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컵 갑질’로 논란이 된 조현민 대한항공 전무. 사진=연합뉴스
그렇다면 정신분석·심리 전문가들은 재벌가의 이러한 ‘갑질’ 행태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신진욱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한국 사회가 조직 상하관계에서 업무상의 정당한 권한뿐 아니라 사실상 인신적 지배를 행사하기 때문”이라며 “재벌 오너의 경우 특히 지배구조가 견제받지 않는 독점적 권력 하에 있다. 힘의 불균형이 과도하고, 모든 구성원의 기본권을 보장해주는 견제력이 약하기 때문에 반복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정신심리학에서는 갑질이 ‘열등감의 투사’라는 분석도 내놓고 있다. 이에 대해 소아정신과 전문 김은지 마음토닥정신과 원장은 “이런 분석을 내놓으면 ‘재벌이 왜 열등감이 있겠어’ 생각하기 쉽다”며 “하지만 열등감은 부족한 것이 많아서 생기는 게 아니다. 내가 원하는 만큼 인정받지 못하거나, 이루지 못할 때 열등감을 느낀다. 따라서 남들이 봤을 때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부족하다고 느끼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설명했다.
‘물컵 갑질’이 불거진 이후 언론을 통해 조현민 전무의 음성파일도 공개됐다. 이 음성파일을 들어보면 조 전무는 3분 넘게 끊임없이 고성을 지르고 있다. 보통은 화를 내는 당사자가 진이 빠져 멈출 법도 한 상황.
하지만 황상민 심리학 교수는 그런 모습이 그들에게는 일상적 대화일 것이라고 봤다. 황 교수는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하고 갑질하는 사람들은 단순히 억누르던 감정이 폭발해 고성을 내는 게 아니다. 그게 그들의 의사소통을 하는 방식”이라며 “그들은 기본적으로 자신들이 소리를 지르며 이야기하지 않으면, 노예들이 제대로 안 움직인다고 생각한다”고 분석했다.
앞서 김은지 원장은 “소아청소년 의사 관점에서 보면 ‘왜 저렇게 조절이 안 될까. 상대방이 상처받을 걸 알면서 저렇게까지 할 수 있나’ 생각이 든다”며 “공감능력과 감정조절능력에서 차이를 만들어낸다고 볼 수 있다”고 진단했다.
공감능력은 상대방의 감정이나 생각, 처지를 내가 머리와 마음으로 이해하고, 그 사람의 상태가 공명처럼 느끼게 되는 것을 말한다. 이런 공감능력은 타고나는 부분도 있지만, 어릴 적부터 무수한 트레이닝을 통해 만들어진다고 한다.
김 원장은 “예를 들어 애가 우는데 엄마가 그 이유를 이해해주려하지 않고 ‘울지 말고 사탕이나 먹어’라면서 무시하고 키우면, 아이는 그 정도의 반응만 하는 사람으로 자라게 된다. 그럼 나중에 사장이 된 그 아이는 직원이 ‘사장님 왜 저만 미워하세요’라고 하면, ‘시끄러워, 시급이나 올려줄게’ 이런 식으로 대응하게 된다”고 말했다.
감정조절능력 역시 마찬가지다. 유년기 시절부터 부모에게 제대로 된 관심과 사랑을 받지 못하면, 나중에는 이해받을 거라는 기대조차 안 생긴다. 그러면 감정을 스스로 누그러뜨리는 능력을 탑재하지 못하게 되고, 어떤 일을 당했을 때 이해 받을 것이라는 기대를 지레 포기하고 화부터 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재벌 일가의 ‘갑질’ 문제가 끊이지 않는 것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주변의 다른 오너들이 구설에 오르는 것을 보면, 본인은 논란에 휩싸이지 않도록 주의하고 조심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재벌 일가는 일반인들과 다른 인식구조를 가지고 있는 걸까. 신진욱 교수는 “물론 재벌들은 일반인과 다른 인식구조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인식으로 업무와 대인관계를 이어가도 큰 문제가 생기지 않는 객관적 조건이다”라며 “‘주의해야겠다’는 생각은 내가 주의하지 않으면 타인의 저항이 예상될 때 생겨난다. 내가 어떻게 행동해도 아무도 저항할 수 없다고 여겨지면, 주의나 존중을 않게 된다”고 지적했다.
김은지 원장은 “한국 국민들이 마음 속에 품고 있는 생각 중 하나는 돈 많은 사람들은 어떤 잘못을 해도 시간이 지나면 결국 자기 자리로 돌아온다는 거다. 이는 망상이 아니라 그런 사례들이 쌓여 형성된 것”이라며 “욱하는 감정을 참는 사람들은 직장, 돈 등을 잃으면 나중에 돌이킬 수 없는 이들이다. 내가 돈이 있고, 회사가 내꺼고, 돌아올 자리가 있는 이들은 화를 참을 이유가 없다”고 설명했다.
한국의 대기업 창업주들과는 달리 재벌 2·3세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풍족하고 다 갖춰진 삶을 누리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다면 이러한 물질적 풍족함이 이들의 사고에 영향을 미칠까.
김 원장은 “조절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고 참아낼 때 자라난다. 하지만 재벌 2세들은 태어난 순간부터 보통 원하는 것을 다 가질 수 있고, 하고 싶은 것을 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환경이라고 가정한다면 조절능력이 덜 형성될 개연성이 있다”고 유추했다.
반면 성장과정의 물질적 풍족함이 큰 원인이 아니라는 의견도 있다. 신진욱 교수는 “성장과정에서 물질적으로 궁핍했던 사람이 커서 남 위에 군림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됐을 때 타인에 대해 폭력적으로 되는 경우도 많이 있다. 또한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자란 이들 중에는 그 풍족함을 토대로 타인과 사회에 큰 기여를 하기도 한다”며 “문제는 타인을 존중하지 않아도 되는 절대적 권력을 어려서부터 경험하면서 성장하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실제 ‘노블레스 오블리주’ 등으로 대표되는 국내외 사례를 보면 막대한 부를 가지고도 주변인들에 겸손하고 베푸는 이들을 볼 수 있다. 결국 어린 시절 가정교육의 문제가 제기된다.
황상민 교수는 “자수성가한 사람들도 10~20년 지나면 자기 밑에 일하는 직원들에 ‘고맙다’는 마음보단 ‘저들은 내 덕분에 먹고 사는 사람들’이라는 암묵적인 인식을 갖게 된다”며 “하물며 태어난 순간부터 재벌이었던 2세들은 어떻겠느냐. 어릴 적부터 부모들이 ‘직원들은 항상 우릴 위해 일해주니 고맙게 여겨야 한다’고 엄격하게 가르치지 않는 한, 밑에 사람들을 하대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배우게 된다. 저들은 2류 인간이고, 나는 특수한 귀족이다라는 인식이 굳어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재벌 2세들이 안하무인격으로 감정을 마음대로 폭발시키는 것은, 그동안 주위 사람들이 당연히 받아줬기 때문이다. 주변에서 아무도 ‘회장님, 자녀분들 이런 식으로 키우시면 안 됩니다’ ‘집안망신입니다’라고 충고해 주지 못한 것이다. 그 부분이 가장 비극적 현상이다”라고 아쉬워했다.
한편 ‘갑질’을 근절하기 위해서는 갑을 두드리는 것보다 을의 문화를 바꿔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황상민 교수는 “재벌 오너이기 때문에 ‘갑질’이 특별히 더 부각되는 것이지, 한국 사회 어디서나 갑질은 벌어지고 있다”며 “갑질을 당연히 받아들이는 을의 문화도 먼저 고려해봐야 한다. 노예취급을 받더라도 돈을 위해 노예처럼 살아야 한다는 우리 스스로의 인식에 변화가 없다면, 갑을 문제는 바뀌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