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희 북미국장이 최근 외무성 부상으로 전격 승진했다. 북미 정상회담을 앞둔 시점에 의미있는 인사로 해석된다. 연합뉴스
북한 내부 관계자에 따르면 최선희 부상은 1964년생으로 올해 한국 나이 55세로 확인된다. 남성 일색인 북한 외교가에서 여성이라는 점도 독특하지만, 나이도 비교적 젊은 편이다.
일단 최선희 부상과 관련해 가장 중요한 배경은 익히 알려졌다시피 양아버지 최영림 전 내각 총리다. 최선희의 탄탄대로와 영전의 가장 큰 버팀목이 최영림이란 사실은 너무나 자명한 부분이다. 최선희를 이해하자면 먼저 양부 최영림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최영림은 1930년 11월 20일 함경북도 경흥(지금의 새별군)에서 출생한 원로 중의 원로다. 최영림은 항일열사 출신의 부모 밑에서 성장했으며 본인은 만경대혁명학원 졸업 후 6·25전쟁 시절 김일성 주석의 경호연대 대원으로 활동했다. 여기서 최영림은 꼼꼼한 성격과 묵묵한 일처리로 김일성의 주목을 받았고, 전후 그의 추천으로 김일성종합대학을 다녔다.
최영림은 대학 졸업 후 1956년부터 중앙당 경제 및 국방 관련 부서에서 이력을 쌓았다. 특히 전후 북한 지도부의 중국 내 문제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도 친분을 쌓았다. 그는 40대 초반에 불과했던 1970년대 초 당 경제정책 관련 부서에서 부장급에 오르고, 1980년대 초에는 정무원 부총리와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에 오르기도 했다.
특히 최영림은 김일성이 국가주석이란 독재시스템으로 자리잡기 시작한 초기, 책임부관으로 10여 년을 복무했다. 최측근 중 최측근이었던 셈이다. 이후 김정일 시대에 들어 그는 중앙검찰소장, 최고인민회의 상임위 서기장, 최고검찰소장, 평양시 당위원회 책임비서 등 요직을 두루 거친 뒤 내각 총리까지 영전했다.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고모인 김경희는 과거 최영림을 ‘부관삼촌’으로 부르며 따랐고, 누이 김설송도 그를 ‘부관할아버지’라 칭하며 따랐을 정도라 한다.
하지만 최영림 전 총리에게도 아픔이 있었다. 그의 부인이 아이를 낳지 못했던 것이다. 최영림 부부는 이러한 연유로 최선희 부상을 포함해 한 명의 아들과 두 명의 딸을 입양한 것으로 확인된다.
물론 최선희에게도 친부모와 친형제가 있었다. 복수의 내부 관계자에 따르면, 최선희는 오빠 한 명과 여동생 한 명이 있고, 친부모는 어린 시절 여읜 것으로 확인된다. 그의 친부모는 공작원 출신으로 최선희를 비롯한 어린 자녀를 남겨 두고 해외 비공개 임무를 수행하다 모두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선희 외무성 부상의 양아버지인 최영림 전 내각 총리. 연합뉴스
중앙통계국은 우리로 따지면 통계청이다. 당 조직지도부 통보 관련 부서를 제외하고 북한 내부 전반 상황을 속속들이 알 수 있는 핵심 부서다. 실례를 들자면 북한의 각종 인구 관련 수치, 전력 등 자원 생산 및 유출 수치 등 통치에 꼭 필요한 중요 통계 자료를 이곳에서 직접 다룬다. 당연히 수많은 자료와 정보가 이곳을 거치며 정권의 촉수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최선희의 배경에는 바로 중앙통계국의 고위직이었던 오빠 최철수 역시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다.
물론, 이 같은 배경만으로 북한 외교가의 핵심 인사로 거듭난 것은 아니다. 최선희 본인의 영특함과 능력 또한 간과할 수 없다. 그는 김일성 가문 자녀들을 비롯해 최측근 핵심인사 자녀들이 다녔던 미산중학교에서 수학했으며, 강반석유자녀학원(현 강반석유자녀대학)에서 초급 학부 과정을 이수했다. 당연히 이 과정에서 김씨 가문 인사들과 자연스레 친분을 쌓을 수 있었으며, 그의 영전에도 크게 작용했다.
관계자에 따르면 최선희는 유자녀학원 졸업 후 평양외국어대학에서 수학한 뒤 곧바로 외무성에 입직했다고 한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몰타에서도 영어연수를 한 것으로 알려진다. 북한에서 몰타와 같은 자본주의 국가에서 유학을 했다는 것은 특별한 사례다. 김일성 시대 최고위 간부 중 한 인물인 오진우 무력부장 겸 총정치국장이나 김일 내각 부수상의 손녀도 기껏 러시아가 유학지였다.
이밖에도 그는 중국의 베이징외국어학원에서도 6개월의 유학 생활도 거친 것으로 확인된다.
최선희는 탁월한 언어 능력의 소유자라 한다. 특히 영어와 중국어에 능통한데 유엔주재 북한대표부 통역으로 발탁될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1990년대 말부터 4자회담, 북미회담, 6자회담 등 핵심 회의에 통역으로 배석한 바 있다. 2009년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도 그가 통역으로 나섰다. 그는 자신의 외국어 능력을 인정받은 것은 물론 최영림이라는 든든한 배경까지 있어 북한 대미정책의 주요 부서로 알려진 미국연구소 부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배경과 능력으로 이미 2012년부터 북한 안팎에서는 최선희가 향후 대미 외교 관계에 있어서 핵심적 역할을 할 것이란 예견이 있어 왔다. 실제 그렇게 됐다. 북미 대화를 앞둔 시점에서 그를 꼭 지켜봐야 하는 이유다.
이윤걸 북한전략정보서비스센터 대표
정리=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