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신문>은 3월 22일, 천안함 선체가 안치돼 있는 해군 2함대를 찾았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제2함대에 안치된 천안함과 마주하기 위해선 사전 신청이 필요했다. 기자는 방문 3일전, 사전 신청을 거쳐 22일 오전 9시 45분경 제2함대에 다다랐다. 방문 하루 전, 함대 측에선 민감한 시기 취재진 방문이 부담스러웠는지 취재 여부와 의도에 대해 묻기도 했다.
함대 회관에는 기자를 안내할 담당 장교가 미리 나와 있었다. 방문 코스는 크게 두 곳이었다. 천안함 사건과 그간 북한과의 NLL 해전 기록을 전시한 ‘서해 수호관’과 천안함 희생 장병들을 추모하기 위해 마련된 ‘천안함 기념관’이었다.
‘서해 수호관’ 입구 앞에는 제2연평해전에 실제 참전했던 ‘참수리357호정’이 자리했다. 안내 장교의 설명에 따르면, ‘참수리357호정’은 정북향을 향해 있다고 한다. 날개모양의 수호관 건물과 더불어, 교전했던 북한을 향해 나아가겠다는 의미가 담겼다는 설명이다.
해군2함대에 위치한 ‘서해 수호관’ 전경 모습.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서해 수호관’ 1층에는 NLL과 제1~2연평해전 및 대청해전(2009년 11월 10일 대청도에서 우리 해군 함정이 NLL을 넘어온 북한 경비정을 격퇴한 해전. 이 해전 이후 불과 4개월 만에 천안함 사건이 발생했다는 점에서 상당한 의미가 있다)과 관련한 당시 상황 기록들과 시사점들이 갤러리의 주제를 이루고 있었다.
이곳의 2층이 바로 ‘천안함 실’이었다. 뒤이어 찾은 ‘천안함 기념관’이 실제 유품을 비롯한 추모공간의 성격이라면, 이곳 ‘서해 수호관’의 ‘천안함 실’은 피격사건의 전개와 민·군 합동조사단의 조사결과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꾸며진 곳이었다.
북한의 CHT-O2D어뢰’ 추진동력장치 모형. 모형 후면부에는 ‘논란의 핵심’ 중 하나였던 ‘흡착물’까지 고스란히 묘사돼 있었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어뢰 추진동력장치 모형에는 ‘논란의 핵심’ 중 하나였던 ‘흡착물’까지 고스란히 묘사돼 있었다. 바로 장치 곳곳에 덕지덕지 붙은 의문의 흰색 물질들이었다. 합조단은 이를 두고 천안함 선체에서 발견한 그것과 동일한 물질(산화 알루미늄)로 결론 내렸지만, 일각에서는 단순 부식물질이라고 주장하는 등 다양한 의문을 제기한 바 있다.
그 맞은편에는 어뢰에 의한 천안함 폭파 과정을 설명하기 위한 전시물들이 눈에 띄었다. 특히 해외에서 퇴역 함선을 대상으로 실시한 어뢰 폭파 영상이 반복적으로 상영되고 있었다. 이는 일각에서 제기하고 있는 ‘암초 충돌설’과 ‘잠수정 충돌설’을 정면으로 반박하기 위해 마련된 자료라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영상에선 해저에서 폭발된 어뢰에 의해 선체가 함미와 함수로 순식간에 두 동강 나고 있었다.
천안함 기관부 침실에서 수거된 실제 반고정형 침대.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기자는 ‘서해 수호관’을 나온 뒤 바로 ‘천안함 기념관’으로 향했다. 안내 장교는 “유족들은 3월 기념주기 때뿐만 아니라 언제나 이곳을 찾아오곤 한다”며 기념관 안으로 기자를 안내 했다.
기념관 전반부에는 폭침 당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던 기관조종실과 디젤기관실을 비롯해 승조원식당, 기관부 침실, 후타실 등을 재현해 놨다. 특히 기관부 침실에 설치된 반고정형 침대는 실제 수거된 것을 그대로 전시해 놓은 것이라 한다. 천안함 사건 이후 함대의 침대는 순차적으로 고정형으로 교체됐다는 후문이다.
함수와 함미가 두 동강 난체 해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천안함의 모습을 재현한 설치물.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이곳을 지나 기념관 중앙에는 천안함의 침몰단계서부터 구조단계까지의 과정을 설명한 ‘미라클 비전’이 설명을 돕고 있었다. 특히 비전 하단에는 바닷속에 완파돼 가라앉은 천암함의 모형이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 뒤에는 천안함 폭침 당시 떨어져 나온 가스터빈과 발전기, 그리고 어뢰발사관 등이 기자의 눈을 사로잡았다. 이렇게 수거된 장치들 대부분은 성치 못했다. 당시 끔찍한 상황을 간접적으로 설명하는 듯 했다.
희생 용사들의 군번줄이 나란히 걸려 있는 헌화대의 모습.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기념관의 마지막 테마는 46명의 천안함 희생 용사들을 추모하고 기억하는 공간이었다. 특히 희생 장병들의 군번줄을 나란히 걸어 놓은 헌화대는 절로 ‘엄숙함’을 자아냈다. 그 뒤에는 유족들이 기증한 용사들의 유품들이 전시돼 있었고, 용사들 각각의 사연들을 볼 수 있는 스토리텔링 시스템도 갖춰져 있었다.
두 동강 난 천안함의 함미와 함수 가운데 전단면.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특히 고 박경수 상사의 사연이 안타까웠다. 제2연평해전의 생존자였던 박 상사는 다시 탄 배가 하필 천안함이었고, 그렇게 다시는 가족들에게 돌아올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리고 기념관 앞에는 참혹한 당시 모습을 간직한 ‘천안함’ 선체가 기자를 마중하고 있었다. 함수에 ‘772’호가 새겨진 그 모습 그대로였다. 전장 88.3m에 선폭 10m, 배수량 1220톤에 달하는 천안함은 함미와 함수가 두 동강 난체 처참한 모습이었다.
절단면의 스태빌라이저. 외부의 압력에 의해 안쪽으로 심하게 찌그러져 있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천안함을 뒤로 한 채 함대를 나서는데 의문점 하나가 남았다. 3월 기념주기 임에도 불구하고,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안내 장교는 이와 관련해 “초창기 이곳을 찾는 추모객들이 20만 명에 달했다”라며 “하지만 지금 그 숫자가 지난해 기준으로 11만 명으로 뚝 떨어졌다. 잊히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이 많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평택=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천안함 사고’ 왜곡이냐 합리적 의심이냐…쟁점은 무엇? ‘천안함 좌초설’을 주장하며 정부가 천안함 사고 원인을 조작했다는 내용의 글을 올려 기소된뒤 유죄를 선고받은 신상철씨가 2016년 1월 25일 오후 서울중앙지방법원 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출처=연합뉴스 ‘천안함 사건’을 조사한 국제 민․군 합동조사단은 북한 어뢰의 수중 폭발로 인한 버블 제트 효과(폭발 시 발생한 고압 가스 거품이 수축과 팽창을 반복하면서 순식간에 물기둥이 솟구치는 현상)로 천안함이 두 동강 났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일각에선 ‘천안함 좌초’를 주장하며 진상 조사를 요구했다. 이는 왜곡일까, 아니면 합리적 의심일까. 이렇게 상반된 주장이 나오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그 쟁점은 이러하다. 2010년 5월 20일 ‘천안함 사건’을 조사해 온 국제 민·군 합동조사단(합조단)은 “천안함은 북한제 CHT-02D 어뢰의 수중 폭발(에 따른 버블제트의 영향)에 의해 선체가 두 동강 나 침몰했다”고 결론 내렸다. 당시 합조단은 한국인 전문가 49명과 미국·호주·영국·스웨덴 4개국 전문가 24명 등 73명으로 구성됐다. 합조단은 ‘어뢰에 의한 외부 폭발’에 의해 침몰됐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천안함 선체 실물 사진 20여장과 “사고 당시 2~3초간 (버블제트 물기둥 현상인) 높이 약 100m의 흰색 섬광 기둥을 보았다”는 백령도 해안 초병의 진술도 처음으로 공개했다. 또한 합조단은 쌍끌이어선이 2010년 5월 15일 사고 현장 부근 바다 밑에서 수거한 길이 1.5m의 어뢰 뒷부분의 동체를 ‘북침’의 증거로 제시했다. 동체 내부엔 한글로 ‘1번’이라고 표기 돼 있었는데 이를 두고 합조단은 “북한군이 어뢰 제작 과정에서 남긴 것으로, 우리 군이 2003년 습득한 북한군 훈련용 어뢰에 한글로 ‘4호’라고 쓰여 있는 것과 일치하는 표기 방식”이라고 밝혔다. 이 같은 합조단의 조사 결과에도 불구하고 항간엔 좌초설, 기뢰 충돌설, 미군 잠수함 충돌설 등 음모론이 떠돌았다. 당시 합조단 야당(현재 여당인 민주당) 추천 민간위원이었던 신상철 서프라이즈 대표는 사고 다음날인 3월 27일 상황이 담긴 한 장의 사진에 대해 “실종자 가족이 가지고 있었다는 이 사진에는 최초 ‘좌초’라는 대목이 보인다”라며 ‘천안함 좌초설’을 주장했다. 이후 신 대표는 “(군이) 다 조작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며 합조단을 떠난 뒤 자신이 운영하는 인터넷 매체 서프라이즈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음모론을 주장해왔다. 합조단 민간위원이었던 신 대표의 주장은 사회적으로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백령도 초병이 물기둥을 목격했다는 명확한 진술이 없고 백색 섬광 방향은 천안함 침몰 지점과 다르다는 점 ▲군 관계자가 초기엔 ‘좌초’라는 표현을 사용해 침몰 원인을 설명했다는 점 ▲‘1번’ 어뢰에서 발견된 흡착물질이 폭발물이 아닌 침전물인 점 ▲‘1번’ 어뢰의 매직펜 글씨가 폭발에도 남아 있었던 점 등이 ‘천안함 좌초설’의 근거로 제시됐다. 천안함 침몰의 1차 원인은 ‘좌초’이고, 2차 원인은 선박이나 미군 군함과의 충돌이라는 것이다. 해군 측은 2010년 5월 신 대표를 명예훼손 혐의로 검찰에 고소했고 검찰은 같은 해 8월 신 씨를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했다. 5년 5개월 만에 1심 재판부가 판결을 내렸는데 재판부는 이러한 의혹을 모두 부인했다. 재판부는 핵심 쟁점인 천안함 침몰 원인에 대해 “천안함은 수중 폭발에 따른 충격파와 버블 효과에 의해 절단돼 침몰했고, 사용된 무기는 북한 어뢰 ‘CHT-02D’나 그와 유사한 어뢰”라고 강조했다. 재판부는 “물기둥을 직접 봤다는 승조원이 없다는 것에 의문이 생기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급박한 상황에서 제대로 목격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며 “일부 승조원의 얼굴에 물이 튀었다는 점, 백령도 초소 경비병이 사고 무렵 섬광을 보고 충격음을 들었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물기둥과 섬광이 없었다는 주장은 이유가 없다”고 봤다. 또 “초기에 군 관계자는 사고 원인에 대해 설명하면서 ‘좌초’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며 “어뢰에서 발견된 흡착물질도 알루미늄이 포함된 폭약에 의해 만들어진 물질로 보는 게 맞다”고 판단했다. 특히 논란이 된 ‘1번’ 글씨에 대해서는 “녹슨 표면 위에 뒤늦게 표기됐다고 보기도 어려우며 유성 매직 성분으로 적혔다 해도 폭발 시 열로 인해 녹아 없어져야 한다고 보기도 어렵다”고 밝혔다. 이밖에 어뢰 추진체에서 발견된 조개껍데기에 대해서는 “폭발할 당시 바다 아래에 있던 조개 조각이 휩쓸려 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고 판단했다. 동해바다에 서식하는 붉은 멍게 유생이 발견됐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국립수산과학원 분석 결과 DNA가 전혀 검출되지 않았다”며 유기체로 보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천안함 사건’ 주요 일지. 그래픽=백소연 디자이너 일각에선 여전히 ‘천안함 사건’ 진상 규명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참여연대는 지난해 문재인 정부 국정기획자문위원회에 ‘문재인 정부가 추진해야 할 9대 분야 90개 개혁과제 제안서’에 ‘천안함 침몰 진상 규명’을 포함시켰다. 참여연대는 제안서에서 “천안함이 침몰한 지 7년이 지났지만 군 기밀주의로 인해 침몰 원인에 대한 많은 의혹이 풀리지 않은 채 아직 미제 사건으로 남아 있다”면서 “국회는 초정파적인 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국정조사를 통해 사건 진상을 조사해야 한다”고 했다. 참여연대는 “조사결과의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 관련 국가 및 북한의 참여까지 허용하는 국제적 검증작업도 이뤄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청와대 홈페이지 국민청원 코너에도 ‘천안함 사건’ 재조사하자는 청원이 올라왔다. ‘천안함 사건’ 재조사에 대한 청원만 300여 건(3월 22일 기준)이 넘는다. 한 청원인은 “그동안 국민적 의혹으로 남아있던 천안함 침몰 원인의 재규명과 확실한 결론의 도출로 더 이상의 국론 분열과 정치에 이용되지 않도록 해야겠다”면서 “천안함 침몰 원인 재조사를 강력하게 청원한다”고 밝혔다. 이성우 천안함46용사유족회 회장은 “아들 머리가 이만큼 찢어져 있더라. 충격에 의해 튕겨 나간 것 같다. 좌초가 됐는데 이렇게 튕겨나갈 순 없다고 생각한다. ‘미국 잠수함이 어뢰를 쐈다’ ‘이스라엘 잠수함이 어뢰를 쐈다’ 등 얘기가 나온다”면서 “정부가 초기 대응을 잘못한 점도 의혹의 불씨를 키운 것 같다. (더 이상의) 국론 분열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경민 기자 mercury@ilyo.co.kr |
[언더커버] 천안함 8주기 특집3(끝)-‘천안함 프로젝트’ 정지영·백승우 감독 인터뷰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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