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늦은 꽃샘추위로 전국이 흐렸던 6일 오전, 서울중앙지검과 서울중앙지법이 마주보고 있는 법원 삼거리에 가까워지자 비장한 음악이 들렸다. 출처는 천막 농성을 벌이고 있는 한 친박 단체 스피커. 국민계몽운동본부 등이 소속인 이들은 지난 1일부터 중앙지법 앞에 천막을 치고 ‘박근혜 대통령 무죄석방을 위한 범국민 기도회’를 벌였다. 성경 구절이 걸린 천막에서는 기독교인들이 철야 기도를, 다른 천막에선 불교인들이 삼천배 수행을 하는 등 모습도 가지각색이었다. 경찰도 2인 1조를 이뤄 법원 주변을 순찰하고 있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 1심 선고 당일 서초동에서 농성을 벌인 지지자들.
박근혜 전 대통령 선고가 오후로 예정돼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지자들은 오전 10시께부터 법원 주변에 나와 현수막과 피켓 등을 설치했다. ‘대통령은 죄가 없다’ ‘정치보복 인신감금 중단하라’ ‘너희 영화가 언제까지 갈 것 같으냐’ 등의 내용이 주를 이뤘다. 일부 지지자들은 박 전 대통령 1심을 맡은 김세윤 재판장 사진과 ‘법(法)대로 해’라는 문구가 담긴 피켓을 법원 정문 앞 바닥에 깔아놓고 시민들에게 “밟고 가시라”고 외치기도 했다.
불과 3주 전 이명박 전 대통령 검찰 소환 당시 시민들이 이 전 대통령의 구속을 촉구하는 피켓을 들고 나온 것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정문 앞에서 피켓을 들고 서 있던 지지자 박 아무개 씨는 “박근혜 대통령이 어떤 부정한 일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오래 지지하는 거라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라며 “이명박 대통령을 봐라. 구속될 때 아무도 안 가지 않았냐”고 반문했다.
기자가 취재 중에 박 전 대통령 지지자로부터 받은 책.
오전 11시 30분이 되자, 경찰들이 분주해졌다. 중앙지법 정문 차량 출입문을 폐쇄하고 거리 통제를 시작한 것. 이어 오후 1시부터는 보행로도 통제한 뒤 선고 방청권 소지자와 민원인 등 신원 확인이 가능한 사람만 통과시켰다. 같은 시각 법원 삼거리 인근에는 대형 태극기와 성조기가 깔렸다. 박근혜대통령구명총연합의 ‘무죄석방 촉구 집회’와 대한애국당 산하 천만인무죄석방운동본부가 주최한 ‘제50차 태극기집회’ 참석자들이 한데 얽혀 “박근혜 대통령을 석방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법원 내부는 1시가 넘어서면서부터 분주해졌다. 기자들은 취재를 위해 이른 점심을 먹고 속속 법원으로 복귀했고, 1시 30분부터는 일반인 방척객을 위한 방청권 배부가 시작됐다. 선고가 진행된 서울중앙지법 대법정 150석 중 30석이 일반 방청객에게 할당됐는데, 지난 28일 서울회생법원에서 열린 방청권 추첨에는 99명이 참여해 3.3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지난해 5월 68석을 추첨한 박 전 대통령 첫 공판 경쟁률은 7.7대 1이었던 것에 비하면 저조했지만 최근 공판 때 빈자리가 많았던 것에 비하면 높아진 경쟁률이었다. 그리고 재판 시작 1분 전인 오후 2시 9분. 4번 출입구 앞에 늘어섰던 방청객들이 모두 재판정에 들어갈 수 있었다.
노태우 전 대통령 재판 이후 22년 만의 전직 대통령 선고이자, 사상 첫 전직 대통령 선고 생중계를 법원에서 시청하는 시민들도 많았다. 법원 1층 로비에 있는 텔레비전 앞으로 사람들이 모였다. 12석 간이 의자는 순식간에 만석이 됐다. 재판 직전,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정농단 관련 기자회견과 재판 일지를 정리한 영상이 나오자 지나가던 시민들도 발걸음을 멈추고 텔레비전 화면을 응시했다. 이정미 전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탄핵을 선고하는 장면에서는 일부 지지자들이 코웃음을 치기도 했다.
그리고 재판부가 화면에 모습을 드러내자 시민들은 숨을 죽이고 집중하기 시작했다. 김세윤 재판장의 목소리가 나오자 한 시민은 법원 직원에게 “소리를 좀 크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자리에 앉아 통화하는 남성을 제지하는 시민도 있었다. 재판부의 판결문 낭독이 이어지자 한 여성 지지자가 “김세윤이 입닫아라!”라고 외치며 발길질하는 시늉을 하기도 했다. 소란이 커지자 법원 직원이 제지에 나섰는데, 지지자는 “당당한 대한민국 국민인데 왜 말을 끊냐”며 “여기가 공산국가냐”고 따지는 해프닝도 발생했다.
그리고 오후 3시 50분쯤, 재판부가 구체적인 양형을 읽기 시작하자 더 많은 사람들이 텔레비전 앞으로 모여들었다. 40여 명의 시민들의 눈과 귀는 주문을 읽는 재판부로 향했다. 그리고 김세윤 부장판사는 박 전 대통령에게 징역 24년을 선고했다. 중계를 지켜보던 신 아무개 씨는 “예상한 대로 형량이 나온 것 같다”고 말했다. 일부 시민들이 자리를 뜨지 못하고 허망한 듯 중계화면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법원 내부 분위기는 대체로 차분했다.
하지만 법원 인근에서 집회를 벌이던 지지자들은 선고 결과가 나오자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김세윤 부장판사에 대한 욕설이 난무했고, 일부 참가자들은 재판부 판단에 대한 항의 표시로 바닥에 드러누웠다. 취재진을 폭행하는 일도 발생했다. 주최 측은 “동요하지 말고 질서를 지켜달라”며 “사고 난다. 기자분들은 나가주시라”고 소리쳤다. 오열하며 “박근혜 대통령”을 외치는 이들도 있었다. 대한애국당은 선고 결과에 대해 “대한민국의 헌법을 지켜야 할 사법부가 거짓촛불에 매몰돼 살인적인 정치보복재판을 자행한 것”이라며 “국민여론은 더이상 거짓촛불의 편이 아님을 경고한다. 사법부의 정치보복 판결에 대한 국민불복과 국민저항은 태극기를 중심으로 더욱 거세질 것이고 대한민국 법치를 사망시킨 죗값은 반드시 치르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효정 언론인 hyoj031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