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재계 순위에서 눈에 띄는 기업은 재계 1순위 자리를 9년간 지켜온 현대다. 최준필 기자
1992~2000년 재계 순위에서 단연 눈에 띄는 기업은 재계 1위 자리를 9년간 지킨 ‘현대’다. 1992년 자산 총액 23조 1160억 원을 기록했던 현대는 2000년 88조 6490억 원으로 급격한 성장세를 보였다. 매년 매출액 10% 이상 투자해 자동차·기계·중공업·전자 등에서 성과를 거뒀다. 당대엔 여러 사업 분야에서 삼성보다 앞선 경쟁력을 보이기도 했다.
이 시기 현대그룹의 주력 사업 중 하나는 건설업이다. 1980년대부터 이어져온 건설 수요와 대규모 주택, 신도시 개발 열풍은 건설업계에 호황을 가져다줬다. 1992년 재계 순위 20위권에서 건설 계열사를 지닌 대기업을 봐도 현대, 대우, 쌍용, 대림, 동아건설, 한양, 한일, 극동건설 등 10여 곳이 넘는다. 당시엔 건설기업들 간 경쟁도 상당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현대건설은 한때 31억 달러 규모의 해외공사까지 수주하며 이 같은 분위기를 이끌었다.
그러나 1990년 후반 들어 이들 절반이 순위 경쟁에서 밀려나기 시작했다. 높은 주택 보급률과 부동산 가격 안정화 등으로 건설 경기가 하향세를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997년 불어닥친 IMF 외환위기, 성수대교·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등에 따른 건설업계에 대한 불신도 건설경기 침체의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다. 건설기업들은 1996년부터 대규모기업집단 명단에서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쌍용건설, 동아건설, 극동건설 등 적지 않은 건설기업이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규모가 크게 축소되거나 사라졌다.
IMF 외환위기는 비단 건설기업뿐 아니라 외형 중심의 성장을 이어오던 우리나라 산업과 기업에 큰 변화를 야기했다. 당시 무리한 투자·경영 등으로 기아, 한라, 진로, 한보, 삼미, 해태 등이 재계 순위에서 사라졌다. 이른바 ‘대마불사’ 신화의 붕괴였다. 현대, 삼성, 럭키금성(현 LG)과 함께 4대 기업군으로 꼽힌 대우도 1999년 해체 수순을 밟았다. 당시 건설·무역·조선·자동차·전자 등 한국의 주요 사업부문을 이끌었던 대우그룹의 해체는 우리나라 기업 구조를 되돌아보게 했을 뿐 아니라 사업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
IMF 외환위기를 겪은 후 2000년대 들어 첨단·지식기반산업 등이 탄력을 받으면서 삼성, LG, SK, 현대자동차 등이 재계 순위 상위권에 올라섰다. 이들 계열사인 삼성전자·LG전자·삼성생명·SK텔레콤·기아자동차 등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 우리나라 전체 수출에서 반도체, 휴대폰, TFT-LCD 등 IT제품이 차지하는 비중도 1998년 22.8%에서 2004년 31%로 확대됐다.
삼성은 반도체산업을 주도한 삼성전자를 원동력으로 해 2001년 재계 순위 1위에 올라서면서 지금까지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삼성전자는 이미 1992년 64M DRAM, 1994년 256M DRM을 세계 최초로 개발해 한국이 반도체 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2002년에는 메모리 반도체 세계 1위에 등극했다. 삼성전자의 반도체 힘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올해 1분기 삼성전자가 기록한 분기 사상 최대 영업이익인 15조 6000억 원 중 4분의 3가량이 반도체 부문에서 나왔다.
2001년부터 재계 1순위를 지켜온 삼성은 반도체 산업 활황을 주도했다. 고성준 기자.
2005년부터 재계 순위 3, 4위 다툼을 벌이던 SK와 LG도 각각 SK하이닉스와 LG전자, LG디스플레이 등을 앞세워 반도체산업에 주력해왔다. 특히 SK하이닉스는 지난해 4분기 기준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 점유율 2위를 기록하며 1위 삼성전자와 함께 우리나라 반도체산업을 이끌고 있다. 양사의 D램·낸드플래시 시장 합산 점유율은 각각 73.1%, 52.%이다. 최근 SK하이닉스가 도시바 인수를 결정하면서 세계 시장에서 삼성·SK의 양강 체제는 더욱 공고해질 것이란 분석이 나오고 있다.
2001년 이른바 ‘왕자의 난’으로 현대그룹에서 분리된 현대자동차가 재계 순위 상위권에 오른 것도 눈에 띄는 점이다. 2000년대 초 재계 5위권이던 현대자동차는 2005년 삼성에 이어 재계 2위로 올라선 후 지금까지 이를 유지하고 있다. 현대자동차의 자산은 2017년 218조 6000억 원으로 증가했다. 자동차업계는 200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품질개선·가격경쟁력 등의 양적 성장뿐 아니라 디자인·브랜드 가치 등의 질적 경쟁력까지 강화해 나가기 시작했다. 윤창현 서울시립대 경영학부 교수는 “이 같은 업계 변화 등이 국내·해외 시장에 대한 현대차의 경쟁력을 높인 것”이라고 설명했다.
2000년대 초중반 세계 조선경기 호조로 큰 호황을 누렸던 대기업들의 조선·해운 계열사는 글로벌 금융위기를 맞으면서 큰 부진을 겪었다. 해상물동량·신규수주량이 급감하고 선박금융 등이 축소하면서 해운업이 침체하기 시작한 것. 조선사들은 해양플랜트 설계·시공과 저가수주 등으로 이를 타개하려 했지만 오히려 막대한 손실만 떠안게 됐다. 조선업 빅3로 불리는 현대중공업·삼성중공업·대우조선해양과 한진중공업 등은 이때부터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2000년대 초까지 재계 상위권이었던 한진이 10위권 밖으로 밀려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최근 새롭게 주목할 점은 제약·바이오산업에 대한 기업들의 투자다. 지난 10년간 재계 순위의 큰 변화는 없었지만 관련 계열사의 변화는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재계 1위인 삼성은 2011년 바이오시밀러 의약품을 연구·개발하는 삼성바이오로직스와 2012년 그 자회사인 삼성바이오에피스를 설립해 해당 산업에 투자하고 있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지난 10일 기준 코스피 시가총액 3위를 기록하며 바이오 열풍을 이끌고 있다. 재계 3위인 SK는 SK케미칼·SK바이오팜·SK바이오텍, 4위 LG는 LG화학 생명과학사업부를 앞세워 바이오산업을 키우고 있다. 10위권 아래 기업들 중엔 KT&G 영진약품, 코오롱의 코오롱생명과학·코오롱제약 등이 있다. 최배근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바이오는 기존부터 존재해왔던 산업”이라며 “최근 기업들이 해당 산업에 주목하는 이유는 노령화와 길어진 평균 수명, 높은 성장 가능성 등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기존 산업구조를 기반으로 한 아이디어 집약적인 사업 모델이 등장할 것이라고 내다본다. 윤창현 교수는 “기존 자동차 산업에 인공지능이 접목돼 자율주행이 가능해지는 식의 산업 내부·콘텐츠적 변화가 두드러질 것”이라며 “그 변화는 불연속적이며 예상치 못한 경우가 많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최배근 교수는 “한국이 이전까지 제조업 중심이었다면 앞으론 기존 재화·서비스 등에 아이디어를 접목해 수익을 내는 산업모델이 대거 등장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 같은 조언으로 미뤄보면 앞으로 다시 20년 후 재계 순위와 각 기업의 주력 사업에도 많은 변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성진 기자 reveal@ilyo.co.kr
대기업 총수들 신년사 변화 수익 향상 강조→책임 경영 중시 대기업 총수들의 신년사를 보면 해당 기업의 한 해 목표·기업관뿐 아니라 재계 분위기까지 짐작해볼 수 있다. 올해 총수들은 신년사에서 조직문화, 고객중심, 사회공헌 등을 언급하며 상생과 소통을 중시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1990년대는 다르다. 현대·삼성·대우 등의 총수들은 노사대립 종식, 근무의 효율성 향상 등을 강조하며 기업 성장에 초점을 맞췄다. 1992년 총수들은 원만한 노사관계 형성과 자율적이며 능동·효율적인 근무를 강조했다. 당시 재계 1위였던 현대의 정세영 회장은 “4대 선거를 틈타 생산 현장이나 경영활동에 나쁜 영향을 미칠 것이 우려된다”며 원만한 노사관계를 정립하고 인력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것을 강조했다. 재계 2위였던 대우의 김우중 회장의 발언은 이보다 강경했다. 김 회장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근로의지와 노동윤리를 파괴하는 노사분규는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히며 자율경영의 조기정착, 관리혁명의 목표 달성 등을 추가로 역설했다. 당시 재계 3위 삼성의 이건희 회장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 회장은 고효율의 견실경영과 자율경영, 새로운 기업상 정립 등을 경영방침으로 내세웠다. 그는 “만성 적자사업을 정리하고 회사간 중복사업을 조정하는 등 사업구조를 재구축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4위인 럭키금성(현 LG)의 구자경 회장은 수익성 향상에 방점을 찍었다. 그는 “외형적 성장보다는 경영의 질적 향상을 도모해야 한다”며 “이익이 지속적으로 날 수 있는 강한 체질을 만들 것”을 주문했다. 전문가들은 1990년대엔 비시장적 요인이 기업 경영에 미치는 영향이 미미해 이 같은 차이를 보이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서용구 숙명여대 경영학부 교수는 “과거엔 경영만 잘하면 됐기에 총수들이 생산·수익성 향상을 강조했던 것”이라며 “현재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중시하는 따뜻한 자본주의의 도래로 경영을 위협할 수 있는 비시장적 요인까지 신경 쓴다”고 설명했다. [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