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 세계은행 총재를 사칭한 페이스북 계정. 페이스북 페이지 캡처
김용 세계은행 총재는 세계적인 인물이다. 2009년 3월 그는 아시아인 최초로 미국 다트머스 대학교 총장을 맡았다. 2012년 4월경 김 총재는 한국계 사상 최초로 세계은행의 수장으로 선출됐다. 2016년 연임에 성공한 김 총재는 반기문 전 UN 사무총장과 함께 국제적인 인지도를 지니고 있다.
페이스북 검색창에 ‘Jim Yong Kim’를 입력하면, 김 총재의 공식 계정이 나온다. ‘Jim Yong Kim’은 그의 영문명이다. 김 총재는 4월 11일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IMF)의 봄 모임에 앞서 제 연설을 듣기 위해 미국 대학에서 많은 학생들이 왔다”는 내용의 글과 사진을 올렸다. 김 총재는 3~4일에 한 번 정도 게시물을 올릴 정도로 페이스북 활동을 활발하게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최근 김 총재를 사칭한 페이스북 사기꾼들이 광범위하게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A 씨는 4월 7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최근 김용 총재가 페친(페이스북 친구) 신청을 해서 기쁜 마음으로 수락했다. 자랑스러운 한국인이었기 때문이다”며 “수락 직후에 답이 왔다. 메시지를 보낸 성의가 고마워서 답신을 보냈다. 몇 차례 대화가 이어졌는데 한국어 구사가 세 살배기 꼬마 수준이었다”고 답했다.
실제로 A 씨가 친구를 수락한 ‘Jim Yong’이란 계정엔 4월 12일 현재, 김 총재를 사칭한 흔적들이 가득하다. 김 총재는 물론 세계은행의 로고도 배경 사진으로 등장한다. 심지어 약력에는 ‘World Bank President(세계은행 총재)’, ‘Dartmouth College(다트머스 대학)에서 President(총장)으로 근무했음’이라고 쓰여 있다. 누가 봐도 김 총재의 ‘진짜’ 페이스북 계정으로 착각할 수 있는 부분이다.
문제는 페이스북 사기꾼들이 김 총재의 ‘지위’를 이용해 교묘한 방식으로 개인정보를 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앞서의 A 씨는 “의심을 하던 차에 그 사람이 제게 국제여권, 운전면허증, 주민등록증을 보내달라고 했다. 아무래도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답을 하지 않았다”며 “지인들에게 말했더니 한국여권을 위조할 목적으로 하는 범죄행위라고 했다. 김 총재 명의로 친구 신청이 오면 차단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일요신문’ 취재 결과, 김 총재를 사칭한 회원들이 2017년부터 전직 외교관들에게 수차례 접근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핀란드와 세네갈에서 대사를 지낸 B 씨는 “이들은 주로 김 총재와 인연이 있는 한국인 전직대사를 목표로 삼았다. 저는 물론 동료 대사들도 하마터면 당할 뻔했다”며 “정말 감쪽같아서 김 총재를 사칭한 사람과 오랫동안 소식을 서로 주고 받았다”고 토로했다.
B 씨 증언을 토대로 구성한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B 씨는 2017년 2월경 페이스북 활동을 처음 시작하면서 동료 대사들의 페이스북 친구 신청을 수락했다. 며칠이 지난 뒤 김용 총재로 보이는 C 씨가 페친 신청을 해왔다. C 씨 이름은 ‘Kim Yong’, 페이스북에는 김 총재의 사진도 있었다. B 씨는 C 씨의 친구목록에서 친분이 있는 외교부 전직 대사들의 이름을 발견하고 별다른 의심없이 친구 신청을 받았다.
페이스북 검색창에 나오는 김용 세계은행 총재의 유사 계정(위 두 건). 아래 페이지가 김용 총재의 공식 페이스북 계정이다. 페이스북 페이지 캡처
B 씨는 김 총재와 페이스북 친구가 되는 것이 영광스러웠다. 당시 북한의 김정은이 말레이시아에서 김정남을 암살한 사건이 외교적인 화두였다. B 씨는 김정남의 아들 김한솔의 신변안전을 위해 국제적 연대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는 김 총재와의 친교가 그런 목적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더구나 C 씨는 “한국을 위해 일하고 싶다”며 B 씨에게 자주 영문 서한을 보내왔다.
하지만 C 씨가 보내온 서한의 영어 문장 수준이 형편 없었다. B 씨가 C 씨의 신분을 의심하기 시작한 계기였다. C 씨는 며칠 뒤 B 씨에게 ‘세계은행 무상지원 자금 신청양식’을 이메일로 보내면서 여권 사본을 첨부하라고 당부했다. B 씨는 미심쩍은 생각이 들어 연락을 끊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C 씨가 문재인 대통령의 외교 자문그룹 인사와 페이스북 친구 사이였기 때문이다.
B 씨는 ‘일요신문’ 측에 “처음에는 사업에 투자하겠다는 식으로 마치 선의를 베풀듯이 접근했다”며 “제가 유럽 탈북인들을 위한 재단을 만들고 싶다고 했더니 자신도 관심이 있다면서 계좌번호와 주민등록번호를 요구했다. 통화 중에 김용 총재가 아니란 확신이 들어 개인정보를 보내지 않았지만 그때만 생각하면 아찔하다. 정의용 국가안보실장과 제가 함께 있는 카카오톡 채팅방이 있다. 그곳에 있는 문 대통령 측 인사도 김용 총재가 아닌지 전혀 몰랐다고 하더라”고 밝혔다. B 씨에 따르면, 국제기구에서 일했던 한국인이나 전직대사를 상대로 수차례 범죄 시도가 있었다고 한다.
김용 총재를 빙자한 사기꾼들의 수법은 교묘하다. 2018년 3월 18일 포털사이트 회원 D 씨는 블로그에 ‘김 총재 사칭 사기꾼 주의’라는 제목의 게시물을 올렸다. D 씨는 “김용 총재로 보이는 사람이 페친 신청을 해왔다”며 “한동안 메시지를 주고받다가 카카오톡 아이디와 이메일 주소를 물어봤다. 첨부파일과 함께 이메일로 서류가 왔다”고 밝혔다.
이메일에는 “저는 세계은행 그룹의 두 번째 임기를 시작했다”며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독립적인 원조를 제공할 계획이다. 첨부파일에 있는 양식을 작성하고 서명한 뒤 신분증 사본을 첨부해서 나에게 보내달라”라고 쓰여 있었다. D 씨가 첨부파일 형태로 받은 서면에는 ‘THE WORLD BANK(세계은행), INTERNATIONAL PROJECT FUNDING(국제 프로젝트 기금)’이라는 영문이 명시돼 있었다. 김 총재가 보낸 이메일로 착각할 수 있는 내용이다.
김용 총재뿐만이 아니다. 콜린 파월 전 미국 국무부 장관, 크리스틴 레가르드 IMF 총재 등 유명인을 사칭한 페이스북 사기꾼들이 개인정보를 노리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페이스북 회원은 “파월 전 장관이 며칠 전에 페이스북 신청을 해왔지만 프로필 사진만 달랑 하나 있었다. 이렇게 계정이 허술하면 차단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주의하지 않으면 바로 속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처럼 페이스북 사기꾼들이 버젓이 활동하고 있는데도 정부 당국은 수수방관 중이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 관계자는 “페이스북에 대한 모니터링을 하고 있지만 김용 총재 본인이 신고하지 않는 이상 제재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다만, 피해를 당한 당사자가 페이스북에 가짜 계정을 신고하면 페이스북 측이 계정을 삭제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보이스피싱 사례처럼 정부 당국의 관심과 처벌이 시급하다는 지적에 힘이 실리고 있다.
최선재 기자 s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