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삼성전자 서초사옥. 사진=고성준 기자
‘경제민주화’를 내건 문재인 정부는 삼성과 현대차그룹 등 대기업집단을 대상으로 지배구조개선을 주문했다. 순환출자 고리 해소와 지주회사(지주사) 설립을 공개 요구하는 한편 금산분리 강화, 자사주 의결권 제한 등 오너 일가의 독선을 막기 위한 입법 활동을 전개했다. 특히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은 ‘데드라인’까지 언급하며 대기업의 자발적인 지배구조 선진화를 촉구했다. 국내 4대 기업 가운데 순환출자 해소를 미뤄온 삼성과 현대차는 최우선 개혁 대상으로 거론됐다. 청와대 사정에 밝은 한 인사는 “삼성과 현대차가 국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크고, 부(富)의 편법 승계와 관련해 과거부터 논란이 끊이지 않았던 만큼 이번만큼은 국민적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것이 현 정부의 입장”이라고 전했다.
현대차는 지난 3월 28일 삼성보다 먼저 지배구조 선진화 방안을 발표했다. 기존 현대모비스→현대차→기아차→현대모비스로 이어지는 순환출자 고리를 끊고 현대모비스 중심의 수직계열화를 이루겠다는 것이다. 현대차 오너 일가인 정몽구·정의선 부자가 현대모비스를 지배함으로써 현대차와 기아차 모두를 지배하는 구조다. 현대차 내부적으로는 여론을 의식해 ‘정공법’을 택했다는 말도 나온다.
이미 지주사 전환을 끝낸 SK그룹은 최태원 SK 회장→SK㈜→SK텔레콤→SK하이닉스란 수직계열화에 성공했다. LG그룹도 구본무·구본준 형제→LG㈜→LG전자→LG디스플레이의 지배구조를 갖췄다. 그러나 재계 ‘맏형’인 삼성은 공정위 등 유관기관의 압박에도 명확한 지배구조 개선안을 내놓지 않고 있다. 삼성 핵심 계열사인 삼성전자가 2016년 인적분할에 따른 지주사 전환을 검토한 바 있지만 이듬해 “지주사 전환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하면서 삼성전자 중심의 지배구조 개편안은 수면 아래로 표류했다.
삼성 지배구조 개편의 핵심은 이건희·이재용 부자가 삼성전자에 대한 지배력을 어떤 방법으로 확보하느냐에 달려 있다. 삼성전자의 단일 최대주주는 국민연금으로 지분 9.58%를 갖고 있다. 2대 주주는 삼성생명(8.59%), 3대 주주는 삼성물산(4.63%)이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3.86%,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0.65%의 지분을 갖고 있다. 즉 어느 누구도 시가총액 313조 원에 달하는 삼성전자를 개인 자격으로 지배하지 못하는 셈이다. 지주회사 형태로 삼성전자를 지배하려면 20% 이상의 지분을 확보해야 한다. 4대 기업 한 관계자는 “천문학적인 자금이 소요되는 일이라 삼성전자를 직접 지배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재계 ‘맏형’인 삼성은 공정위 등 유관기관의 압박에도 명확한 지배구조 개선안을 내놓지 않고 있다. 임준선 기자
삼성은 그간 의결권을 가진 삼성전자 자사주와 삼성화재 등 삼성 계열사 자금을 활용해 삼성전자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해왔다. 그러나 정치권이 자사주 의결권과 계열사를 동원한 오너 일가 지배력 강화에 제동을 걸면서 ‘딜레마’가 시작됐다. 특히 국회 논의 중인 보험업법 개정안이 통과되면 금산분리 원칙에 따라 삼성생명과 삼성화재가 보유 중인 삼성전자 지분을 매각해야 한다. 이 경우 국민연금의 삼성전자에 대한 지배력이 이건희·이재용 부자보다 높아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또 보험업법 이슈와 별개로 삼성전자가 연내 자사주 소각 방침을 밝히면서 삼성생명의 삼성전자 지분 매각은 점차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삼성 관계자는 “현행법상 삼성생명이 삼성전자 지분 10% 이상을 가질 수 없는데 자사주 소각을 하면 자연스레 삼성생명의 지분율이 올라가 10%를 넘길 수 있다”며 “이런 부분까지 종합적으로 고려해 문제를 해결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금융권에선 삼성생명이 매각할 삼성전자 주식을 삼성 지주사 격인 삼성물산이 매입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삼성전자에 대한 오너 일가의 지배력을 높이기 위해선 이재용 부회장이 최대주주로 있는 삼성물산이 삼성전자 주식을 매입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경우 문제는 ‘돈’이다. 삼성물산이 삼성전자 주식을 사들이려면 천문학적인 재원이 필요한데 삼성물산의 시가총액은 26조 원으로 삼성전자의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삼성물산이 보유한 삼성바이오로직스 지분(43.44%)과 삼성생명이 가진 삼성전자 주식(8.59%)을 맞교환하는 방안도 거론되지만 삼성바이오로직스, 삼성생명, 삼성전자 주주들의 이해관계가 엇갈려 실현 여부는 미지수다.
또 삼성물산이 회사 자산 대비 삼성전자 지분을 무리하게 늘리면 지주사 요건이 충족돼 삼성 뜻과 관계 없이 삼성전자 지분을 20%까지 강제 매입해야 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국회 논의 중인 공정거래법 개정안에는 회사가 보유한 지분의 공정가치가 자산 50%를 초과하는 경우 지주사로 강제 전환하도록 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물론 현재 삼성물산 자금력으로 삼성전자 지분을 20%까지 확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무엇보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뇌물 공여 등 혐의로 대법원 선고를 앞둔 이재용 부회장이 삼성물산 중심의 지배구조 개선안을 선뜻 내놓진 못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이 부회장에 대한 2심 선고에서 재판부는 “경영 승계와 관련한 현안이 없었다”는 취지로 1심에서 유죄로 판단한 혐의에 대해 대부분 ‘면죄부’를 내렸다. 그런데 삼성이 다시 삼성물산 중심의 지배구조 개선안을 내놓는다면 경영권 승계를 자인하는 꼴이라 다가올 재판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법조계에 따르면 이 부회장에 대한 대법원 선고는 오는 8월 전후 이뤄질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전해진다. 대법관 인사가 오는 8월로 예정돼 있기 때문에 이 부회장에 대한 선고도 앞당겨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이다. 재계에선 이 부회장에 대한 최종 선고가 이뤄져야만 삼성이 지배구조 개선안을 내놓을 것이란 말이 나온다. 삼성 사정에 밝은 한 인사는 “2016년 삼성이 전자와 금융, 바이오 부문으로 그룹을 쪼개 지주사 전환을 추진하는 방안을 검토했다가 ‘최순실 게이트’ 연루로 모든 계획을 중단했다”며 “현재는 (지주사 전환을) 원점에서 검토 중인데 선고 전까진 결론을 내리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강현석 기자 angeli@ilyo.co.kr
장충기 각계 인사들과 잇따른 회동 왜? 장충기 전 삼성 미래전략실 차장(사장)이 최근 서울 모처에서 잇따라 ‘회동’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그 배경에 관심이 모인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뇌물공여 등 혐의로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장 전 차장은 2심에서 집행유예를 받고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함께 풀려났다. 장 전 차장은 출소 직후 차량을 타고 긴급하게 서울 모처로 이동했고, 출소 당일부터 꾸준히 각계 인사들과 회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최대한 대외활동을 자제하고 있는 이 부회장, 최지성 전 삼성 미래전략실장의 행보와 대비돼 궁금증을 낳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장 전 차장이 주요 대기업 임원들 및 평소 친분이 있던 인사들과 사석에서 만나고 있다는 증언이 있다”며 “‘개인사’라고 하지만 워낙 장 전 차장의 인맥이 화려해 무슨 얘기가 오가는지 궁금해하는 이들이 많다”고 했다. 재계 다른 관계자는 “‘장충기 핸드폰’이 재판 주요 증거로 채택될 만큼 삼성으로서는 문제를 일으킨 것인데 현직도 아닌 장 전 차장이 출소하자마자 각계 인사들과 ‘회동’을 갖는 이유를 알 수 없다”라며 “핸드폰에 공개되지 않은 비화가 얼마나 더 있을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