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결과였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김세윤 부장판사)는 직권남용, 강요, 뇌물 등의 혐의로 기소된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해 징역 24년과 벌금 180억 원을 선고했다. 검찰이 결심 공판에서 징역 30년을 구형한 점에 감안할 때 무난한 판단이라는 게 법조계 중론이다. 경제 공동체로 지목된 공범 최순실 씨가 1심에서 징역 20년이 선고됐기 때문에 그보다는 적은 양형은 할 수가 없고, 검찰 구형(30년)보다 높은 양형도 상식적으로 추론하기 어려웠다는 분석이었다. 때문에 법조계에서는 징역 20년과 30년의 정 가운데인 징역 25년을 예상하는 분위기가 가장 우세했는데, 그 기준으로 볼 때 징역 24년은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다는 평이다. 박 전 대통령의 나이를 고려할 때 사실상 ‘무기징역’으로 봐도 무방한 중형이라는 점도 이 같은 평가에 힘을 보탠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1심 선고 모습 방송 화면 캡처.
그럼에도 25년이 아닌, 그보다 1년이 더 낮은 24년을 선택한 재판부의 판단 과정은, 마지막 워딩을 꼼꼼히 살펴보면 알 수 있다. 김세윤 부장판사는 재판 말미 선고에서 “피고인은 사적 친분 유지해온 최순실과 공모해서 기업들에게 광고 발주 등을 요구하고, 최순실의 지인을 채용하거나 승진시킬 것을 기업들 강요하는 등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대통령 권한을 남용해서 기업의 경영 자유를 침해했다”고 꾸짖었다. “박 전 대통령이 뉘우치지 않고 있고, 최순실에게 속았다고 하는 등 책임을 모두 전가하고 있다”며 태도를 지적하기도 했다. 특히 선고에서만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을’이라는 문장을 세 번이나 언급했는데, 대통령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위법한 행동을 저지르고 뉘우치지 않은 점을 양형에 불리하게 본 것이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에게 유리한 정황을 확실하게 언급했다. 그리고 결국 이 부분이 박 전 대통령의 양형을 그나마 줄여줬다는 평이다. 박 전 대통령이 직접 주머니로 챙긴 사적 이익 없다는 점인데, 김세윤 부장판사는 “박 전 대통령이 직접 받은 이익이 확인되지 않은 점, 범죄 전력이 없다는 점은 (양형에) 유리한 정황”이라고 언급했다. 이에 대해 한 법조인은 “보통 사건의 경우 돈을 챙긴 측이 더 많은 처벌을 받고 이를 방조한 측은 비교적 양형이 낮은 편”이라며 “박 전 대통령의 위치(대통령)를 감안해 최 씨보다 더 높은 형을 결정했지만, 이익을 직접 추구하지 않았다는 점을 감형 부분으로 판단해 25년보다 더 낮은 24년을 선택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1심에서 18건의 혐의 중 16건에 대해 유죄가 인정됐다.
“넉넉히 인정할 수 있습니다.” “충분히 인정할 수 있습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 선고 재판 중)
1시간 50여 분간 생중계로 진행된 재판에서 김세윤 부장판사가 가장 많이 한 워딩은 바로 ‘유죄’를 인정할 수 있다며 증거들에 대해 재판부의 판단을 얘기한 부분들이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적용된 혐의는 모두 18개. 이 중 16개에 대해 재판부는 유죄로 판단했다. 유죄를 판단할 때 가장 많이 언급된 이름은 단연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이었다. 김세윤 부장판사는 수차례에 걸쳐 “안종범 전 수석이 구체적으로 진술한 내용이 수첩 내용과 일치하는 등 박 전 대통령은 부인하지만 각종 증거들을 고려할 때 그런 정황이 확인된다”며 모든 혐의를 부인한 박 전 대통령의 주장을 하나하나 깨뜨렸다.
일부 무죄로 판단된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이는 대통령의 권한에 대해 어디까지 볼 수 있느냐는 ‘직권남용’과 ‘강요’ 사이의 문제였을 뿐, 실제 ‘행동’이 없었다는 판단은 아니었다. 재판부는 ▼현대차 광고 발주 직권남용 ▼최순실 추천인 하나은행 본부장 발령 지시 ▼KT 광고대행사 선정 과정 개입 등에 대해서는 직권남용을 무죄로 선고했다. 기업의 판단에 대통령이 개입할 수 있는 ‘권한’이 없기 때문에 직권남용의 법리를 적용할 수 없다는 게 재판부의 설명이었다. 대신 김세윤 부장판사는 “다만 이 부분 다른 혐의(강요)로 유죄를 판단한 결과 무죄를 따로 언급하지 않겠다”고 수차례 말하며 ‘봐주는 재판’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특히 부적절한 압수수색으로 확보한 청와대 유출 문건에 대해서는 “검찰이 압수수색 영장 청구 때 적시하지 않은 문건을 가지고 온 것으로 보인다, 법적으로 증거를 인정할 수 없어 청와대 유출 문건 중 30여 건에 대해서는 무죄로 판단한다”며 친절한 설명도 곁들였다.
재판을 생중계로 지켜본 한 부장검사는 “재판부가 평소 재판과 달리 친절한 설명을 더 첨언하는 등, 생중계가 된다는 점을 충분히 고려해 준비한 것 같다”며 “생중계 결정 역시 비교적 중형(24년)을 선택했기 때문에 할 수 있지 않았겠냐. 몇몇 법리적인 요소로 무죄를 선고해야 하는 경우에 대해서는 상세한 설명으로 국민을 설득하려 한 것 같다”고 평가했다. 또 다른 검사 역시 “징역 30년을 구형했는데 24년이면, 검찰 입장에서 비교적 납득할 수 있는 양형”이라며 “사실 양형보다도 유무죄가 더 중요한 대형 정치인의 사건 아니냐, 검찰 내에서도 이 정도면 됐다는 분위기가 있다”고 설명했다.
# 삼성 부분 ‘검찰’ 반발 불가피…사면 사그라드나
하지만 구체적인 혐의에 대해서 수사팀 입장은 다소 다르다. 직권남용, 강요와 같은 소소한 범죄 혐의 적용 부분이 아닌, 사건의 핵심으로 꼽힌 ‘삼성 청탁’ 부분에 대해서 법원이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 재판부는 ▼롯데그룹 K스포츠재단 지원 ▼SK그룹 K스포츠재단 지원 등에 대해서는 모두 뇌물 혐의에 대해 유죄로 판단했다.
하지만 삼성그룹의 뇌물 수수에 대해서는 ‘대가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삼성그룹이 K스포츠재단, 미르재단을 후원하는 과정에서 청와대에 승계를 청탁했다는 검찰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설명이다. 재판부는 “당시 뉴스로 본 국민들도 현안이었다고 생각하겠지만, 이를 법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지 여부는 다소 다르다”며 구체적인 증거가 없다고 설명했다. 검찰은 공식적으로는 “최종적으로는 법과 상식에 맞는 결과가 나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입장을 내놨는데, 검찰 수사팀 흐름에 정통한 관계자는 “삼성의 현안이 승계였다는 내용의 보고서가 청와대에 올라간 점 등을 볼 때 묵시적으로 이를 인정해도 무방한 요소들이 있다”고 반발했다.
조심스레 검찰과 박 전 대통령의 ‘항소 포기’와 형 확정을 추측했던 일말의 분위기는 사그라들고 있다. 법무부 관계자는 “삼성그룹 이재용 부회장의 대법원 선고가 아직 있지 않냐. 같은 내용의 사건이 법원의 판단을 기다리고 있는데 박 전 대통령 사건에서 항소를 하지 않을 경우, 이 부분에 대해 다투지 않겠다는 의사가 된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법무부 관계자 역시 “이런 역사의 재판을 항소하지 않고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먼 훗날 역사의 판단을 받겠지만 이런 재판은 정치적인 판단이 나오기 전까지는 검찰 역시 끝까지 갈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선고까지 불참하며, 불복 의사를 내비친 박 전 대통령. 박 전 대통령이 항소를 하지 않을 가능성도 거론되지만 결국 이는 국선 변호인단의 판단에 달렸다는 게 판사들의 일관된 설명이다. 재판 당사자(박 전 대통령) 동의 없이도 항소를 할 수 있기 때문. 서울고등법원의 한 부장판사는 “피고인의 의사와 관계 없이 국선 변호인단이 항소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 선고 직후 박 전 대통령 측 강철구 변호사 역시 “저희 국선 변호인들은 최선을 다했지만 오늘 선고 결과가 매우 좋지 않아 안타깝다”며 “이번은 1심 선고일 뿐이다. 앞으로 항소심, 대법원에서 바른 판단을 해줄 것이라 믿는다”고 발언했다. 항소 의사를 드러낸 것. 그러면서도 박 전 대통령과 제대로 소통하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어떤 루트로도 (박 전 대통령의) 의사를 확인할 것”이라며 “차후에 말하겠다”고 덧붙였다.
# 이게 끝이 아닌 박근혜 전 대통령
박 전 대통령의 1심은 끝났지만, 박 전 대통령이 서초동에 와야 할 일은(물론 박 전 대통령은 불참하고 있지만) 더 많다. 현재 박 전 대통령은 국가정보원 특활비 상납 의혹과 공천 개입 혐의로 기소돼 1심 재판을 받고 있다. 혐의 금액이 적지 않아, 추가로 양형이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앞선 서울고등법원의 부장판사는 “이미 ‘실형’이 선고된 게 있는데 다른 사건만 집행유예를 선고하는 것도 본 적이 없다”며 “아마 2심에서 병합해서 심리하게 될 경우 양형은 더 늘어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서환한 기자 brigh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