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식 전 금융감독원장. 임준선 기자
“정의당의 힘을 재확인했다.”
문재인 정부 고위직 잔혹사를 이어간 것은 정의당의 ‘데스노트’였다. 이는 원내 6석에 불과한 정의당이 임명을 반대하면 어김없이 낙마한 데서 유래했다. 사신 공책에 특정인을 적으면 그 사람은 죽는다는 일본 만화 ‘데스노트’를 빗댄 말이다. 앞서 안경환 전 법무부, 조대엽 전 고용노동부, 박성진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후보자와 박기영 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과학기술혁신본부장 내정자 등도 정의당의 데스노트를 피할 수 없었다.
그만큼 정의당 데스노트의 위력은 컸다. 정치권 한 관계자는 정의당 데스노트 의미에 대해 “당·청을 고립무원 열차로 싣는 저승사자”라고 말했다. 여소야대 국면에서 민주당의 유일한 우군인 정의당이 등을 돌린다는 것은 ‘당·청=절름발이 신세’를 의미한다는 얘기다. 야당 한 의원도 “개헌도 일자리 추가경정예산도 민주당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있느냐”며 “2(민주당·정의당)대 3(자유한국당·바른미래당·민주평화당)과 1대 4는 차원이 다르다”고 설명했다.
실제 그랬다. 야 3당이 반대한 인사라도 정의당이 찬성한 이낙연 국무총리, 강경화 외교부 장관, 송영무 국방부 장관,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 등은 내각에 입성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정면돌파냐, 출구전략이냐’ 해석이 분분했던 청와대의 ‘플랜B’(중앙선거관리위원회 질의)도 정의당의 ‘김기식 불가’ 당론 확정 직후 나왔다. 정의당이 4월 12일 오전 당 상무회의에서 김 전 원장에 대해 자진 사퇴를 촉구키로 하자, 같은 날 오후 청와대는 선관위에 공을 넘겼다.
이어 문 대통령은 다음 날인 4월 13일 이례적으로 서면 메시지를 내고 “(김 전 원장의) 과거 국회의원 시절 행위 중 어느 하나라도 위법이라는 객관적인 판정이 있으면 사임토록 하겠다”고 말했다. 정의당 데스노트가 ‘김기식 구하기’로 일관하던 청와대를 움직인 셈이다.
애초 정의당 내부에는 김 전 원장의 임명을 놓고 금융개혁의 적임자라는 평가가 많았다. 박원순 서울시장과 함께 쌍두마차로 참여연대를 이끌었던 김 전 원장은 정의당과 정서적으로 그만큼 가까웠다.
그러나 국회의원 시절 외유성 해외 출장과 후원금 논란 등 김 전 원장의 의혹이 양파껍질 까듯 계속 이어지자, 4월 둘째 주 ‘불가론’으로 급선회했다. 특히 이 과정에서 심상정 전 대표 역할이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의당은 4월 9일까지만 하더라도 김 전 원장에 대해 “날 선 개혁의 칼을 들어야 하는 입장에서 뚜렷이 드러난 흠결을 안고 직무를 제대로 수행할지 의문”이라고 비판하면서도 사퇴 요구를 강하게 하지 않았다.
심 전 대표를 포함한 6명의 현역 의원과 당 지도부는 4월 10일 비공개 의원총회에서 김 전 원장에 대해 사실상 ‘불가’ 쪽으로 기울었다. 이 과정에서 심 전 대표는 당 지도부 등에게 문재인 정부 인사 참사에서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며 강한 야성을 주문했다. 앞서 정의당 정책위원회가 3월 30일 김 전 원장에 대해 ▲채무자 보호 강화 ▲국책은행을 포함한 금융기관 경영 건전성 강화 ▲금융권 채용비리 근절 등을 주문한 것과 비교하면 확연한 온도 차다. 심 전 대표와 당 투톱인 노회찬 원내대표는 김 전 원장의 위법성 논란이 해임에 이를 정도인지 봐야 한다며 신중론을 폈지만, 막판 ‘김기식 불가론’에 탑승했다. 정의당은 결국 4월 12일 “김 전 원장은 칼자루를 쥘 자격이 부족하다”며 김기식 자진사퇴를 당론으로 정했다.
정의당 데스노트 위력이 드러난 것은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지 한 달 만이다. 첫 번째 희생양은 ‘몰래 혼인’ 논란에 휩싸인 안경환 전 법무부 장관 후보자였다. 그는 저서와 칼럼 등에서 ‘여성은 술의 필수적 동반자’, ‘사내는 예비 강간범’, ‘계집은 매춘부’ 등의 비뚤어진 여성관을 보였다. 또한 1975년 한 여성 도장을 위조해 혼인신고를 했다가 무효 판결까지 받았다.
정의당은 안 전 후보자를 향해 “성매매를 합리화하며 저열한 성 인식을 드러냈다”며 “무척 실망스럽다”고 사퇴를 촉구했다. 청와대는 당시에도 즉각 반응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지난해 6월 16일 안 전 장관에 대해 “청문과 과정에서 결정적 하자 등이 나오면 지명을 철회할 수 있다”고 출구전략을 모색했다. 안 전 장관은 청와대 의중이 드러난 지 1시간 만에 문 대통령에게 사의를 표명했다.
두 번째 희생자는 조대엽 전 고용노동부 장관 후보자였다. 조 전 장관은 음주운전 의혹을 비롯해 대학교수 재직 시 기업 사외이사 겸직, 2대 주주로 있던 회사(리서치21)의 불법 여론조사, 부양가족 허위 등록을 통한 소득공제 의혹 등에 휘말렸다. 야권은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전체회의 등을 거부하면서 추경 연계 움직임을 폈다.
정의당도 “의혹 해명도 제대로 하지 않았고 전문성도 수준 미달”이라고 파상공세에 가담했다. 여당 내부에서조차 ‘조대엽 불가론’이 확산됐다. 조 전 장관은 결국 지난해 7월 13일 자진 사퇴했다. 형식은 조 전 장관의 자진 사퇴였지만, 국정 정상화 물꼬를 트기 위한 문 대통령의 ‘읍참마속’ 결단이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정의당은 문 대통령이 지난해 8월 임명한 박기영 전 과학기술본부장에 대해 이른바 ‘황우석 사태’의 장본인이라며 사퇴를 촉구했다. 청와대는 박 전 본부장 논란에 “공과를 같이 봐야 한다”고 엄호에 나섰지만, 야권은 “최순실의 공과를 같이 보자는 논리”라고 맹비난했다. 박 전 본부장은 8월 11일 자진 사퇴했다.
9월 정국의 대미는 문재인 정부의 1기 내각의 마지막 퍼즐이었던 박성진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후보자가 장식했다. 뉴라이트 사관 논란부터 아파트 분양권 다운계약서 거래 의혹, 대학동문 기업에서 받은 자문료 통째 누락 등으로 여론은 급속히 악화됐다. 이정미 정의당 대표는 “인사청문회를 할 것도 없다”며 “박근혜 시대에나 있을 법한 인사”라고 문 대통령을 벼랑 끝으로 몰았다.
그러자 여권 내부에서도 ‘박성진 불가론’이 확산됐다. 국회 인사청문회는 가까스로 열렸지만 뉴라이트 정체성 논란이 그치지 않는 데다, 김이수 전 헌법재판소장 국회 표결까지 얽히면서 청와대는 9월 15일 박 전 후보자 사의를 수리했다.
정의당의 데스노트가 정국을 연이어 뒤흔들지는 미지수다. 당 내부에는 문재인 정부와 각을 세우는 기조에 대한 우려가 적지 않다. 정의당은 김 전 원장 사퇴 직후 “문 대통령은 개혁 의지가 강력한 인물을 신임 금감원장으로 임명해야 한다”며 “야당도 금융적폐 청산에 적극 협조해야 한다”고 톤다운했다. 한국당·바른미래당 등이 김 전 원장 사퇴 직후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 책임론으로 전선을 넓히는 것과는 확연히 다른 셈이다.
‘드루킹 사태’에서도 정의당은 민주당과 공조행보를 벌이면서 보수야당에 맞서고 있다. 정치 이슈에 따라 양쪽을 줄타기하는 정의당의 강온양면 전략은 계속될 전망이다. 정의당 한 관계자는 차기 금감원장 후보군으로 거론되는 이들 중 데스노트 대상자가 있느냐는 질문에 “구체적으로 검토하지 않았다”며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민주당 한 보좌관은 “사실상 선거연대도 물 건너 간 상황에서 양측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는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윤지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