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공동사진기자단
‘전쟁광’ ‘골칫덩어리’ ‘변덕쟁이’ 등등. 그동안 해외 언론 등이 김정은 위원장에게 붙인 별명들이다. 원색적으로 그를 비난하고 조롱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김 위원장을 ‘mad man(미치광이)’라고까지 했다. 김 위원장이 측근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하며 ‘공포정치’를 펼친 것에 대해서도 잔인한 독재자라는 비난이 봇물을 이뤘다. 어디로 튈지 몰라 예측이 불가능한 김 위원장은 그동안 전 세계에서 ‘고립무원’ 처지였다.
지난해 9월 핵개발 실험, 11월 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로 남북·북미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고 김 위원장에 대한 국제사회 비난도 증폭됐다. 북한에 우호적이었던 중국조차 여기에 가담했다. 동시에 미국이 주도한 대북제재 수위는 최고조에 달했다. 북이 가장 두려워하는 해상차단 조치도 이뤄졌다. 역설적으로 김 위원장 스탠스에 변화 조짐이 감지된 것도 이 무렵부터다. 지난해 10월경부터 김 위원장은 남측은 물론, 미국과 중국 등에 대화 테이블에 나갈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진 것으로 전해진다.
김 위원장은 1월 1일 신년사를 통해 본인의 심경을 그대로 드러냈다. 김 위원장은 평창동계올림픽 참가 가능성을 언급했고, 제재라는 단어를 여러 번 사용했다. 남측과의 관계 개선 의지를 피력하는 한편, 국제사회의 대북제재에 대한 부담감을 토로했던 것이다. 그 이후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 논의가 빠르게 진행됐다. 김 위원장은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 주석을 만나기도 했다.
남북정상회담 직전 북한에 방문한 중국인 관광객 32명이 교통사고로 숨지자 김 위원장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 화제를 모았다. 사고 후 김 위원장은 “책임을 통감한다” “속죄한다” 등과 같은 표현을 써가며 수습에 힘썼다. 집권한 뒤 처음으로 중국대사를 방문해서도 낮은 자세로 일관했다. 북한 최고 지도자가 국내에서 발생한 사고에 대해 이런 식의 태도를 보인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를 두고 일부 외신은 “김 위원장이 달라졌다” “김 위원장의 배려가 돋보였다”고 보도했다.
4월 27일 남북정상회담에서 김 위원장은 여유로우면서도 직설적인 입담을 과시했다. 때론 유머를 섞었다. 이를 지켜본 언론과 정치권 인사들은 ‘파격’이라고 했다. 어찌됐건 국제무대에서 성공적인 ‘데뷔전’을 치른 셈이다. 이에 대해 한 정보 당국자는 “철저히 계산된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동안 김 위원장에 대해 많은 오해를 한 것 같다. 나뿐 아니라 해외 정보기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김 위원장에 대한 정보가 극히 제한적이다 보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라고 말했다.
이날 김 위원장 발언 중 전문가들의 눈길을 끌었던 것 중 하나는 북의 경제적 열악함을 인정한 부분이다. 김 위원장은 “문 대통령이 오시면 솔직히 걱정스러운 게 우리 교통이 불비해서 불편을 드릴 것 같다”며 “평창올림픽 갔다 온 분이 말하는데 평창 고속열차가 다 좋다고 하더라, 남측의 이런 환경에 있다가 북에 오면 참 민망스러울 수 있겠다”고 했다. 앞서의 정보 당국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 말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북의 경제적 현실이 남측보다 못하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했다. 북에서는 절대적으로 금기시되는 일이다. 김일성이나 김정일도 이런 식의 말은 하지 않았다. 김정은의 모습은 대외적으론 솔직하고 통 큰 지도자의 면모를 나타내기 위한 것일 수 있겠지만 한 편으론 북에서의 입지가 공고해졌다는 자신감이기도 하다.”
북한 사정에 정통한 중국의 한 관리도 김정은이 달라진 배경에 대해 묻자 비슷한 답변을 내놨다. 북 체제를 확실히 장악한 데서 비롯됐다는 얘기다. 다음은 그의 말이다. “김정은은 어린 나이에 갑작스럽게 권력을 승계 받았다. 공포정치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본인이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기간 김정은은 국내 정치에 힘을 쏟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김정은 체제는 어느 정도 안정기로 접어들었다. 눈치 보지 않고 본인의 구상을 펴 나갈 때가 온 것이다. 김정은이 중국의 덩샤오핑 모델을 벤치마킹하고 있다는 얘기가 파다하다. 진짜 김정은은 이제부터다.”
그러나 김정은이 국제사회의 제재에 백기투항했다는 주장도 적지 않다. 특히 미국 측은 자신들의 경제 제재가 북한 경제의 숨통을 조였고, 김 위원장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냈다는 판단을 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미국의 무력 동원 가능성이 제기됐다는 점도 김 위원장에겐 부담으로 작용했다. 국내에 파견 중인 미국 정보 당국자는 “궁지에 몰린 김정은의 선택지는 별로 없었다. 경제가 무너지면 체제도 지킬 수 없다. 대한민국, 미국 등과 대화하고 핵을 폐기하는 것이 거의 유일한 대책”이라면서 “앞으로 김정은은 최대한의 경제적 지원을 이끌어내려 할 것”이라고 말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