저리그에선 고의4구가 970개로 전년보다 38개가 늘었다. 2.5경기당 하나꼴로 나온 셈이다. 또 고의4구 하나가 나오는 데 1~2분 정도 시간이 걸리면서 시간 단축에는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실제로 지난해 정규이닝 기준 메이저리그 평균 경기시간은 2016년(3시간 42초)보다 4분29초 늘어난 3시간 5분 11초로 집계됐다.
# 이제는 추억이 될 ‘고의4구 폭투’
가끔씩 야구팬들의 기억 속에 ‘소환’되는 고의4구 폭투도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아무래도 가장 유명한 장면은 2013년 10월 9일 목동구장에서 열린 두산과 넥센의 준플레이오프 2차전에서 나왔다. 두산이 1-0으로 앞선 8회말 2사 2루서 넥센 타석에 박병호가 들어서자 두산 포수 양의지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해 홈런왕과 타점왕을 석권한 타자다.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문제는 두산 마운드에 있던 투수 홍상삼의 초구가 양의지의 머리 위를 넘어 백스톱까지 날아갔다는 점이다. 편안한 마음으로 공을 기다리던 양의지가 어안이 벙벙해진 사이 넥센 2루 주자 서건창이 3루까지 밟았고, 두산 벤치는 얼어붙었다. 양의지는 결국 전략을 바꿔 홍상삼의 공을 앉아서 받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초구 폭투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홍상삼은 자리에 앉은 양의지를 향해 큼직한 원바운드 폭투를 던졌다. 공은 다시 옆으로 튀어 나갔고, 3루 주자 서건창은 홈을 밟았다. 박병호가 스윙 한 번 하지 않고도 넥센이 동점 점수를 뽑았다. 홍상삼은 8회에만 폭투 3개를 범하면서 역대 포스트시즌 한 이닝 최다 폭투 불명예 기록을 썼다.
한화 베테랑 불펜 박정진도 유망주 시절 고의4구 폭투로 인한 아픔을 겪었다. 2003년 5월 8일 LG와의 잠실 더블헤더 1차전이었다. 한화가 2-1로 앞선 7회에 2사 2·3루 위기를 맞자 한화 포수 조경택은 고의4구 작전을 선택하고 자리에 일어섰다. 그러나 박정진의 공은 두 차례나 땅으로 낮게 깔려 포수 뒤로 흘렀다. 동점이 됐고, 승리가 날아갔다. 박정진은 그 후 제구가 마음대로 되지 않는 ‘입스(Yips·두려움으로 인한 심리적 불안)’ 증상에 시달려 선수 생활에 위기를 맞기도 했다.
고의4구 과정에서의 폭투에 대비한 4차원 시프트.
그리고 또 하나. 고의4구 폭투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장면이 있다. 김기태 KIA 감독이 2015년 5월 13일 광주 kt전에서 선보였던 기상천외한 시프트다. 당시 김 감독은 5-5 동점으로 맞선 9회 2사 2·3루 김상현 타석에서 고의4구를 지시한 뒤 혹시 모를 폭투를 막기 위해 3루수 이범호를 포수 뒤로 보내는 시프트를 지시했다. 마운드에 있던 심동섭이 평소 제구가 불안한 투수라는 점을 감안한 작전이었다. 모두가 깜짝 놀란 파격적 시도이기도 했다.
이른바 ‘4차원 시프트’로 불렸던 이 수비형태는 사실 애초에 시프트로 인정될 수 없는 그림이었다. ‘포수를 제외한 모든 야수는 페어그라운드에 위치해야 한다’는 야구규칙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문승훈 3루심이 곧바로 지적하면서 이범호는 원래 자신의 자리인 3루로 돌아갔지만, 다음 날 메이저리그와 ESPN이 이 영상을 홈페이지에 소개하면서 국제적인 유명세를 탔다. 김 감독은 다음 날 “나의 야구 공부가 부족해서 생긴 일”이라고 깨끗하게 인정했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
“아, 존심 상해” 우에하라 고의4구 지시받고 눈물 고의4구는 그저 단순히 ‘자동 볼넷’이 아니다. 한 선수의 자존심과 투지가 녹아 있는 야구의 한 요소다. 일본에선 고의4구를 던지기 싫어서 눈물을 흘린 투수도 있다. 일본 최고 명문구단 요미우리의 에이스였던 우에하라 고지가 그 주인공이다. 우에하라는 요미우리 입단 첫 해인 1999년 20승 4패 평균자책점 2.09라는 압도적인 기록을 올리면서 다승, 탈삼진, 평균자책점, 승률 1위에 올랐다. 트리플 크라운을 넘어서는 투수 4관왕. 한국과 미국, 일본을 통틀어 신인이 20승을 차지한 사례는 우에하라가 유일하다. 당연히 우에하라는 그해 센트럴리그 최우수 투수상과 신인왕, 사와무라상까지 모두 석권하면서 단숨에 요미우리 최고 스타로 떠올랐다. 바로 그해 문제의 ‘눈물’ 사건이 벌어졌다. 일본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거포 마쓰이 히데키도 아직 요미우리에서 뛰던 시절이다. 마쓰이는 당시 야쿠르트에서 뛰던 외국인 타자 로베르토 페타지니와 엎치락뒤치락 홈런왕 경쟁을 펼쳤다. 1999년 10월 5일 야쿠르트와 시즌 최종전을 앞두고는 페타지니가 42개, 마쓰이가 41개를 기록 중이었다. 이날 요미우리 선발 투수는 바로 거칠 것 없이 앞으로 나아가던 신인 투수 우에하라였다. 그리고 페타지니가 세 번째 타석을 앞두자 우에하라에게 고의4구를 지시했다. 페타지니와 정면승부를 피해 마쓰이에게 홈런왕이 될 기회를 만들어주려는 요미우리의 작전으로 여겨졌다. 그때 우에하라가 갑자기 분한 듯 마운드의 흙을 발로 차기 시작했다. 이어 모자를 끌어내려 얼굴을 가린 채 유니폼 소매로 눈가를 훔쳤다. 도쿄돔을 가득 채운 3만 관중이 젊은 에이스의 갑작스러운 눈물에 술렁거렸다. 우에하라는 결국 감독의 지시를 거스르지 못한 채 페타지니를 고의4구로 내보냈지만, 한동안 얼굴이 붉어진 채 감정이 상한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 우에하라는 경기 후 “땀이 많이 흘러서 땀을 닦은 것뿐”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그 말을 믿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일본 언론은 당시 “열정과 자신감이 넘치는 우에하라에게는 전력투구하지 못하는 공 네 개가 무척 분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어쨌든 우에하라는 이 경기 승리 투수가 돼 시즌 20승 고지를 밟았고, 남다른 투지를 앞세워 오랫동안 요미우리 에이스로 사랑받았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