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위의 재벌개혁 수완이 아직 반쪽에 불과하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25일 공정위에 따르면 2013년 9만 7658개였던 대기업 순환출자 고리가 2018년 4월 20일 기준 41개로 99.9% 줄었다. 문재인 정부가 순환출자 해소를 재벌개혁 핵심 과제로 제시하면서 공정위가 압박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올해 순환출자 고리를 완전히 해소한 대기업은 롯데, 농협, 대림, 현대백화점, 4곳이다. 남은 고리는 삼성·현대자동차가 각각 4개, 현대중공업 1개, 영풍 1개, SM 27개다. 공정위는 “각 기업집단이 경영 현실에 가장 적합한 방법을 찾아 자발적으로 해소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변화”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일각에선 상반된 평가가 나온다. 일부 기업들의 부적절한 해소 과정 등이 순환출자 고리 해소의 본래 목표인 ‘기업 경영의 책임성·투명성 제고’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부 기업은 계열사 지분을 공익재단에 증여·처분하는 등 편법을 쓰기도 한 것으로 나타났다. 해소 과정에서 약해진 오너 일가의 지배력을 다시 강화하거나 순환출자 고리를 손쉽게 없애기 위해서다. 또 지분을 재단에 증여하는 것은 각종 세금을 면제받을 수 있고 경영 승계의 토대를 마련하는 데도 용이하다.
지배구조 개편에 공익재단을 동원한 것 아니냐는 의심을 사는 곳은 영풍에 그치지 않는다. 박정훈 기자
지분을 재단에 넘김으로써 영풍이 세금 감면 효과도 노렸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현행법에 따르면 일반 공익법인은 기업 전체 지분의 5%까지, 영풍문화재단 등 성실공익법인은 10%까지 상속·증여세를 면제받을 수 있다. 오는 7월부터는 5%로 일원화된다. 이 같은 논란에 대해 영풍은 말도 안 된다는 입장을 전했다. 영풍 관계자는 “새 정부 정책에 발맞춰 순환출자 고리를 선제적으로 해소한 것”이라며 “증여세 감면, 지배력 강화 등은 어디까지나 의혹 제기에 불과하다”고 해명했다.
이 같은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한 대기업도 여럿 있다. 삼성은 2016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작업에서 생겨난 신규 순환출자 해소를 위해 삼성생명공익재단을 동원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현대차, 현대중공업, LG, 롯데, 대림 등도 공익재단의 계열사 주식 취득으로 비난을 산 바 있다.
이와 관련한 공정위 조치는 더디기만 하다. 공정위는 지난 1월 대기업들의 이 같은 편법을 파악하고자 공익 법인 운영 실태 2차 조사에 착수했지만 해당 조사는 처벌이 아닌 광범위한 제도 개선을 목표로 하고 있다. 실태 조사를 마친다 해도 편법을 저지른 오너 일가 등을 최종적으로 제재하기 위해선 추가 조치가 필요하다.
공익재단에 대한 지분 증여 등이 계열사나 총수 일가 이익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입증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재단 보유 재산을 공익사업에만 사용해야 한다는 ‘공익법인 설립·운영에 관한 법률’이 현실적으로 잘 적용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한 법무법인 변호사는 “계열사가 보유 주식을 공익재단에 준 것을 두고 범죄라 명명해 처벌하긴 사실상 불가능하다”며 “결국 공익재단 의결권을 제한하는 법령이 마련돼야 하는데 이와 관련한 공정거래법 개정안은 2년 가까이 계류 중”이라고 설명했다.
공정위는 이와 관련해 아직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공정위 관계자는 “현재 공익법인들로부터 자료를 모두 받았다”며 “운영 실태를 파악해 공익법인들이 설립 목적에 부합하게 운영되고 있는지 등을 알아볼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이번 조사는 제도 개선을 위한 것으로 부처마다 소관 업무도 다르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기업들의 편법을 제재할지는 더 이상 말씀드리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공정위가 기업들의 이 같은 편법을 매듭짓지 않는 이상 90% 이상 정리됐다고 자평한 순환출자 고리 해소와 이와 관련한 재벌 개혁은 반쪽짜리라는 평가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라고 지적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이성진 기자 reveal@ilyo.co.kr
대기업 순환출자 해소 득과 실 “경영권 위협 우려보다 긍정효과 더 크다” 대기업들의 순환출자 고리가 대폭 해소되면서 재계 한편에서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순환출자 해소가 기업 경영의 투명성과 책임성을 제고하지만, 헤지펀드 공격 등엔 취약해지기 때문이다. 1997년 경제위기 직후 기업들이 부실 계열사를 살리기 위해 유상증자에 대거 참여하면서 급증한 순환출자는 기업의 소유·지배구조 투명성을 훼손하며 여러 문제점을 야기했다. 가공 자본을 만들어 총수 일가의 지배력 확대를 편법적으로 뒷받침한 것은 물론, 적은 자본으로 다수 지분을 지배하는 비정상적 출자방식을 보편화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소액주주와 채권자 등의 권익이 침해당했다. 정부는 2013년 신규 순환출자를 전면 금지하고 기존 순환출자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는 내용의 공정거래법 개정안을 내놓으며 순환출자 해소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2018년 4월 20일 기준으로 남은 순환출자 고리는 총 41개다. 재계는 순환출자 해소 때문에 기업 경영권이 각종 위협에 노출될 것이라고 우려하기도 한다. 간소화된 기업 지분구조에 단기 차익을 노린 글로벌 헤지펀드 등이 들어와 경영상 무리한 요구를 하면서 기업을 공격할 가능성이 커질 수 있다. 실제로 SK와 KT&G는 각각 영국계 펀드 소버린과 미국계 펀드 칼 아이칸의 의결권 행사 등으로 수천억 원을 잃은 바 있다. 최근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은 2015년 삼성에 이어 지배구조 개편을 준비 중인 현대차를 타깃으로 삼아 이 같은 우려를 가중시키고 있다. 대기업들은 순환출자 고리 해소에 거액의 금액을 들여야 한다는 것도 부담스럽다고 하소연한다. 사업·설비 투자 등에 써야 할 재원을 거액의 지배구조 개편 충당 금액으로 쓸 수밖에 없다는 것. 일례로 지난 4월 5일 현대백화점 정지선 회장과 정교선 부회장은 순환출자 고리를 끊기 위해 현대그린푸드 지분 7.8%와 현대A&I 지분 21.3% 지분을 1500억 원에 사들여야만 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 같은 우려는 과장됐다고 말한다. 최배근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이론적으로 일리는 있지만 실제 기업들은 경영권 방어를 위협하는 불안 요소 등을 신경 쓰며 고리를 해소해나간다”며 “오히려 순환출자를 통한 기업들의 독단 경영이 야기하고 있는 사회경제적 피해가 더 막대한 만큼 해소의 긍정적 효과를 더 크게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