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엽은 최근 자신의 야구 인생을 담은 자서전 ‘나.36.이승엽’ 출간과 이승엽야구장학재단을 출범시키는 등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일요신문’ 창간 26주년 기념 특별 인터뷰를 위해 오랜만에 이승엽과 마주 앉았다. 인터뷰는 근황을 묻는 걸로 시작했다.
지난 4월 10일 오전 양재동에서 이승엽 야구장학재단 이사장이 ‘일요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임준선 기자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야구를 안 하고 지내는 시간들이 생소하지만 재미있게 보내고 있다. 23년간 역동적인 삶을 영위하다 은퇴 후 아무 것도 안하면 시간이 너무 더디 갈 것만 같았다. 그래서 이런저런 일들을 준비했고 하나 둘씩 숙제를 해가는 중이다.”
―가장 의미 있는 일이라면 이승엽야구장학재단 출범이 아닐까 싶다.
“가장 어려웠고 조심스러웠다. 좋은 목적을 갖고 시작한 일이지만 행여 주위에서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볼까 싶어 의식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일단 첫 테이프를 끊은 만큼 책임감을 갖고 잘해나가려고 한다.”
―재단을 설립하면서 애로 사항이 있었다면 어떤 부분인가.
“사람들 만나는 일이다. 선수 생활할 때는 지인들 외엔 가급적 만남을 갖지 않았다. 경기에만 집중하고 싶었고, 내게 가장 중요한 게 야구였기 때문에 새로운 사람을 만나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재단 일을 하면서 사람 만나는 일들이 늘어났다. 말하기보단 듣는 입장이 되기도 했다. 생활 패턴이나 사고방식이 모두 바뀌었다. 처음에는 이런 일이 익숙지 않아 야구를 너무 일찍 그만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지금은 적응이 된 건가.
“많이 적응됐다. 시간이 지나고 경험이 쌓이면서 ‘이게 사람 사는 재미구나’ 싶을 때가 많다. 조금 후회되는 부분도 있다. 은퇴하기 2, 3년 전부터 사회생활 적응을 위해 준비했더라면 은퇴 후 삶이 훨씬 더 수월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성적 부진으로 밀려나듯이 은퇴하는 게 아니라 선수로서 좋은 모습을 보이며 명예롭게 은퇴해야겠다는 생각에 야구에 더 집중했었다. 평소 기자들의 질문에도 묻는 말에만 대답했다. 내가 먼저 다가간 적이 거의 없다. 그렇게 했기 때문에 23년 동안 선수 생활을 했다고 믿는다. 이전에는 경기 후 팬들을 만나는 게 부담스러웠다. 경기 마치면 가급적 빨리 경기장을 벗어나고 싶었다. 지금은 팬들을 만나 안부도 주고받고, 사인 좀 그만 받으라고 농담도 하지만 선수 시절에는 틈을 보이지 않으려 했다. 많이 후회된다.”
―은퇴한 선수들 중에는 이만수, 양준혁, 박찬호 등이 야구재단 설립 후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승엽재단은 이들과 어떤 차이가 있는 건가.
“야구 실력으로는 선배들을 따라 잡을 수 없지만 재단 관련해서는 선배들이 하시는 것 이상의 모습을 보이고 싶다. 절대 선배들한테 뒤지고 싶지 않다(웃음). 이승엽야구장학재단은 야구 유망주들의 소중한 꿈을 실현시키는 데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하는 게 목표다. 재단 설립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인간적인 배움을 얻게 됐다.”
―이전 선배들이 자주 했던 말 중에서 ‘선수로 뛸 때가 좋았다’란 내용이 있다. 혹시 은퇴 후 이 말을 실감한 적이 있나.
“그런 생각 자주 한다. 재단 출범식할 때 영상으로 내가 선수 생활했던 장면들이 화면에 비치는 순서가 있었다. 그 영상을 보면서 ‘아, 내가 저렇게 플레이 했구나’ ‘멋진 홈런을 날렸구나’ ‘은퇴식이 정말 감격스러웠다’ 등의 생각들이 스쳐 지나가면서 당장이라도 야구장으로 달려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팬들의 환호성이 그리운 게 아니라 내가 가장 잘할 수 있고, 가장 좋아했던 게 야구였기 때문이다. 선수 생활에서 은퇴는 했지만 야구는 항상 내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더 뛸 수 있는 몸 상태임에도 팀에 피해를 주지 말자는 생각에 은퇴를 결정했다고 들었다. 메이저리그에는 45세의 이치로도 현역으로 뛰고 있고 40세의 애드리언 벨트레도 텍사스 레인저스의 리더로 활약 중이다. 프로는 선후배를 의식하는 게 아닌 경쟁을 통해 자리가 정해지는 것 아닌가.
“그건 각자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이치로는 이치로만의 목표가 있는 것이고, 벨트레도 마찬가지다. 특히 미국은 개인 성향이 강한 나라이고 프로에선 남을 배려하는 게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일본 생활을 정리하고 삼성 라이온즈로 복귀했다가 허리 통증으로 2군에 내려간 적이 있었다. 2군에서 나이 어린 선수들이 1군 엔트리에 이름을 올리기 위해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선수 이승엽은 커리어 때문에 웬만하면 2군으로 내려가지 않는다. 실력이 아닌 이름값 때문이다. 그런 환경에선 내가 그 어린 선수들의 꿈을 빼앗는 게 아닌가 싶었다. 더 이상 야구로 보여줄 게 없다면 미련 두지 말고 과감히 그만두자고 결심했다. 후배들이 올라갈 수 있는 길을 마련해줘야 하는데 내가 그 길을 막고 있는 듯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2015년에 2년 뒤 은퇴하겠다는 마음을 굳힐 수 있었다. 2년 정도의 시간이 주어지면 삼성에서 내 자리를 채울 선수를 키워낼 것으로 믿었다. 적절한 시기에 은퇴했다고 본다. 타율 1할 치고 비난 받으면서 은퇴했다면 가슴이 아팠을 것이다.”
―‘일요신문’ 창간 기념 인터뷰인 만큼 ‘일요신문’과 이승엽과의 인연을 살펴보기로 하자. 그동안 ‘일요신문’에선 선수 이승엽과 관련된 많은 기사들을 다뤘었다.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는 내용이 2001년에 나온 아내 이송정 씨 인터뷰였다. 당시 열애설의 주인공이었던 중앙대 연극과에 재학 중인 이 씨를 만나기 위해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다 어렵게 전화 연결이 됐고, 그게 인터뷰로 이어졌는데 그 사실을 알게 된 선수 이승엽으로부터 항의 전화를 받은 기억이 난다.
“내가 그랬었나? 그 내용은 잘 기억이 안 난다. 그런데 아내 연락처를 어떻게 알아냈나? 정말 신기하다(웃음).”
―2003년 초청 선수 자격으로 심정수와 함께 플로리다 말린스 스프링캠프를 경험했던 내용도 다뤘다. 당시 심정수를 통해 웨이트트레이닝의 중요성을 절감했다고 인터뷰 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식단 조절 같은 건 생각지도 못했던 시절이었다. 주는 대로 아무 거나 먹고, 많이 자고 쉬는 게 컨디션 유지하는 데 최고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심)정수 형은 달랐다. 단백질 보충제를 물에 타서 먹기 시작했다. 웨이트트레이닝도 내가 배웠던 거랑 차원이 달랐다. 정수 형뿐만 아니라 말린스 캠프에서 미국 선수들을 상대하며 그들의 웨이트트레이닝 법을 배울 수 있었다. 2002년에는 시카고 컵스 초청으로 캠프에 참가했었는데 새미 소사의 엄청난 체격을 보고 충격을 받기도 했다. 당시 왜소했던 나로선 그들의 체격이 보고도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2006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대회에 출전해서 미국과의 8강전 때 데릭 지터, 알렉스 로드리게스 등과 함께 같은 필드에서 뛰었던 경험도 새롭다.”
―2004년에는 일본으로 향하는 출국장에 귀고리와 노란색으로 염색하고 나타났다. 당시 공항으로 취재를 갔다가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다.
“미친 짓이었죠(웃음). 어린 나이라 한번 해보고 싶어서 일탈했다가 금세 염색을 뺐다. 그동안 한국에선 불가능한 일이지만 외국 가는 거니까 한번 해보자고 생각했던 건데, 바로 후회했다.”
―2006년 아버지 이춘광 씨가 ‘일요신문’에 ‘별들의 탄생 신화’를 연재했었다.
“알고 있다. 하지만 난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하시는 거라 적극적으로 만류할 수 없었지만 가족들이 언론에 소개되는 걸 지금도 달가워하지 않는 편이다.”
―2009년 4월, 일본 도쿄에서 창간 17주년 기념 인터뷰를 진행했었다. 당시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하라 감독과 사이가 안 좋았는지 굉장히 힘든 상황에서 인터뷰한 걸로 알고 있다.
“일본 생활은 항상 힘들었다. 그중 2008년은 부상과 수술 등으로 가장 힘들게 보냈었다. 높은 연봉을 받는 외국인 선수라 하라 감독님도 나에 대한 기대가 컸을 것이다. 그런데 부진한 모습만 보이고 있으니 조금씩 나한테서 멀어진다는 느낌을 풍겼다. 지금 같으면 감독님한테 면담 요청이라도 해서 대화를 통해 풀어갔을 텐데 그때는 더 움츠러들던 시기라 감독님과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았던 것 같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당시의 상황을 어떻게 해서든 좋게 풀어가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이승엽과 일요신문의 인연은 각별하다. 2009년 4월 창간 17년 특집 이승엽 인터뷰 지면. 당시 이승엽은 일본 요미우리에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오릭스 버팔로스 시절에는 박찬호와 한 팀에서 생활했었다. 박찬호와 같은 아파트 위아래 층에 살고 있는 걸 오사카에서 본 적이 있었다.
“당시 찬호 형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주로 2군에 계셨지만 말이다. 메이저리그 출신의 유명 선수도 우리랑 똑같은 사람이구나 싶더라. 굉장히 인간적인 매력이 많은 분이다. 그때 인연으로 재단을 설립하면서 찬호 형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찬호 형의 인맥을 보면 굉장하다는 생각뿐이다. 내가 하지 못했던 걸 많이 이뤄내셨다. 덕분에 찬호 형을 통해 배우는 게 많다.”
―2011년 12월에 삼성 라이온즈로 복귀해서 2015년 포항에서 KBO리그 최초의 400홈런을 달성했다.
“처음이라 더 가치가 있었다. 일본에서 야구하며 지바 롯데와 계약이 끝날 때 삼성으로 복귀하려 했다가 무산된 적이 있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계약이 끝날 때도 복귀를 계획했다가 접고 말았다. 2010년 12월에 오릭스와 2년 계약을 하면서 2년 후엔 더 이상 일본에선 뛰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당시 삼성도 내가 뛸 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오릭스와 계약하고 아내에게 2년 뒤 은퇴할 것이라고 말했다. 2012년을 마지막으로 은퇴할 줄 알았는데 2011년 12월에 삼성 라이온즈의 부름을 받았다. 당시 나로선 한국에서 뛰는 시간을 보너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보너스의 시간 동안 정말 행복하게 야구했다. 일본으로 떠나기 전의 폭발력 있는 모습은 보여주지 못했지만 야구를 통해 느끼는 행복지수는 몇 배 더 높았다. 일본에서 보낸 8년의 시간이 너무 힘든 나머지 다신 떠올리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조차 경험이었고 공부였다는 걸 깨달았다.”
―야구선수 이승엽은 운과 실력이 몇 대 몇이었다고 생각하나.
“반반이었다. 운도 중요하고, 실력도 중요하고. 더 중요한 걸 꼽으라고 한다면 노력이다. 아무리 운이 좋아도 노력하지 않는 자에게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올 시즌 KBO리그는 1999년 생 ‘베이징 키즈’들의 활약이 대단하다. 어떤 관점에서 이들을 지켜보는지 궁금하다.
“흐뭇하고 감사할 따름이다. 강백호, 곽빈, 한동희 등은 내가 봐도 눈에 띄는 신인이다. 하지만 냉정할 필요도 있다. 주위에서 아무리 잘한다고 칭찬해도 선수는 항상 부족함을 느껴야 한다. 주위의 칭찬에 매너리즘에 빠진다면 분명 위기에 직면할 것이다. 잘 다져서 한국 야구의 뿌리 깊은 나무가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마지막 질문이다. 은퇴한 걸 후회해본 적이 두 번 이상은 있다? 없다?
“하하, 후회하기보단 그리운 적은 있었다. KBO 홍보대사를 맡고 있어 종종 야구장을 찾는데 양복을 입고 관중석에서 야구를 보는 느낌이 생경하다. 지금도 밤마다 야구 하이라이트는 빼놓지 않고 챙겨 본다. 한국 선수가 출전하는 메이저리그 중계도 열심히 시청한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야구계로 복귀할 계획은 갖고 있기 때문에 야구 감각을 잃지 않으려 노력 중이다. 물론 행정가가 될지, 지도자가 될지는 아직 모른다. 준비만 하고 있을 뿐이다. 은퇴 전에는 은퇴 후의 삶이 어떻게 펼쳐질지 궁금했다. 지금까진 잘 가고 있는 것 같다. 이렇게 가다 보면 또 다른 길이 나올 것이다. 그 길을 어떻게 걸어갈지는 그때 가서 생각하고 싶다.”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