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직 대통령 신분으로, 지난 14일 서울중앙지방검찰청사에 피의자로 모습을 드러낸 이명박 전 대통령. 전두환, 노태우, 노무현, 박근혜 전 대통령에 이어 전직 대통령으로는 5번째 불명예였다. ‘실용 보수’를 내세우며 ‘도덕적으로 깨끗하다’고 외쳤던 이 전 대통령이었지만, 20가지에 달하는 혐의, 그리고 소환 당일 검찰을 찾은 몇 되지 않는 지지자들은 초라해진 이 전 대통령의 모습을 여실히 증명했다. 검찰이 현재 확정한 이 전 대통령 뇌물혐의 액수는 총 110억여 원. 혐의와 금액만큼이나 조사는 오래 진행됐다. 무려 21시간에 걸쳐 조사가 이뤄졌지만 이 전 대통령은 지친 기색 없이 답변을 하고, 조서를 꼼꼼히 확인했다고 한다.
국가정보원 특수활동비 유용 및 민간으로부터 불법자금 수수 혐의, 다스를 통한 수백억 비자금 조성 혐의 등을 받고 있는 이명박 전 대통령이 14일 오전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하고 있다.
이 전 대통령이 조사를 받은 곳은 서울중앙지검 10층 1001호. 박근혜 전 대통령이 조사를 받은 곳이기도 하다. 점심과 저녁 모두 이곳에서 해결했다. 이 전 대통령은 점심으로 설렁탕을, 저녁으로 곰탕을 선택했다. 메뉴는 검찰과 이 전 대통령 측과 상의해 인근 식당에서 주문했고, 이 전 대통령은 식사를 남기지 않고 깨끗이 비웠다.
평소 테니스로 체력을 다진 이 전 대통령은 21시간에 달하는 수사 과정 내내 ‘불편한 내색’ 없이 답변을 이어갔다는 게 수사팀의 후문. 수사팀 관계자는 “이 전 대통령이 수사를 하는 신봉수 부장검사 등에게 검사님이라고 불러줬다, 그게 우리를 더 존중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우리도 나름 예우를 갖춰서 이 전 대통령을 존중했다”고 수사 분위기를 설명했다.
질문은 검찰이 객관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이 전 대통령에게 사실 관계를 묻는 방식이었다. 이 전 대통령은 검찰의 질문에 “검사님,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라고 답하거나, “자료가 조작된 것 같습니다”라며 부인했다. 이에 검찰은 “그렇다면 어느 부분까지 인정하시겠습니까?”라고 물으며 이 전 대통령 측이 구체적인 입장을 듣는 구조였다.
“사실상 전부 부인했다고 보면 된다”는 게 수사팀의 설명. 검찰은 “본인은 전혀 알지 못하는 내용이며, 설사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실무진에서 한 일이다, 나는 몰랐다”는 내용으로, 이 전 대통령이 일관된 답변을 내놔 수사가 길어지지 않았다고 답했다. 이 전 대통령 입장에선 본인을 압박하는 자료와 측근들의 증언 진술이 쏟아졌지만, 새벽까지 이어진 조사 내내 화를 내거나 감정의 동요를 크게 일으키지도 않았다. 검찰 관계자는 “수사 중에 고성이 있었느냐”는 질문에 “그럴 리가 있었겠느냐”며 “대부분 혐의를 부인했기 때문에 (언쟁도 있을 게 없다)”고 덧붙였다.
# 검찰 비장의 카드 김윤옥 여사 혐의…MB, 흔들리지 않고 ‘인정’
검찰의 몇 가지 고민 중 하나인 이 전 대통령 부인 김윤옥 여사. 김 여사는 이 전 대통령의 범죄 혐의에 상당히 깊숙이 관여돼 있다. 김 여사는 국가정보원 돈 10만 달러(1억여 원)를 받은 혐의 외에도, 성동조선이 이팔성 전 우리금융지주 회장에게 건넨 22억 원 중 5억 원을 받은 정황도 받고 있다.
모든 혐의를 부인했던 이 전 대통령이지만, 이 중 김 여사가 받은 국정원 돈 10만 달러는 혐의를 인정했다. 지난 2011년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마련한 1억여 원을 김 여사 측에서 받은 게 맞다는 것. 사용처에 대해서는 “대북 관련 공작금으로 활용했다”는 맥락으로 답한 것으로 알려졌다. ‘부정하게 사용하지 않았다’는 취지로 인정한 셈이다. 하지만 이팔성 회장-사위 이상주 삼성전자 전무를 통해 전달된 5억 원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내용”이라고 일관했다.
이 전 대통령이 부인의 혐의에 대해 “모른다”고 진술한 탓에, 자연스레 ‘김윤옥 여사’에 대한 검찰 직접 조사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한 검찰 관계자는 “원래 기업 범죄도 그렇고, 오너 일가의 책임은 한 명이 지는 게 일반적”이라면서도 “문제는 범죄 내용이 구체적으로 소명이 안 됐을 경우 이를 확인할 필요도 있다. 때문에 검찰 수사팀이 김 여사에 대해 서면으로 조사하거나 방문 조사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검찰 수사팀 역시 “김 여사에 대한 조사 일정이나 필요성을 현재로서는 결정하지 않았다”며 김 여사에 대한 조사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음을 내비쳤다.
# 110억 혐의 대부분 부인한 멘탈갑 MB…검찰 자료에 당황하기도
일관되게 혐의를 부인한 이 전 대통령이지만, 조사 도중 검찰의 예리한 공격에 당황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중 하나가 다스 관련 보고서. 아들 시형 씨에게 다스 경영권을 넘겨주려고 한 정황이 담긴 보고서를 검찰 측이 제시하자, 이 전 대통령은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준비를 많이 하셨네”라고 답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실 검찰은 청계재단 소유 영포빌딩을 압수수색하는 과정에서 다수의 청와대 문건과 다스 관련 문건 등을 발견했다. 이를 통해 검찰은 ▲이 전 대통령이 삼성 측으로부터 받아낸 다스 소송 비용 대납 60억 원 ▲장다사로 전 청와대 총무기획관 총선 여론조사 국정원 특활비 10억 원 뇌물수수 ▲김백준 전 청와대 총무기획관·박재완 전 청와대 정무수석·김진모 전 청와대 민정2비서관 등 6억 5000만 원 뇌물수수 ▲이팔성 전 우리금융지주 회장 22억 5000만 원 뇌물수수 및 인사 청탁 ▲김소남 전 한나라당 의원 공천헌금 4억 원 뇌물수수 및 공천헌금 ▲대보그룹 공사 수주 청탁 5억 원 등 110억 원대 뇌물수수 외에도 다스 관련 횡령, 배임, 직권남용 혐의 등을 찾아냈다.
21시간에 걸쳐 조사를 받은 이 전 대통령이 15일 오전 조사를 마친 뒤 귀가를 위해 차량에 탑승하고 있다. 임준선 기자
핵심 관계인들로부터 ‘인정 진술’도 받아냈는데, 이 전 대통령의 조카 이동형 씨는 “다스 실소유주는 아버지 이상은 회장이 아니라, 막내 삼촌인 이 전 대통령”이라고 검찰에서 털어놨다. 이를 이 전 대통령에게 검찰이 제시하자, 이 전 대통령은 다소 어처구니없어 하는 표정을 지었고 이어지는 수사 검사의 질문에 몇 차례 고개를 가로저은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 관계자는 “일관되게 혐의를 부인하던 피의자가 말을 돌리거나, 앞서와 다른 방식으로 혐의를 부인하는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 맞다’고 봐도 된다는 게 수사 경험에서 나오는 검사들의 ‘촉’”이라며 “이 전 대통령 역시 부인은 했지만 ‘쉽지 않겠다’는 생각을 속으로 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 검찰 수사팀은 “영장 필요” 판단, 남은 건 문무일 총장 ‘고심’
“이미 수사팀 내부에서는, 이명박 전 대통령을 부르기 전부터 ‘영장을 칠 수밖에 없는 범죄’라고 얘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검찰 관계자)
이명박 전 대통령의 구속 여부에 대해 묻자 검찰 관계자가 자신있게 내놓은 답변이다. 소환 전부터 ‘혐의가 방대하고 금액이 크기 때문에 구속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이었다는 것. 게다가 이 전 대통령이 혐의 대부분을 부인했기 때문에, 영장을 쳐야 한다는 입장이 더 확고해졌다고 귀띔했다.
통상 구속영장 청구는 수사팀이 결정하지만, 대통령이나 국회의원과 같은 주요 사건 관계자에 대해서는 검찰총장의 의지가 중요하다. 검찰총장이 ‘추가로 보완할 부분이 있다’고 판단하면, 수사를 더 보완해서 해야 한다.
수사팀은 일단 이 전 대통령 소환·조사에 대한 총장 보고를 마쳤다. 소환(14일) 다음날인 15일 오전, 밤샘조사를 마친 이 전 대통령 귀가 후 잠깐 휴식을 가진 뒤,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은 그날 오후 문무일 검찰총장에게 이 전 대통령 조사 내용과 과정을 간략하게 보고했다. 그리고 16일, 신병 처리 여부에 대해, 수사팀의 입장을 담은 수사 보고서를 문무일 총장에게 정식으로 보고했다.
문무일 총장도 “충분히 검토하겠다”는 ‘의례적인 답변’으로 고민이 시작됐음을 밝혔다. 문 총장은 16일 출근길에 기자들이 이 전 대통령의 신병처리 방향 등을 묻자 “충실히 살펴보고 결정하겠다”라고 말했는데, 이에 대해 검찰 관계자는 “어느 정도 영장을 치겠다고 방안을 잡아놓고, 청와대 등 윗선과 의견을 확인하는 과정을 거칠 것”이라며 “통상 주말 동안 고민했던 모습을 연출한 뒤 다음주 초쯤 결정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 전 대통령의 방대한 범죄 혐의와 금액(110억여 원)을 감안할 때 구속이 불가피하지만, 검찰이 이미 자료를 다 입수했다는 것은 구속을 피하고 싶은 이 전 대통령에게 다소 위안이 되는 상황이다. 불구속 상태로 수사해도 큰 차질이 없을 정도로 이 전 대통령 측 핵심 자료를 확보했기 때문. 박근혜 전 대통령이 이미 구속돼 있다는 점, 또 100일도 남지 않은 6·13 전국 지방선거는 물론, 다음달로 예정된 남북 정상회담도 검찰이 이 전 대통령 영장 청구를 고민하게 만드는 변수들이다. 이 전 대통령에 대해 구속영장을 강행했다가 법원에서 기각될 경우, 문재인 정권에 적지 않은 비난이 쏟아질 수 있다는 점을 문무일 총장은 물론, 청와대가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서울중앙지검 수사팀 입장이 가장 중요하다는 게 검찰 안팎의 관측이다. 한 검찰 관계자는 “문무일 검찰총장이 결정권자라고 하지만, 청와대와 더 교류가 잘되는 건 윤석열 지검장이라는 얘기도 있지 않냐”며 “범죄 혐의 등까지 감안할 때 영장이 청구될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다”고 설명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 이어 전전(前前) 대통령까지 동반 수감되는 상황이 벌어질 것이라는 관측이 힘을 받는 이유다.
서환한 기자 brigh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