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의로 법을 어기면 큰 돈을 물어내야 하는 징벌적 배상제는 미국 회사가 법을 엄격하게 따르는 한 가지 이유가 됐다.
2015년, 2016년 20대, 30대 청년 6명이 시력을 잃었다. 스마트폰 부품 공장에서 일하면서 만졌던 메탄올이 실명을 불러왔기 때문이다. 원가 절감을 위해서 에탄올 대신 메탄올을 쓰면서 발생한 사고였다. 하청업체 몇 곳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다. 고용노동부가 감독을 위해 나왔던 공장은 메탄올을 숨겼다가 다시 사용했고 또 다시 눈 먼 노동자가 나왔다.
이들을 눈 멀게 한 관리자나 회사 대표는 최저 처벌을 받았고, 피해자들도 최저 보상을 받았다. 이렇게 악의적인 행위에 처벌이 낮다보니 안전불감증은 심해져 간다. ‘문제 없겠지’, ‘괜찮겠지’라고 생각하고 넘어가는 일이 잦다.
2015년 독일 폭스바겐에서 디젤 엔진 배출가스량을 조작한 ‘디젤게이트’가 터졌다. 클린 디젤을 외쳤던 폭스바겐은 조작을 통해 명성을 획득했다는 점이 밝혀졌다. 환경을 위해 비싼 돈을 지불했던 소비자들은 뒤통수를 맞은 셈이었다.
사건 이후 폭스바겐의 대처는 미국과 한국에서 극명하게 엇갈렸다. 이유는 징벌적 배상제 유무가 컸다. 징벌적 배상제는 가해자의 행위가 악의적이고 반사회적일 경우 실제 손해액보다 훨씬 더 많은 손해배상을 부과하는 제도다. 징벌적 손해배상이 인정되면 일반적인 배상에 최대 10배 이하 벌금액을 추가하는 일이다.
국내 로펌에서 일하는 한 변호사는 “일반적으로 10배 이하의 징벌적 배상을 하라는 가이드라인이 있다. 그래서 배심원들이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인정하는지 여부가 핵심 쟁점으로 여겨진다”며 “그래서인지 미국 회사와 유럽 회사를 맡았을 때 반응이 다르다. 일반적으로 유럽 회사보다 훨씬 더 미국 회사가 법 적용을 더 보수적으로 한다. 혹시 법에 저촉될 만한 게 없는지 까다롭게 따진다”고 귀띔했다.
징벌적 손해배상은 함무라비 법전까지 거슬러 올라갈 만큼 오래된 제도다. 함무라비 법전에는 ‘도둑이 소나 양, 당나귀, 돼지, 염소 중 하나라도 훔쳤더라도 그 값의 열 배로 보상해 주어야 한다. 도둑이 보상해 줄 돈이 없다면 사형당할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삼국시대 이전 부여 법률에도 ‘물건을 훔친 자는 12배로 배상하고, 배상하지 못할 경우 노비로 한다’는 내용이 있다.
법조계 관계자들은 우리나라에 징벌적 손해배상제도가 없는 이유로 법 체계의 다름을 꼽는다.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는 대표적으로 영미법 체계에서 도입된 법이다. 대륙법 체계인 우리나라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까진 없었지만 지속적인 요구와 논란 끝에 우리나라에도 4월 19일부터 징벌적 손해배상제도가 도입된다. 아쉬움은 남는다. 징벌적 배상제가 제조물 책임법에만 도입되고 미국보다 훨씬 적은 3배 이하로 한정되며 4월 19일 이후 판매된 제품에만 해당된다는 점이다.
오히려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미국에서 징벌적 배상제를 뒷받침하는 다른 법들의 입법은 논의조차 되지 않고 있다. 한국과 미국 변호사인 하종선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는 “미국은 징벌적 배상제를 뒷받침하는 디스커버리(Discovery, 증거개시제도) 제도와 집단 소송제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집단 소송제는 그나마 이야기는 나오지만 디스커버리 제도는 논의조차 되고 있지 않다”고 설명했다.
디스커버리 제도는 사실 심리가 개시되기 전 당사자가 서로가 가진 증거와 서류를 확보할 수 있는 제도다. 미국 민사소송에서는 보통 디스커버리 기간이 1년 넘게 걸리는 경우가 흔하다. 디스커버리 제도의 핵심이 증명 책임이 없는 당사자라도 당사자 스스로 가진 증거를 공개해야 한다는 점이다.
디스커버리 제도의 필요성은 산업이 고도로 발전되면서 더 커지고 있다. 가습기 살균제, 디젤 게이트, 삼성 반도체 공장 같은 사건들은 일반인이 피해를 입어도 그 증거를 찾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일반인은 이해하기조차 어려운 제조 과정에서 제조물의 결함이나 누군가의 피해가 고의적이고 반 사회적임을 입증하기란 때로는 불가능에 가깝다. 때문에 징벌적 배상의 적용을 위해서는 상대방이 증거를 내놓는 디스커버리 제도가 꼭 필요하다는 게 중론이다. 특히 미국 디스커버리 제도는 상대방이 증거공개 의무를 이행하지 않을 시 강력한 제재수단이 따른다. 답변을 회피하는 증거는 요청한 증거가 사실인 것으로 간주하거나 형사상 법정모독죄에 처해지기도 한다.
정책전문가로 꼽히는 최병천 전 국회보좌관은 “디스커버리 제도가 도입되지 않으면 징벌적 손해배상은 제 역할을 하기 어렵다고 봐야 한다. 왜냐하면, 민사적 규제수단이 제대로 작동되려면, 정보의 비대칭성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법조계에서는 이들 법이 제대로 적용되기 위해서는 미뤄지고 있는 집단 소송제도 꼭 도입되어야 된다고 입을 모은다. 집단 소송제는 역시 미국 법으로 대표성이 있는 몇 명이 승소해서 보상을 받으면 같은 상황을 겪은 피해자는 소송 없이 똑같은 구제를 받을 수 있는 법이다. 피해를 받았지만 변호사 비용 등 법적 비용 탓에 소송을 주저하는 사람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법이다.
예를 들어 지난 4월 초 휴대전화 개통을 하다 ‘개통 사기’를 당한 피해자가 1000명에 달하는 사건이 터졌다. 한 판매업자가 소비자들에게 단말기 가격의 일부를 미리 현금으로 내면 3달 뒤 잔금을 완납해주겠다고 약속한 뒤 돈만 챙겨 달아났다. 사건 피해자들은 100만 원에서 200만 원 정도 피해를 봤지만 피해 금액이 상대적으로 크지 않아 법적 비용 탓에 소송을 포기하는 사례도 있었다. 만약 집단 소송제가 있었다면 이들 모두 어렵지 않게 구제될 수 있었을 것이다.
징벌적 배상제, 집단소송제, 디스커버리 제도가 우리나라 회사에 큰 위협이 될 수도 있다는 지적이 있다. 에어백 제조 회사 등이 징벌적 배상제로 사실상 파산에 이른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 변호사는 “우리 나라에 도입하면 회사 망한다는 사람들이 많지만 미국은 끄떡없이 기업이 성장하고 있다”며 “관심을 둬야 할 안전 문제 등에 ‘괜찮겠지’하면서 넘어가는 무모한 무관심(reckless indifference)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이들 법 적용이 꼭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김태현 기자 toyo@ilyo.co.kr
야구장서 공 맞아도 엄청난 보상? 징벌적 배상제 Q&A 국내에도 징벌적 배상제 도입이 초읽기에 돌입하면서 각 기업이 분주해지고 있다. 제조물 책임법에 징벌적 배상제가 도입돼 최대 3배까지 배상해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2년 전 ‘갤럭시 노트7’ 발화 사건으로 한 차례 홍역을 겪었다. 발화 사건 1년 뒤 삼성전자는 ‘글로벌품질혁신실’로 품질 이슈에 대응하고 있다. 협력사 품질도 전담조직을 꾸려 지원하고 있다. 징벌적 배상제를 대비해 삼성화재의 생산물 배상 책임보험 규모를 79억 원에서 85억 원으로 확대했다고 한다. 업계에서는 LG전자도 생산물 배상 책임보험 규모를 늘렸다고 보고 있다. 지난해 8월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 본관 인왕실에서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을 만나 위로하고 있다. 사진=청와대 제공 하지만 국내에 없었던 법인 만큼 미국의 징벌적 배상제를 향한 오해도 많다. ‘야구장에서 야구공을 맞는 정도로 비교적 사소한 안전 문제도 징벌적 배상제로 인정받으면 수백억 원 배상을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바로 그런 예다. 하지만 전문가의 의견은 다르다. 전문가들은 징벌적 배상제가 인정되는 영역이 명확히 구분된다고 말한다. 하종선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는 “징벌적 배상은 그 위법이 고의적이며 반사회적인 경우에 해당된다”며 “예를 들어 야구장에서 공을 맞는 경우는 어느 정도 공이 날아온다는 위험을 간주하고 들어갔다고 봐야 한다. 다만 그 지역에서 야구공을 맞는 사람이 계속 나왔는데도 아무런 조치를 안 했고 그때 또 다시 피해자가 나온다면 그때는 고려해볼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모든 법에서 적용 가능하지만 대부분 제조물 책임에서 활발하게 적용된다. 수많은 피해자가 양산될 수 있는 만큼 안전 불감증이 존재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2011년부터 대량으로 발생한 가습기 살균제 사태는 징벌적 배상제가 적용될 만한 사건이다. 이 사태의 주범으로 꼽히는 옥시는 성인 피해자에게 최대 3억 5000만 원∼5억 5000만 원의 위자료를 지급하고 사망·중상에 이른 영유아·어린이는 총 10억 원을 준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만약 징벌적 배상제가 적용됐다면 배상액은 최대 10배까지 이를 가능성이 높다. 특히 옥시 사태는 징벌적 배상제를 넘어 디스커버리 제도 적용 필요성도 보여준 사건이다. 2016년 2월 검찰은 옥시 본사 등의 압수수색 과정에서 2001년부터 2011년까지 보건당국이 제품 수거와 함께 판매 중단을 명령한 물질안전보건자료를 옥시 측이 통째로 폐기 또는 삭제한 사실을 확인한 바 있다. 미국 디스커버리 제도가 있었다면 옥시는 법정 모독죄와 함께 증거가 없어도 자료 삭제 조치 자체가 증거로 인정될 가능성도 높기 때문이다. 이들 법이 있었다면 옥시 측의 무책임한 상품 발매 대신 최소한의 사전 안전 조치를 기대해 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더한다. 특허 소송도 디스커버리 제도가 필요한 이유다. 디스커버리 제도의 필요성에 대해 한 변리사는 “특허소송은 점차 글로벌화되고 있는데 증거를 얻기 힘든 우리나라에서는 실체적 진실을 발견하기 쉽지 않다. 우리나라의 기업들조차 미국으로 소송하러 가는 이유가 손해배상액이 커서만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