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을 방문 중인 대북특사단이 3월 5일 평양에서 김정은 위원장과 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청와대
# 달라진 김정은, 서훈 덕분?
문재인 정권 출범 후 인사와 관련해 수많은 하마평이 나왔지만 국정원장 자리만큼은 대부분 한 명을 지목했다. 대선 캠프 국방안보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았던 서훈 원장이었다. 서 원장과 캠프에서 가깝게 지냈던 한 친문 의원은 “문 대통령이 구상하고 있던 새로운 대북관계 정립의 ‘키맨’이 바로 서 원장이었다. 국가안보실장 기용설도 나오긴 했지만 캠프 때부터 국정원장 발탁이 거의 확실시됐었던 인물”이라고 귀띔했다.
서 원장과 문 대통령이 인연을 맺은 것은 200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국정원에 근무하던 서 원장은 청와대(국가안전보장회의)로 파견 근무를 나갔고, 이때 문 대통령은 시민사회수석으로 재직 중이었다. 그 후 서 원장은 2012년 문재인 대선 캠프 ‘남북경제연합회 위원’으로 참여하면서 본격적으로 문 대통령을 도왔다. 문 대통령은 의원 시절에도 서 원장의 대북 정보를 상당히 신뢰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 원장은 국내에서 손꼽히는 ‘대북통’이다. 1980년 국가안전기획부(현 국정원)에 입사한 이후 대북 분야에서 잔뼈가 굵었다. 흥미로운 점은 2000년, 2007년 남북정상회담에서 실무를 맡았다는 점이다.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에 이어 세 번째 정상회담도 그의 손을 거친 셈이다. 앞서의 친문 의원은 “서 원장을 임명했을 때부터 정상회담에 대한 문 대통령 의지를 엿볼 수 있었다”라고 했다.
야권과 보수진영에선 이러한 서 원장의 경력을 거론하며 국정원장 임명을 반대하기도 했다. 대공 활동을 주 임무로 하는 국정원 수장이 ‘친북’ 성향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일부 국정원 퇴직자들도 여기에 가세하며 서 원장 흠집 내기에 나섰다. 이에 대해 친문 핵심부는 “북한을 잘 아는 것과 친북 성향은 엄연히 다르다. 서 원장은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무너진 ‘휴민트(인적정보수집)’를 복원할 적임자”라며 이를 일축했다.
문 대통령이 지난해 7월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협정 체결 등을 골자로 한 이른바 ‘베를린구상’ 발표 후 서 원장의 움직임은 빨라졌다. 두 달 후 북의 핵실험으로 전세계 여론이 악화됐지만 서 원장은 모든 대북 채널을 총동원해 정보 수집에 나섰고, 김정은 위원장으로부터 긍정적 시그널을 얻어낸 것으로 전해진다. 서 원장이 대남 총책인 김영철 통일전선부장과의 ‘핫라인’을 구축한 것도 이 무렵이라고 한다. 정보당국의 한 관계자 말이다.
“서훈-김영철 라인 가동으로 남북관계의 새로운 물꼬가 트였다. 김정은 위원장도 서훈 원장이라면 믿을 수 있는 대화 파트너라고 말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자신의 아버지인 김정일과 직접 만나 정상회담을 성공적으로 치렀던 경험이 있는 인물 아닌가. 북에서는 김일성이나 김정일과 만난 남한 인사들을 높게 평가하는 측면이 있다. 김정일은 ‘북에는 왜 서훈 같은 인물이 없느냐’라며 서 원장의 협상력을 극찬한 바 있다. 김정은의 태도 변화엔 서 원장 공이 가장 크다. 북한의 사정을 워낙 잘 아는 서 원장이기에 북측 역시 다른 꼼수를 부리지 않고 솔직히 협상에 나섰을 가능성이 높다.”
서 원장은 1월 1일 김정은 위원장이 신년사를 통해 동계올림픽 참가 의사를 밝히는 등 우호적 스탠스를 취할 것이란 내용을 사전에 인지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다음날인 1월 2일 북한에 고위급회담을 제안하는 등 문재인 정부가 발 빠른 대응에 나설 수 있었던 것도 서 원장을 통해 어느 정도 상황 파악을 끝냈기 때문이란 게 여권 인사들의 설명이다. 이 역시 서훈-김영철 라인이 지난해부터 긴밀히 가동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 트럼프도 정의용이라면 오케이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은 정상회담 전까진 여권에서 그다지 주목을 받는 인사는 아니었다. 2012년 대선 때 문재인 캠프 정무특보를, 지난 대선에선 외교자문그룹 ‘국민아그레망’ 단장을 맡긴 했지만 핵심 친문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오히려 그가 국가안보실장으로 발탁되자 여권 내에선 ‘미국과 지나치게 가깝다’라는 이유로 부정적 반응이 나오기도 했다. 군인 출신이 맡아오던 국가안보실장 자리에 통상 전문가인 정 실장이 적합한지에 대한 의문부호도 뒤를 이었다.
한 친문 의원은 “(정 실장은) 운이 좋은 편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가장 큰 고민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미국의 트럼프 정부를 어떻게 상대하느냐였는데 외교관 출신인 정 실장이 적임자였다. 트럼프 최측근들과 언제든 소통이 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이 아니었다면 정 실장도 지금처럼 실세가 되지는 못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는 ‘미국통’으로 분류되는 정 실장에 대한 문 대통령 기대가 남달랐음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미국통’ 정 실장은 위기 속에서 진가를 드러냈다. 문 대통령 취임 후 사드 배치 문제로 한미관계가 얼어붙자 정 실장은 극비리에 방미, 트럼프 대통령 최측근 참모인 맥매스터 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보좌관을 만났다. 당시 정 실장이 맥매스터의 집을 직접 찾아가 5시간 넘게 대화를 한 일화는 유명하다. 그 후 정 실장과 맥매스터는 사적인 대화를 나눌 정도로 가깝게 지내는 것으로 전해진다. 정 실장은 맥매스터 후임인 볼턴 현 보좌관, 폼페이오 국무장관 등과도 수시로 연락을 하며 한미 관계 조율에 힘썼다.
정 실장은 정상회담 논의를 위한 대북 특사단 수석을 맡아 3월 5일 김정은 위원장을 만나고 왔다. 이를 두고 여권에선 트럼프 대통령을 염두에 둔 포석으로 풀이한다. 참여정부 때 노무현-김정일 정상회담 추진에 관여했던 한 정치권 인사의 말이다. “남북정상회담에서 가장 중요한 변수는 미국이다. 북핵이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는 이상 무엇보다 미국을 설득해야 한다. 문 대통령에겐 김정은보다 트럼프가 더 큰 골칫거리였을 것이다. 정 실장은 지난해부터 꾸준히 트럼프 주변을 관리해와 신뢰가 쌓인 상태다. 트럼프도 정 실장의 화법 등에 대해 흡족해 하는 것으로 안다. 정 실장을 특사단 수석에 임명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1박 2일간의 특사 일정을 마치고 돌아온 정 실장은 곧바로 미국 중국을 연이어 방문해 그 성과를 설명했다. 김정은 트럼프 시진핑 등 3국의 정상들을 연이어 만나며 남북정상회담, 북미정상회담 등 굵직굵직한 현안을 논의한 정 실장을 가리켜 1970년대 미·중 수교를 성사시킨 헨리 키신저를 빗대 ‘한국의 키신저’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한 청와대 인사는 “요즘 정 실장을 보기가 힘들다. 거의 해외 출장 중인데, 그야말로 시간을 쪼갠 살인적인 스케줄”이라면서 “정 실장의 두터운 해외 인맥이 이번 정상회담 성사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고 말했다.
# 문재인 복심 나야 나
‘북한통’ 서훈, ‘미국통’ 정의용과 함께 이번 정상회담의 삼각축이라고 불리는 이가 윤건영 국정상황실장이다. 여권에서는 정상회담 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던 임종석 비서실장보다 윤 실장을 더 주목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비록 언론 등에는 거의 노출되지 않았지만 문 대통령의 각별한 신임 아래 은밀하고도 핵심적인 역할을 맡은 것으로 알려지기 때문이다. 윤 실장과 가깝게 지냈던 한 의원실 보좌관은 “문 대통령이 속을 털어놓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사다. 문 대통령이 2012년 대선에 뛰어들 때부터 가장 가깝게 따라다닌 최측근이다. 입이 무겁고, 성실한 참모다. 문 대통령 임기와 함께할 순장조”라고 했다.
문 대통령 보좌관 출신인 윤 실장이 맡고 있는 국정상황실장은 사정기관과 정부부처에서 올라온 각종 정보를 취합, 선별하는 자리로 핵심 요직이다. 이런 그가 서훈 원장, 정의용 실장 등과 함께 대북 특사에 포함되자 그 배경을 두고 설왕설래가 벌어지기도 했다. 윤 실장이 문 대통령으로부터 모종의 ‘임무’를 받고 북을 방문한 것 아니냐는 얘기였다. 윤 실장은 평양에서 열린 남측 예술단과 태권도시범단 방북 때도 동행했다. 이에 대해 한 정보당국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윤 실장은 자타가 공인하는 문 대통령 복심이다. 정의용 실장이 특사단을 이끌긴 했지만 윤 실장이 따로 맡은 부분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 그래서 두 차례나 북을 방문하고 왔을 가능성이 높다. 정 실장이나 서 원장이 각각 미국과 북한을 ‘마크’한 것이라면 윤 실장은 그야말로 문 대통령의 대리인격인 셈으로 특사단에서 차지하는 입지는 남달랐다. 윤 실장만이 전할 수 있었던 문 대통령의 메시지가 있었을 것이다.”
서훈-김영철, 정의용-맥매스터 조합처럼 윤 실장에게도 ‘카운터파트너’가 있었다. 노동당 서기실의 김창선 실장이다. 김정일 때부터 서기실에서 근무한 것으로 알려진 김 실장은 ‘김씨 왕조의 집사’로 불리는, 김정은의 최측근 인사 중 한 명이다. 김정은에게 올라가는 모든 보고가 그의 손을 거친다고 한다. 윤 실장이 청와대에서 맡고 있는 역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윤 실장은 두 차례의 방북, 그리고 정상회담 실무 논의 과정에서 김 실장과 긴밀한 의견을 주고받았다. 양측 정상의 최측근이자 복심 인사들이 정상회담의 구체적인 방법과 일정 등을 논의했던 것이다. 이를 두고 ‘집사 라인’이라고도 부른다. 4월 20일 구축된 문재인-김정은 직통전화(핫라인) 역시 둘의 작품인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윤 실장은 직접 브리핑을 열어 이를 공개했는데, 그가 기자들 앞에 선 것은 현 정권 들어 이번이 처음이다.
핵심 친문 의원은 “서훈 원장이 기반을 다지고 정의용 실장이 튼튼한 기둥을 세웠다면, 윤 실장은 지붕을 얹고 인테리어까지 마무리를 해 공사를 끝낸 것이나 다름없다. 윤 실장은 정의용·서훈처럼 대외적으로 알려져 있진 않지만 숨은 주역”이라면서 “이들 3인방이 안팎에서 환상의 호흡을 맞춘 것도 역사적인 정상회담을 이뤄낼 수 있는 비결 중 하나”라고 말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