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지암’은 미국 CNN이 ‘세계 7대 소름끼치는 장소’로 선정했다는 곤지암 정신병원을 배경으로 삼았다. 담력 세다는 공포체험 마니아들도 꺼린다는 이곳을 배경으로 찍은 이 영화는 스타 한 명 출연하지 않지만 높은 관심을 모았다. 그리고 이 관심은 이 정신병원이 위치한 부동산 소유자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결국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곤지암’ 사태 이전에도 영화에 특정 지명이 제목이나 배경으로 쓰여 문제가 불거진 적은 더러 있다. 해당 지역에 살고 있는 주민이나 자치단체로서는 부정적인 이미지로 매도되는 것이 좋을 리 만무하다. 과연 이런 주민의 권리는 법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을까?
영화 ‘곤지암’ 포스터
결과적으로 ‘곤지암’은 예정대로 개봉돼 관객과 만났다. 서울중앙지방법원 재판부가 영화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기각했기 때문이다. 재판부는 판결문을 통해 “영화 ‘곤지암’은 소유주 개인을 소재로 한 영화가 아니므로 소유주의 명예와 신용이 훼손된다는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밝혔다. 또한 “영화의 상영으로 부동산의 객관적 활용가치 자체에 변화가 있을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며 “명백히 허구의 내용을 담고 있는 공포영화에 불과할 뿐 부동산에 대한 허위 사실을 드러내려는 것이 아니고, 괴이한 소문은 영화가 제작되기 한참 전부터 세간에 퍼져 여러 매체에서도 보도되었기 때문에 영화 상영 및 특정 표현을 금지시켜야 할 피보전권리를 인정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영화 상영은 가능해졌지만, 관객을 모아야 하는 특성상 마냥 큰 목소리를 낼 수는 없다. 제작사 하이브미디어코프 측은 “영화 제작 및 홍보 마케팅 과정에서 본 영화가 허구를 바탕으로 한 창작물임을 여러 경로를 통해 지속적으로 밝혀 왔다”며 “이번 기각 결정을 통해 ‘곤지암’의 상영에 법적 문제가 없음이 명확해졌지만, 앞으로도 영화와 관련해 추가적인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지명을 제목으로 한 논란은 2년 전에도 있었다. 높은 작품성을 바탕으로 화제를 모았던 영화 ‘곡성’(감독 나홍진)은 개봉을 앞두고 곡성군 주민들의 원성이 높았다. 의문의 연쇄살인사건, 무속 등을 다룬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 탓에 곡성의 이미지가 나빠지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결국 ‘곡성’의 포스터가 수정됐다. 곡성이라는 제목 옆에 ‘곡하는 소리’라는 뜻의 한자 ‘哭聲’가 함께 표기됐다. 영화 제목인 ‘곡성’이 곡성(谷城)이라는 지명과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알리자는 취지였다.
영화 제목에 특정 지명이 포함되지 않더라도, 특정 지역이 공포나 스릴러 영화의 배경으로 쓰여 부정적인 이미지가 생기는 것 역시 우려의 대상이다. 강풀의 유명 원작을 바탕으로 한 영화 ‘이웃사람’은 같은 아파트에 사는 이웃사람이 살인마일 수 있다는 설정 때문에 아파트 섭외에 애를 먹었다. 김윤진, 천호진 등 유명 배우들이 출연했지만 쉽게 공간을 내주는 곳이 없었다. 당시 제작진은 결국 재개발을 앞두고 주민들이 떠난 지 5년이 지난 부산 만덕동의 한 아파트에서 촬영을 진행했다. 5년간 사람이 거주하지 않았던 만큼 일반 가정집처럼 보이도록 꾸미는 비용도 적잖이 소요됐다는 후문이다.
한 영화계 관계자는 “대한민국은 ‘집값’에 특히 민감하기 때문에 거주지 주변으로 유해, 혐오시설을 유치하는 것조차 주민 반대가 대단하다”며 “영화 한 편으로 지역의 이미지가 실추되면 집값 하락으로 이어지고, 주변의 부정적 시선으로 인한 주민들이 받는 고통이 크다고 판단한 것”이라고 말했다.
영화 ‘곡성’ 포스터
보다 유연한 대처는 이런 논란을 오히려 지역을 널리 알리는 기회로 만들기도 한다. ‘곡성’ 개봉 당시 성난 민심을 잠재운 이는 유근기 곡성군수였다. 유 근수는 당시 전남일보에 기고한 ‘곡성(哭聲)과 다른 곡성(谷城) 이야기’라는 제목의 칼럼을 통해 “우려를 뒤집어 생각하면 기회의 순간이 온다. 영화 ‘곡성’의 개봉을 막을 수 없다면 곡성을 모르는 분들에게 영화에 대한 관심을 높여 곡성을 찾아오게 하는 것이 남는 장사다”라고 밝히며 곡성의 장점을 소개했다.
이에 투자배급사인 이십세기폭스코리아는 유 군수를 서울에서 열린 무대 인사에 초대해 배우들과 만남의 시간을 갖고 곡성에 관한 다양한 기사가 나오도록 유도했다. 당시 유 군수는 감독과 배우들에게 격려를 전하며 “영화 ‘곡성’을 즐긴 관객들이 아름다운 지역인 곡성에도 오셔서 따뜻함과 즐거움을 담아가길 바란다”고 밝혔고, 실제로 곡성으로 향하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부쩍 늘어났다.
이창동 감독이 연출하고 배우 전도연에게 칸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안긴 영화 ‘밀양’ 역시 비슷한 케이스다. 이 영화는 주인공의 아들이 유괴된 후 살해당하는 내용을 담았다. 전도연, 송강호라는 걸출한 배우들이 출연하지만 밀양 주민들로서는 마냥 반길 수만은 없는 소재였다. 하지만 전도연이 한국 영화 사상 처음으로 ‘칸의 여왕’이 된 후 ‘밀양’이라는 지명은 전세계에 타전되는 효과를 거뒀다. 결국 이 감독을 비롯해 두 주연 배우는 명예시민증을 받았고, 몇몇 촬영장소가 관광지로 거듭났다.
외국의 경우를 보더라도, 영화 ‘반지의 제왕’의 촬영지인 뉴질랜드는 이 영화의 성공을 바탕으로 세계적인 관광지가 됐다. ‘반지의 제왕’ 속 장면 대부분이 CG로 채워져 실제 배경은 대자연일 뿐인 경우가 적지 않았지만, “이곳이 ‘반지의 제왕’을 찍은 장소”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홍보 효과를 누렸다.
또 다른 영화 관계자는 “영화와 실제를 혼동하는 이들이 많지는 않다”며 “다만 주민 입장에서는 여러 걱정이 있을 수밖에 없으니 오히려 지역 홍보에 도움이 되는 방법을 찾아낸다면 원만히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충고했다.
김소리 대중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